< 2장 9화 - 제도 정비(2) >
사정전(思政殿) 앞의 마당에는 문종이 즉위하고 나서 처음으로 친국(親鞫 - 임금이 중죄인을 친히 국문함)이 열리고 있었다. 본래 친국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기왕 벌어진 일을 확실한 명분으로 만들려는 문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죄인을 끌어내어라!”
“예!”
이미 의금부로 압송되어 고신(고문)을 당한 이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미 곤장을 얻어맞고 몸이 부어있었으며. 온 몸에 피멍이 박혀있는 이 하나.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이가 둘. 셋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계속 조아렸다.
“너희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렸다!”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사특한 자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 억울하옵니다!”
문종은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의금부에서 처음 진술한 내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죄목을 읽어 내려가며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상왕께서 만드시고 북방에서 달자들을 소탕하는 것에 이바지한 정병중의 정병인 훈련도감의 향시(鄕試 - 지방 시험)를 더럽히다니. 네 놈들이 지금 제정신이더냐!”
“저 전하 그렇게 많은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내 훈련도감에서 재주가 있는 노비들이 면천을 받는 기회를 마련하려 하였거늘! 그 면천으로 내려지는 포상에 눈을 돌리다니! 이것이 대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1000명이 된 훈련도감 초모는. 각 지역을 담당하는 20곳의 목(牧)에서 3위까지 선발하고. 34곳의 큰 현(縣) 에서는 차석까지. 나머지 141개의 현은 수석만을 선발한다. 여기 중에 음죽현에서 수석을 갈아치우는 부정행위가 일어났다.
이미 확실한 증좌가 있었다. 음죽현(陰竹縣 - 현 경기도 이천 일대)의 현감 권준(權蹲)으로 시작한 비리를 고발한 이는 다름 아닌 수양대군의 제자 중 한명이었다. 몸에는 자신이 없어 수양대군에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증인을 들라 하라!”
체구가 제법 큰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청년의 두 눈은 타오를 듯이 맹렬했다.
“음죽현의 전 생원.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하여 소상히 고변하라.”
“전하께 송구할 뿐이옵니다. 음죽의 향반인 최 씨 집안의 마름이 저에게 말하길 ‘그대가 수양대군 어른의 제자이며. 몸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으니 노비 한 명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의 당당한 팔이 죄인을 향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흠칫 놀랄 지경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저 자는 노비인 청국이가 아니고! 인근의 소작농 전 가(전 아무개, 범죄자나 평민은 이렇게 낮춰 부른다) 였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저는 전 생원과 연관이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이 서한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주 올렸던 장계와 필적이 완전히 같도다!”
수많은 장계들과 증좌들이 문종의 옆에 쌓여있었다. 태연한 거짓말에 전 생원은 분노를 삭이며 손아귀를 쥐었다. 손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팔뚝에 힘줄이 솟구쳤다.
“전 가는 몸이 그렇게 좋지도 못하며. 행실이 온전하지 못하였으며. 정해진 기일을 궐하며 허송세월을 하니 향시를 통과할 가망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석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나중에 놈을 다시 만나고 모든 사실을 알았기에 고발하였습니다.”
“제가 수석인 것은 주변 사람들이 부족 하였기에.”
“죄인은 입을 다물 어라! 어디까지 거짓을 늘어놓을 것이냐! 네 놈은 훈련도감에서 결국 탈락하지 않았더냐! 아무런 부상도 없이 탈락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느냐! 또한 당시 참여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고변하는 증좌도 있느니라.”
훈련도감의 정원 천 명 가운데 훈련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30명 정도였다. 대부분 치료에 한 달 이상 걸리는 중상 혹은 중병이 원인이었으니. 순수하게 신체 능력이 부족하여 탈락한 이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향시의 선발 과정에서 부정으로 끝날 일도 아니고. 향반과 작당을 하여 멀쩡한 소작농을 노비로 속이다니! 도대체 네놈들은 무슨 생각을 가진 것이냐!”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신이 재물에 욕심을 부렸습니다!”
“시험을 어지럽힌 죄만 하여도 장 일백 대로 시작이며. 사사로이 재물을 노린 것만 하여도 장 일백 대이다! 더군다나 네 녀석들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느냐!”
증거는 모두 수집되었다. 음죽 현감 권준은 향반과 작당하여 향시의 수석을 바꾼 죄. 향반 최 씨는 뇌물을 준 것에다 멀쩡한 소작농과 작당하여 자신의 노비라 신분을 속인 죄가 확인되었으니.
판결은 냉엄했다. 음죽 현감은 향시를 더럽힌 죄로 장 100대와 유배형을. 향반 최 씨 또한 장 100대에 재산 몰수와 유배형을. 마지막으로 노비로 신분을 속였던 소작농 장 가는 장 100대에 천역으로 변경되어 개경 인근의 관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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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문종은 대신들 앞에서 전에 일어난 부정행위를 논하며 다시금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아니 삭이는 ‘척’을 하고 있었다.
