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58화 - 외교 활동(3) >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닌 만들어 준 칸의 자리였지만. 나름 자신에 대해 어디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생각했다. 무예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평균 이상은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자리에서 완벽하게 박살났다.
“우웨에에엑!”
건초더미로 던져지지 않았으면 머리통이 깨졌을 것이 분명하다. 울렁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는데 사람의 손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발목을 잡았다. 질질 끌려 나와서 속을 게워내고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그 녀석. 아니 그 근육이 있었다.
“그래도 몸은 튼튼하군. 더 싸울 마음이 드는가?”
엎드린 채 올려보자 온 몸에 각이 잡혀있다. 저 팔뚝은 내 장딴지보다 두껍고. 곧게 뻗은 목은 목이 아니고 그루터기처럼 두툼하다. 돌산의 바위 같은 살, 아니 살조차 아니었다. 얇은 살가죽 아래로 근육이 위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저게 뭐야…….”
몸싸움으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만에 하나 정면으로 싸우지 않았다면 희망은 있을 거다. 녀석을 유인해서 활로 머리를 노렸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는 있었겠지. 그러나 그 기회는 자신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이제 패배를 인정하라.”
“내가졌다! 졌다고!”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을 하기가 무섭게 상대는 팔을 곧게 펴서 올리고 몸을 부풀렸다.
“보아라! 이 몸이 이겼도다! 아바마마께서 주신 이 몸을 지극정성으로 가꾼 덕분이다! 승리를 기리기 위한 흑룡의 자세를 취한다!”
“수양대군! 수양대군!”
“흑룡이라니! 정말 앞에서 보아도 뒤에서 보아도 흑룡 그 자체가 아닌가!”
양 팔을 하늘로 높게 세우고 뒤틀면서 힘을 준다. 부풀어 오른 놈의 거석 같은 가슴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인다. 정말 흑룡이 눈을 흘기고 있었다.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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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순과 몽고군 포로들을 진 안에 가둬둔지 이틀. 이 일은 명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이고. 여진족들에게는 어제 타이순이 탈출했다고 뻥을 친 다음 별동대를 파견해서 주변을 헤집고 있었다. 애초에 별동대를 풀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친 상대의 잔당을 찾아내야 했으니까 겸사겸사 진행한 일이다.
여진족들도 존재하지 않는 칸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있다. 몽고군이나 오이라트군을 생포하면 두당 말 3필, 죽이면 두당 말 2필을 약속했다. 타이순의 목을 베어오면 말 500필을 약속했는데. 이 정도면 퇴각할 때 본대와 떨어져 인근에 숨어있는 몽고와 오이라트의 병력들은 다 잡혀서 죽을거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명에서는 다소 불편해 하겠지만 적당히 넘어가 주겠지요.”
“그래서 명에는 어떻게 보고할 예정이오?”
“주상전하께서는 대승을 거뒀다면 아국이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적당한 승전이라 속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직도 명의 저력은 엄청나다. 대충 인구를 8천만으로 파악하고 있고 실제로는 한 1억 정도 하겠지. 인구수 12배 이상이면 이 시대에는 싸움이 안 된다. 먼 훗날 16세기 말쯤 되면 위소제가 완전 붕괴되서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50만이 채 안될 것이지만.
반면 조선의 군사는 다 합쳐서 20만보다 조금 아래고. 쥐어짜내야 40만이 나올거다. 이 시대의 명은 아직 완전히 병들지 않아서 끌어 모으려고 작정하면 원정군 50만, 수비전에서는 200만, 정말 극한으로 쥐어짜면 400만의 병력을 끌어 모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요동 일대에 명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가짜 패배를 만들기 위해 힘을 써야 했을 것이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약조를 맺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있소, 오히려 상황을 설명해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지..”
“상장군님! 적의 보급대를 동산(충샨)과 함께 무찔렀습니다!”
아주 잘 되었군. 좀 전에 충샨과 함께 한 조선군 별동대가 광순관 일대에 있는 몽고의 보급대를 박살내 버렸다.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던 충샨도 이제 우리와 같은 배를 탔다. 앞으로 몽고와 척을 지었으니 튈 곳은 조선과 명 둘 중 하나로 좁혀졌다.
“좋은 소식이군. 그럼 슬슬 대군어른도 조약을 맺을 준비를 해 주십시오.”
“알겠소.”
타이순 칸이 포로로 잡혀있는 군막에 김종서와 함께 들어가자. 녀석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겁에 질려있다. 당장 이틀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군.
“네 녀석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될 것 같더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사실 그걸 바라고 있잖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타이순은 내 눈치를 계속 봤다. 육체적인 외교가 너무 심했었나? 하긴 체중 120에 가까운 근육거한이 자신을 던지고 깔아뭉개고 날려버렸으니 트라우마가 남겠지.
“그래서 날 살려두긴 하되 조선으로 데려가서 신나게 조리돌림 한 다음 어디 남쪽 섬에다 박아 넣겠지!”
“아니 그냥 풀어준다고. 이 약조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정말 풀어줄거다.”
“난 글을 모른다. 읽어줘라.”
