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42화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
조선에서 급파된 사은사(謝恩使 -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들은 1447년 12월 초. 동지사보다 조금 일찍 파견되었다. 수많은 절차를 통해 가까스로 정통제에게 도달한 답신의 내용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치밀했다.
“이도는 영민한 군주임이 틀림이 없구나.”
“자신의 역량을 잘 아는 이라 생각합니다.”
[ …언제나 달자들에게 시달려 왔는데 상국이 달자들의 오만한 태도를 징벌할 것이라 하시니 단매에 때려눕힐 기회라 생각합니다. 하오나 남방의 왜구와 동북면의 달자들이 있사오니 6만 정도만 원정이 가능합니다.]
“병부상서는 조선에서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정병과 보인을 합쳐 6만이라 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
“적당한 숫자입니다. 만에 하나 남쪽의 왜적들이 일어서고 북쪽 달자들과 전면전을 벌이려면 그 이상의 병력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숫자에 대해서는 트집을 잡을 수 없겠군.”
[파저강의 악적 이만주를 비롯한 달자들의 준동으로 위태한 곳이 있사오니. 그 곳을 토벌하며 후방을 굳히지 않으면 변방의 위협이 가시지 않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달자들을 억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명년(明年 - 내년) 5월에 군을 일으키고…….]
결론은 이것이었다. 원정을 보낼 수는 있지만 6만이 한계다. 그마저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 파저강(婆猪江 - 압록강의 지류)의 악적으로 이만주(李滿住)가 명시 되었으니 그 놈을 해치우고 시작하겠다는 이야기겠지.
“이만주? 그가 누구인가?”
“그는 얼마 전 직위를 받은 달단의 추장입니다.”
이이제이를 위해서 직위 따위는 내려줄 수 있다. 명목상의 직위이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서로 물어뜯고 싸우면서 힘을 빼놓으니. 기억을 더듬던 정통제는 한 서류를 떠올렸다.
“이만주라 함은 일전에 도독동지(都督同知 - 명의 관직, 실질적인 직위는 아니지만 회유를 위한 관직이다.)로 임명된 그 달자 말인가? 올량합(兀良哈)의 추장?”
“그렇습니다. 근래에 들어 조선이 차지했던 곳을 재차 침범한 자라 합니다.”
고민은 잠시였다. 얼마 전에 관직을 주고 회유하려 했던 여진족이지만 조선이라는 더 큰 힘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내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명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부상서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관직을 내려 안심시킨 뒤 조선에게 넘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달자들이 우리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만주에게 관직을 준 것은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주변에서 오는 놈들을 상대하면 형식적으로는 보호해 줄 것이다. 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상식은 환관 왕진에 의해서 깨져버렸다.
“걱정 마십시오. 번국을 공격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 '지금' 조선에 해를 입힌 것을 안 것이다. 이만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통주(通州 - 현 중국 서평시)에 있습니다.”
정통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전에도 조선이 이만주를 토벌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었는데 이것을 핑계로 고의적으로 실패한 뒤 출정을 거부한다면?
“심려치 마시옵소서. 오히려 달자들이 조선에 앙심을 품게 만들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조선이 관직을 내리는 것을 알자 그것에 대하여 흠을 잡았다 하면 원망의 절반은 조선에 갈 겁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황군이 달자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 누가 이 대명을 넘보려 하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황제의 웃음소리를 듣는 광야는 오금이 저려왔다. 동쪽의 여진족들과 조선을 이간질 하고 책임을 떠넘겨 버리는 전략 자체도 미쳤는데, 만에 하나라도 명이 패배한다면?
'아마도 파저강 동쪽의 달자들은 모두 조선이 야금야금 먹어치울 기회로 삼을 수 있겠지. 책임을 떠넘겼다는 것은 우리가 방임한다는 것과 같으니까.'
조서는 아주 빠르게 작성되었다. 정병 1만에 보조 1만까지 총 2만을 동원하여 파저강까지 토벌을 나설 기회를 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군량을 지급할 것이라고. 이만주의 토벌이 성공하던 실패하던 내후년 5월까지는 반드시 의주 일대에 6만의 병력을 배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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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팔짝 뛰겠네. 2차 파저강 전투에 바로 토목보의 변? 아니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이만주는 세종시기 조선의 주적이었다. 나중에 가서 이놈의 수양대군이 보낸 병력에게 죽기는 하지만. 사실 이시애의 난 때 '지금은 안 오겠지?' 하고 방심하다가 도망도 못가고 어처구니없게 잡힌 거니까.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형님이 들어온다.
“잡념이 아주 넘쳐나는 것 같구나.”
“별 생각이 없습니다.”
“네 몸 위로 잡념이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것 같으니 딱하기 그지없구나.”