“내 격정으로 숨이 차올라 어찌 할 줄을 몰랐소.”
“본디 새로운 제도가 생기면 그 틈을 노리는 모리배들이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주상전하께서는 이를 심려치 말아 주십시오.”
“그러한들 재발을 방지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소. 한번 일이 일어나면 이를 따라 더 교묘한 방법으로 눈을 속일 수 있지 않겠소.”
김종서를 비롯한 북방 전투를 벌인 대신들은 이번 일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훈련도감의 수준이 떨어지거나. 아예 제도가 바뀌어 정예도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향시를 철저히 감독하시옵소서.”
“물론 그럴 것이오. 그러나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면천을 내세웠더니 그를 악용하는 자가 생겨난다는 것이지.”
처음 행할 때부터 문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었다. 면천이 가져오는 부가 효과로. 노비의 가격의 몇 배에 해당되는 포상을 내려주는 제도가 문제였다. 본래의 목적은 몸이 좋은 사람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집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드디어 악용하는 자들이 생겼다.
“가장 쉬운 방도를 먼저 실행하고자 하오.”
“그 방도가 어떤 것이옵니까.”
김종서가 문종을 바라보자. 문종은 아주 간단하게 말을 시작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이도 굶주리고 삶이 고달프면 남의 집 답을 넘는 법이고. 곳간에 재물이 가득 쌓인 이는 쉬이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는 법이지. 앞으로 녹봉(祿俸)을 늘리고자 하니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신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늘어나는 녹봉이 얼마가 되었던 간에 분명 하나를 주고 하나를 가져갈 것이다. 새 왕은 상왕과는 달리 자신들을 다루는 일을 철저히 계산적으로 수행하였다. 서로 눈치를 보던 중. 결국 이조 판서 이선(李渲)이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전하께서 선한 뜻을 품는다 하여도 나라의 소득이 부족하다면 방도가 없사옵니다.”
“익히 알고 있소. 그러니 녹봉을 3할을 올릴 것이오. 지방 나졸부터 정승에 이르기까지. 5년간 4푼(4%)을 올려 2할이오.”
문종의 생각으로도 이것이 한계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나라의 수입과 지출을 모두 계산해 보면 2할을 올릴 경우 여유 자금이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놓인다.
“전하. 조금 과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나라의 세입을 올려야 하지 않겠소.”
“녹봉을 올리기 위해 세입을 올리는 것은. 아랫돌을 빼서 위에 괴는 것입니다.”
지출이 늘어나면 수입도 증가해야 한다. 당연한 흐름을 왕이 모르지는 않을 터. 정작 재정과 인구를 담당한 호조 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아랫돌이 늘어나면 해결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번에 음죽 일대를 낱낱이 조사해 본 결과. 분명 지리지에는 호수가 390호. 인구가 1088명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호수가 471호이고 인구가 2311명인지 영문을 알 수 없소.”
“그렇게 철저히 조사한 경우가 지금까지 없었사옵니다.”
“그렇소이다. 그런데 상왕께서 남긴 바로는. 아국의 총 호는 69만 호에 이른다 하였지만. 이걸 믿을 수 있겠소?”
참으로 합리적인 말이지만 누구도 실행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얼마나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고. 얼마나 많은 곳에서 숨어있는 이들을 찾아내야 한단 말인가.
“전하. 그렇다 한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렇다 한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소? 세자의 대에 가서 할 것이오? 아니면 머나먼 원손. 현손의 대에 가서 할 것이오. 명국은 그 드넓은 땅과 수많은 인구를 가지고도 이미 조사를 마쳤다 하는데.”
물론 문종 본인도 알고 있었다. 명의 호적은 잘해야 8할이 맞을 것이고 실지로는 6할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정확히 아는 이는 모두 자신의 편이다.
“우의정 김종서 아뢰옵니다. 명국은 지난 달자들의 소란으로 북경이 침탈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합니다. 하오나 정확한 호적을 바탕으로 수십만의 정병을 일거에 보내 달자들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렇소? 수십만의 정병이라 하면 아국의 모든 군을 합쳐도 따라올 수 없겠소.”
“영의정 하연 아뢰옵니다. 최근 들어 명국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백만에 달하는 백성들을 요동으로 이주시킬 준비를 마쳤다 합니다.”
백만. 수십만. 듣기만 하여도 얼굴이 창백해지는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문종은 신료들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분명 힘들고 고된 일이오. 그러나 명국이 수십만, 백만을 거리낌 없이 셈할 수 있는 나라인데 아국이 이러한 수를 논하지도 못하면 말이나 되겠소. 또한 지금 나서지 않으면 추후에 변고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소.”