역관이 몽고문자로 된 약조문. 기사약조(己巳約條)를 또박또박 읽어줬다.
- 첫째. 조선의 승전을 인정하며 포로의 몸값을 지불한다. 포로 1인당 말 5필로 암말 3필당 수말 2필의 비율로 지불해야 한다.
- 둘째. 차후 조선과의 교역이 성사될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가급적 조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한다.
- 셋째. 조선을 침공하려는 세력이 생길 경우 그에 대한 서한을 즉각적으로 보낸다.
- 넷째. 다음 두 번의 칸을 정하는 예케 쿠릴타이에 조선 대표를 전조 고려의 심왕(瀋王)과 동급으로 대우하여 받아들인다. 단 대표는 왕족이 아니어도 좋으며 종1품 이상의 관료가 대행할 수 있다.
“니들 미쳤어?”
“첫째 조건은 마음에 들지 않나?”
“첫째는 그렇다 치자. 지금 우리애들이 삼천 잡혔나? 조금 무리하면 금방이니까. 둘째? 뭐? 교역? 마시는 요동에서 열리는데 네놈들이 있는 곳은 저 아래 토문강이잖아! 이것 까지는 그렇다 치자.”
지나치게 흥분했는지 몸이 부들부들 요동치다가 내 팔뚝을 보고 다시 조용해진다. 사실 다 중요하긴 한데 셋째 넷째가 치명타지? 왜 이딴 짓을 해야 하는가 하고 의문일거다. 하긴 이 녀석은 아직도 에센의 승전 소식만 전해들었겠지.
“그래서 그 다음은.”
“말이 안 나오는군. 셋째를 어떻게 할건데. 이걸 우리도 모른다 하고 넘어가면 니들이 어떻게 대응하지? 넷째? 예케 쿠릴타이에 심왕 대접? 이 미친놈들아 심왕은 고려인이었고 제대로 된 작위가 있는 자들이잖아!”
우리 타이순 열받았네. 자기도 예케 쿠릴타이로 칸이 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바지사장 신세에 에센의 아버지 토곤의 힘으로 칸이 된 것이지. 그래도 쿠릴타이는 국가수뇌부회의 정도의 위치다. 큰 원정이나 후계자 선택 정도만이 대상이니까.
“언제는 고려의 후신이니 같은 형제국이라고 서한을 보냈던가 그러지 않았나?”
“그래 그건 넘어가고 심왕과 동급대우! 카마그(칭기즈 칸의 상위 씨족. 몽골 연맹의 전신)의 족장 정도로 대우한다 치지. 그리고 다음 칸을 선출하는 예케 쿠릴타이?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뭘 어쩌라고?”
이놈도 시야가 좁네. 하긴 나만큼 넓은 시야도 내가 찬찬히 가르쳐준 김종서 외에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지금 북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나? 이것은 네 녀석을 위한 거다.”
“에센이 명의 황제라도 죽이고 도망쳤나? 그렇다면 녀석을 견제할 수단은 되겠지.”
“명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인질로 잡았으며. 관문을 하나하나 깨부수면서 북경에 공격을 퍼붓고 있어. 시기상으로 보면 오늘이나 내일 쯤 네가 그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다.”
“에센이? 이런 미친!”
아마 오늘쯤 소식이 전해져 왔겠지. 타이순은 탁자를 부술 듯이 내리치며 분노하다가 내가 탁자를 내리치니 조용해졌다. 역시 물리적 외교는 효과적이라니까.
만약 삼일만 느리게 전투를 시작하거나 전투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퇴각했으면 지금 여진족들이 모두 자기편이 되었을 것이니. 한이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여진족들도 지금 신나게 몽고와 오이라트의 잔당을 소탕중이다. 생존자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니 요동 일대의 여진족들은 모두 명이나 조선의 충실한 개가 되는 것 외에는 생존 방법이 없다. 한번 배신한 놈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것이 유목민족의 철칙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에센도 실패한다. 녀석은 바로 쳐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좀 더 주었어. 아마 지금쯤이면 남경일대에서 올라온 수십만의 병력에 삼켜져서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그런데 왜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거냐?”
“이 멍청아. 내가 하도 던져대고 내리찍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나 본데. 에센은 지금 네 녀석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다.”
아무리 바지사장이라고 해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황금씨족. 그 신분의 격차때문에 원 역사의 에센은 다 죽여버리는 황금씨족 숙청을 시작했지. 여기서는 신분의 격차 이전에 명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 회군하였다가 권력 분열이 일어나며 시작할거다.
“그냥 날 쫒아내고 새로운 칸을 옹립하는 것 아니야?”
“분명 부족들을 통합할 명분으로 네 녀석의 죽음을 이용하고. 또 다시 꼭두각시 칸을 옹립할 생각이니까. 그것이 널 살려두는 이유지. 그런데 네가 그냥 당해줄 이유도 없지? 분명 끝까지 저항할거잖아.”
타이순이 두뇌회전을 시작한다. 뇌세포가 어제의 충격으로 많이 죽었겠지만 힘내라! 그리고 안색이 확 변해버린다. 네 녀석도 뭔 일이 일어날지 아는구나?