분명 형님도 엄청난 고민을 하고 계시겠지. 이번 기회에 이만주를 잡지 못하면 아마 형님의 재위기간 내내 개고생을 하게 만들 놈으로 성장할거다. 조선군에게 공격당하고 살아남으면. 명에게서 받은 작위도 사라지고. 오히려 여진족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제 하체운동의 무게는 조금 더 높여도 될 듯하구나.”
“다음은 승의압입니다.”
결국 이번에 해치우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최소한 10년 뒤에야 온다. 재위기간 내내 걸림돌이 될 지도 모르는 녀석. 형님도 잡념이 넘쳐났는지 승의압(인클라인 벤치프레스) 자세를 거꾸로 잡아버렸다.
“형님 그것은 강의압(디클라인 벤치프레스)입니다.”
“아 이런. 이거 도저히 못하겠구나.”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형님을 보면서 역기를 하나둘씩 정리했다. 여자에게 차인 사람에게 역기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일인데 운동으로 잡념을 몰아낸다도 안 통하는 말이지.
“오늘은 그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근손실 이전에 이렇게 서로 넋을 놓고 하다가는 어디 부러질 것 입니다.”
“술을 마셔도 취할 것 같지가 않구나. 한잔 하고 들어가자.”
주안상을 내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비교적 흉년임에도 그럭저럭 조선이 돌아가는 것은 명에서 가져온 종자들이 기본적으로 수확량이 좋아서 그렇다. 쌀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1할. 밀은 4할의 수확 증가를 보였으니.
“파저강 일대로 다시금 출정을 시작하는데. 당시에 군을 지휘한 자가 아직 군문에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다른 이는 몰라도 절제사 이징석(李澄石)은 남아 있으니.”
“현 도체찰사 이징옥의 형인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징석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징석 하니까 동생과 너무 비교되는 쓰레기 같은 형이지. 청렴결백은 복이 없는 자의 별호라면서 대놓고 수탈한 탐관오리로 이름이 남고. 기본적 인성도 형편없어서 상중에 있으면서 동생을 두들겨 패버리고.
“성정이 난폭하다고 들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징옥은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보병을. 이징석은 기병을 지휘하게 만들려 한다.”
술이 또 한 순배 돌아가고 형님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나는 아무 느낌도 없는데 애초에 술고래고 근육량도 늘어서 술이 무한정 들어가는 괴물딱지니까.
“그렇다면 주장은 누구입니까?”
“도진무(都鎭撫 - 장수 휘하에서 군령을 전달하고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보조자)로 있었던 김효성(金孝誠)이다. 두 형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도 충분히 통솔이 가능할거다.”
휘하의 일군을 담당한 장수보다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한 사람이 직급이 더 높다는 건가.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그 개똥같은 이징석이 협조적일까? 형님이 술이 좀 올라왔는지 벌떡 일어난다.
“네가 한번 훈련도감에 가 보거라. 그 일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오듯 하였지만 이제 인원이 꽉 차서 혼선이 빚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가서 제가 가르친 자들을 보고 오기만 할 것입니다.”
“그 정도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한번 서산군과 같이 양녕대군을 찾아가 보거라.”
양녕대군을 또 왜? 일단 마일용과 우현규 둘 다 천명이나 되는 인원이 들어와 벅찰 시기니까 내가 나서서 한번 정리를 하는 게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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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3월. 드디어 출진 명령이 각 도서에 떨어졌다. 훈련도감군의 1차 부임지로 배정된 함흥은 다시금 북적거렸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병참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어명이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편성하실 계획이십니까?”
지난 1년 반 동안 처음의 훈련도감 1기 170명은 그야말로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고참병들에게 지형과 환경에 대한 경험을 쌓고. 갑사들에게는 전투에 대한 경험을 흡수하였다. 두 번째로 온 590명 또한 첫 기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어디까지나 조금이었다.
“병조판서께서 친히 중군을 지휘하신다고?”
“그렇습니다.”
서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징옥도 흠 잡을 곳 없는 무관들로 채워진 지휘관들이 있었는데 한명은 절대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만나는 혈육.
중군 상장군 - 병조판서 김효성
우군장 - 중추원사 이징석
좌군장 - 평안도 도절제사 이징옥
도진무 - 병마절도사 양치
.....
“하필이면 우군장이 형님이라니.”
“십삼 년 전의 전투에서 군을 직접 지휘한 이는 중추원사님 외에는 없습니다.”
“도감군 출신들과 형님의 성정이 어울리지 않을 것인데.”
절대적으로 명령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함부로 어기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그 외에는 건성건성 하거나 하지 않고.
예를 들어서 도적놈들을 죽여라 라는 명령을 내리면 당장 적의 머리통이 날아간다. 그러나 도적놈들의 집을 약탈해라. 하면 말은 몰라도 가죽 몇 개만 대충 들고 온다. 그러다가 도적들의 거점이 없어져야 한다! 라고 명령하면 집을 무너트리고 바로 불을 당겨버린다.