“하오면 전하. 어떻게 시행하실 것입니까.”
지금까지의 조선은 호(戶)를 우선시하여 조사하였다. 그 가족이 사는 곳을 조사하는 것이니 한 집에 혼자 살아도 1호고 30명이 살아도 1호이다. 3년에 한 번씩 몇 호가 있는지만 조사하였고. 10세 미만의 아이들은 아예 인구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세금을 부과하는 대상도 호당 부과하며. 노역도 호의 인원수만 보고 대략적으로 부과한다. 지원금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대략적인 숫자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모든 고을의 호와 인구를 따로 조사할 것이고. 아이는 8세만 넘으면 무조건 인구로 기록하시오. 또한 관노비와 사노비를 모두 기록하시오. 훈련도감 초모에 더 이상의 부정은 없어야 하니. 앞으로 노비들의 조사에 있던 이들만 허가할 것이오.”
“그렇게 한다면 너무나 많은 소모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상세히 조사하는 것인데 외지에 나가 있거나. 일손이 부족하여 먼 곳에 있는 이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하지만 확실한 조사를 통해 세입이 증가한다면 녹봉을 3할은 올라갈 수 있지 않겠소. 잘하면 4할이 될 지도 모르겠군.”
죽어라 일해라. 그렇다면 녹봉을 더 올려주겠다. 하긴 지금의 녹봉은 먹고 살기에는 충분해도 사치를 부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노비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조금 걸리지만 부정을 방지하는 일이니 별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몇몇 대신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노비종부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견제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노비와 주인이 확실히 호적에 기록되어 있게 된다. 그러한 것 하나만으로도 태종 대왕의 치세처럼 함부로 나설 일은 없으리라.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호조에서는 어서 전국의 조사를 위한 기관을 편성하고. 그에 들어가는 비용을 알려 주시오.”
그렇게 전국적인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노비들의 조사에 대한 잡음이 많았지만. 녹봉이 올라간다는 말은 매우 매력적이었으니 참을 만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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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인근의 야산에 문종이 행차하였다 얕은 구릉 일대에는 검은 천이 쳐져 있었다. 수양대군이 8년 전에 가져온 남송시절의 농서를 바탕으로 하여 인삼의 재배를 시도하였고. 3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성공한 것이 지금이었다.
그나마도 온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수확을 하는 인삼들 중 상당수는 뿌리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3년까지는 멀쩡하게 자라다가 4년이 되니 버티질 못하는 것이었다.
“유가 가져온 서적이 아니었다면 수십 번은 더 시도를 하여야 가까스로 성공했겠지.”
“송대의 서적이 있기에 그나마 3년 만에 해법을 찾았습니다.”
“이 토양을 찾느라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나.”
수확된 인삼은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녀석이었다. 산에서 캐 오는 것들은 손가락보다 큰 녀석도 많았는데. 여기서 기르는 인삼은 기껏해야 3년이 한계였고 4년이 되자 서서히 썩는 녀석들이 많아졌다.
“참으로 까다로운 녀석들입니다. 보통 작물이 자라지 않는 사질토(모래흙)에 가까운 땅에서만 자라고. 차일(遮日 - 차양)을 두어 빛을 가리지 않으면 잎이 썩어버린다니요.”
“그러니 값이 싸질 방법이 없다네. 이 인삼들을 기르는 곳이 여러 곳인데. 얼마나 소출이 나오겠나?”
호조 판서 윤형은 눈을 굴리더니만 밭이랑을 세면서 셈을 했다. 이것과 같은 곳은 전국에 4곳이나 있었다. 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자 비슷한 지형을 찾아내서 바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1천근이 조금 넘게 나올 것입니다.”
“1천근이면 17만 냥이 아닌가. 그럼 명국에 조금 값싸게 팔도록 하지. 한 30만냥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상세한 사항은 모르오나. 건주위의 여진족들이 쫒겨나면서 명국에서도 인삼을 구할 길이 줄어드니 더 비싸게 팔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조선의 재정 총 수입은 은자로 400만 냥이 될까 말까였다. 그나마도 지방 재정을 분산하면 순수한 중앙의 수입은 고작 200만 냥 혹은 그 이하였다.
여기에 30만냥의 추가 수입. 아니다 경쟁상대인 건주위의 인삼은 지금 혼란속에서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른다. 잘하면 40만냥 이상의 수익이 들어올 것이다.
“녹봉을 4할을 올린다 하여도 문제가 없을 것 같군.”
“그 외에도 나라의 일이 많지 않사옵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북방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진행되었다네.”
슬슬 북방에 있는 대총 한(타이순 칸)의 몸이 달아올를 시기가 되었다. 아직까지 조선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니 먼저 숙이고 들어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