“내용 한 가지만 더 추가해. 내가 살아있는 한. 오이라트를 상대할 때는 언제든 병력을 파병해서 도와줄 수 있다고.”
“알겠습니다. 참으로 흑우구나.”
“난 검지 않다!”
목숨은 중요하지. 그런데 지금 네 녀석은 차기 칸에 대한 권리의 일부를 팔아먹고. 끄나풀을 좀 심고 오이라트 핑계 삼아서 군대를 몰고 갈 수 있어. 네놈들 부족을 통합시키지 않고 계속 갉아먹을 수 있다고.
조선을 아직도 만만하게 보나? 네가 줄 종마와 전쟁에서 획득한 암말로 신나게 말을 찍어낼거고. 5년만 있으면 기병 전력이 조선 초 수준으로 회복되어 2만 정도의 원정군은 파병이 가능할거다. 20년쯤 진행되면 전면전을 벌여도 꿀리지 않겠지.
“내용 추가했습니다.”
“좋군. 조선의 문자로 정음을 만들었으니 이 조약을 정음과 한문으로 베껴 적어라. 옥새는 있나?”
“없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타이순은 찻잔을 깨서 사금파리를 꽉 쥐고 손에 피를 묻힌 다음. 왼쪽 구석에 피로 묻힌 손도장을 콱 찍어버리면서 나도 하라고 손짓한다. 역기 못 들면 근손실로 직결되지만 어쩔 수 없지. 단도로 손에 상처를 낸 다음. 오른쪽 구석에 피의 손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3개의 문서에 손도장이 쾅쾅쾅 찍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조약의 내용은 명과는 상관없는 조약이다. 명목상으로 서로 조공국끼리 조약을 맺어보았자 상국에 보고할 의무야 있지만 상세 내용을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다. 타이순을 놓치고 나중에 맺은 조약이라고 변명은 해야 하지만.
“그래서 난 언제 풀어주려고.”
“보름 뒤.”
“지금 당장이라도 에센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건 우리 마음이라고. 목숨을 살려주고 뒷배로 아국이 나섰는데? 뭐 이리 불만이 많아?”
타이순의 생포 혹은 사망이라는 소식이 에센에게 닿으려면 9월 14일은 되어야 한다. 그거는 괜찮은데 9월 30일 전해질 소식은 타이순이 살아있다는 거다. 이 쯤 되면 바보라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포위당해서 생포당한 타이순이 살아있으려면 조선과 협상을 했다는 것 외에는 해명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가 옹립한 꼭두각시라지만 황금씨족의 혈통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서 억지로 연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을 질러버리면? 한 해야 잠잠할지 몰라도 그 뒤에는 신나는 몽골 내전이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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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9월 17일. 북경은 여전히 함락되지 않았다. 한달이 넘게 북경을 두들기고 있었지만 북경의 수비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모든 권한을 이행받은 병부시랑 우겸은 병부상서가 되어 총력전에 나섰다. 듣자하니 북경 안에서만 처형당한 관료가 백 명이 넘는다던가.
“태사!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그렇다면 교대해라!”
거용관과 자형관을 뚫는 데 보름이 걸렸다. 이미 에센 자신의 명령을 받는 부족들만 10만이 넘었으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미 한달 넘게 북경 일대에서 전투를 벌여 죽인 명나라 군대가 도합 25만. 기타 전투나 기습으로 죽인 자가 5만. 수비병력도 최소 5만을 죽였다. 황제의 군대를 포함하면 도합 55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나 명에서는 사람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네놈들은 절대 자금성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거용관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장수의 목을 벨 때 들었던 말이다. 에센은 명의 황제가 주력으로 삼았던 20만을 격파했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북경에는 기껏해야 수비 병력이 20만 있다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었다.
“그 때 그냥 닥치고 들어갔어야 했어.”
“고작 보름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았습니까.”
북경 함락소식을 듣고 부족들은 일제히 병력들을 끌고 와 복속을 청하여 시간이 다소 소요되었다. 명의 황제는 본진 중앙에 두어 감시를 철저히 하였고. 북경의 공략은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렇게 상황을 추스리기 위한 보름의 시간이 지나자 10만의 병사가 증원으로 들어왔고. 끝없는 증원이 시작되었다. 북경에 있던 신료들은 선봉대의 패전소식을 듣자마자 추가 증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영국공 장보가 물꼬를 트자 다음 증원요청을 거리낌 없이 내리게 된 것이다.
“보고 드립니다! 남부에서 또 병력이 올라왔습니다! 대략 10만 규모입니다!”
“이 미친 새끼들! 사람을 화살촉보다 더 많이 가져오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냐!”
“아무래도 자형관에서 들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자형관에 있던 명의 장수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팔천만의 백성이 있는데 너희는 고작 십 만이다. 사내 다섯 중 하나는 병사이니 팔백만의 대군과 맞설 준비는 되어 있느냐.' 라고. 열흘 간격으로 10만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죽이는 속도보다 충원되는 속도가 빠른 것인가.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