“차라리 내가 오로지 보병만 통솔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저기 기병이 없으면 작전이 됩니까?”
“방법이 없지. 함경도 일대에서 도합 일만을 모아야 하니 다들 준비하게 하도록.”
다음날부터 며칠간. 함흥에서는 익군들을 초모하고 토관으로 부임중인 여진족을 모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번 전투는 군을 움직이는 최악의 시기인 6월에 토벌작전을 계획하였다.
“나리 저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뎁쇼.”
“이것들아! 지금 출병하여 성공을 거두면 두당 5섬은 준단 말이다!”
“아니 5섬이라뇨? 저 혼자만 먹고사는 양 아닙니까.”
라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자도 있었으나.
“뭐요? 진짜? 어차피 작년 밀농사 대풍이니까 먹고 살만 하고. 진짜 5섬을 주는 것 맞소?”
“소곡으로 5섬이다.”
“아들놈도 같이 가겠소. 작년부터 도감군 참교에게 훈련받아서 보총을 잘 쏘거든.”
기병을 제외하고 6000명을 모집해야 한다. 그 말은 남은 익군의 훈련과 기본적인 경계사주를 제외하면 도감군이 600명 참가할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이동은 10인씩 하되 조별로 갑사 1인. 도감군 1인. 익군 4인 그리고 4인은 잡부이다. 잡부들은 이미 군량과 보급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알아서 합류하여 수를 채울 것이다!”
초모된 익군들은 평시에 훈련받던 대로 건성건성 줄을 서서 4명의 조를 이루었다. 거기에 한 명씩 도감군 출신들과 갑사들이 자리 잡았다.
“이거 고 갑사님 아니십니까?”
“어이쿠 이거야말로 반갑소. 이제 반쪽짜리 9품 되신 홍윤성 부교(副校) 나리 아니신가?”
홍윤성의 군화를 지그시 밟는 갑사가 가소롭다는 듯 홍윤성은 관군패(管軍牌 - 관군을 나타내는 표시)를 튕겼다. 이건 숫자고 정음인데 당연히 고 갑사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6을 뒤집으면 9가 되는데. 참으로 숫자라는 것이 재미있더군요. 품계차이가 딱 그만큼 아닙니까.”
“개놈자식.”
도감군 중에서 정음에 한정하여 문맹은 없었고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가능했다. 애초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데 보급품 지급을 비롯해서 간단한 계산을 못하면 자격이 없으니. 반면 갑사들은 다들 집이 부유한데도 문맹자가 가끔 있었다. 그렇게 조마다 서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머리통에 든 것이 많아서 좀 갈라서 빼고 싶냐?”
“갑사님 머리는 돌이 들어있어서 빼낼 수도 없어 보입니다?”
“말도 못타는 산도적들 주제에. 말 타고 밟아주리?”
“말이랑 같이 반으로 갈라버릴 수는 있습니까?”
당연히 직급은 갑사가 위이지만 실력은 명백히 도감군이 위였다. 그렇게 언쟁이 점점 거세지자 이징옥이 지휘봉을 마루 위에 내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도감군과 갑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게 출병부터 무슨 소란인가!”
“죄송합니다!”
“지금 언쟁을 벌인 자. 함께 싸워야할 이들과 언쟁을 하였으므로 기존 법도라면 장을 쳐야 하지만. 부와(팔굽혀펴기) 20회를 시행한다!”
부와 앞에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자 이징옥은 가슴을 펴고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강계로 갈 것이다. 그 곳에서 달자들에게 유린당한 지역을 통과하여, 아국을 어지럽히는 달자들의 수괴인 이만주의 목을 벨 것이다. 그가 저 멀리 북쪽까지 도망간다 하여도 반드시! 반드시 그의 목을 벨 것이다!”
““““네!””””
확실히 다들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제식법이 겉보기만 그럴싸하다는 편견도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발 맞춰 걷기 같은 것은 힘들어도 목소리를 높이고 명령에 반응하는 것은 따라할 수 있으니. 이징옥은 아래로 내려와 준비한 군마에 타면서 외쳤다.
“전원 출발한다. 그리고 군가를 제창한다! 군가는 십삼도 사나이!”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훈련도감이 싫은 갑사들이었어도. 그리고 수양대군이 만든 것은 싫은 훈련도감 1기 출신도. 군가만큼은 좋았다. 모두 동의할 수 없는 구절이 있긴 했지만.
“얼싸좋다 김갑사!”
“얼싸좋다 김참교!”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군인들은 천천히 강계로 향하였다. 6월은 장마철이며 군사를 움직이기에 최악의 시기였지만 허를 찌르는 계략으로는 쓸만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토벌을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이징옥은 그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