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37화 - 1 대 15(1) >
기묘한 모습이었다. 한 겨울은 아닐지라도 대낮에도 물이 얼어버리고. 칼바람이 치는 설산을 서른 네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갑시다. 이러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소.”
“알겠소. 전원 휴식.”
병사들은 큰 장비가 아닌 작은 장비들을 들고 있었다. 장창 대신 단창을, 장패 대신 원패를, 미첨도 대신 장검을 들었다.
산악 행군에서는 소형 장비를 쓰라는 ‘새 군법’이 어제 부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군법과는 많은 곳이 다르기에 함흥에 머무는 이들은 한창 그 군법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지금 짊어지신 것이 장구까지 합치면 육십 근이 아니오?”
“어릴 적부터 무거운 것은 많이 짊어져 봐서 익숙하니 염려 마시구려.”
너털웃음을 짓는 정범수는 길잡이의 얼굴을 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원인은 따로 있었다.
“댁들도 갈아 신으시오. 아 그리고 귀돌이 너무 꽉 조이셨소. 조금 푸시구려.”
“아. 어쩐지 머리가 아프더니만 고맙소.”
머리에 묶은 귀돌이를 조금 풀자 두통이 가신다. 소리가 좀 안 들려서 문제지 귀가 얼어버리진 않을 것 같은 물건이었다.
“이걸 누가 창안해 낸 것이오?”
“수양대군이오. 열이 치밀어 오르니 묻지 말아주겠소?”
귀를 상하게 하지 않게 하는 귀돌이, 눈길을 걷기 쉽게 하는 설피, 얼음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사갈(아이젠) 조차도 그놈의 수양대군이 교육시간에 설명 해 주고 나중에 지급 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열흘도 아니고 닷새 이내에 돌아올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길은 제법 험준합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일백 리를 여섯 시진 간 걸어본 적 있소. 험준한 것은 아주 질리게 경험해 보았고.”
“다들 출발한다.”
묵묵한 산행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중턱에 오르자 애매하게 시간이 비었다. 조금 더 올라가서 높은 곳까지 가려니 해가 질 것이라 행군을 중단해야 했다.
“바닥의 거적은 가져가지는 못하겠구려.”
“어차피 한번만 쓰려고 낡은 놈으로 가져온 것이오. 여름이면 걷는 동안 마르겠지만 겨울에는 마르질 않으니. 거기 돌은 잘 달궈두라고. 천으로 싸매서 껴안고 잘 것이니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철모를 벗어 추위를 막기 위한 외피를 벗긴 다음 눈과 모래 한줌을 넣고 박박 닦는다. 그걸 찬 물로 씻은 다음 불 위에 올려 그대로 냄비로 쓰다니.
“댁들 것은 따로 만들었으니 드시오.”
“고맙습니다.”
한겨울에 인근에 집도 없는데 다들 따뜻한 것을 먹을 수 있던가? 찐쌀과 다진 육포를 적당히 넣어 끓인 잡탕은 고기 비린내가 올라왔지만 속을 따듯하게 덥혀주었다. 그런데 이 신맛은 뭐지?
“그 다진 육포 말이오. 맛이 독특하고 과일 냄새도 나는 것이 어떻게 만든 거요?”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서 구운 다음 잘 말려 빻은 것이오. 버찌와 시래기 그리고 능금을 말려서 다져 넣었지.”
“참으로 특이한 맛이구려, 쉬이 질리지는 않겠는데 이걸 만든 분도. 아 아니오.”
그놈의 수양대군이 대체 무슨 일을 해서 이 꼴이란 말인가. 아마 평생 함흥을 비롯한 북방은 올라오지 못할 사람 같았다.
“홍 참교님! 천막을 다 쳤습니다!”
“고생 많이 했네. 나도 장구 보관용 천막은 다 쳤어.”
거적이 깔리고 어지간한 장수의 군막(軍幕)만한 크기의 천막이 세워지자. 훈련도감 병사들은 각자 천을 펴고 꺾어온 나뭇가지를 엮어 개인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제법 넓은 천막이어서 부대끼면 스무 명도 잘 수 있어 보였다.
“스물도 어떻게든 잘 수 있을 것 같소만 어찌하여 12인용이라 한 것이오?”
“처음 만들어 질 땐 16명이 잘 수 있게 만들었는데. 겨울에는 천막이 있어서 12명만 잘 수 있어서 그렇소이다.”
“불침번은 몇 명을 둘 것입니까?”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조금 넓은 공터가 있긴 하지만 우거진 숲이 근처에 있으니 산군이나 곰이 덮칠지도 몰랐다.
“불침번은 여섯 정도면 적당하겠지. 삼 면에서 둘씩 서고 호각은 반드시 휴대하게.”
“알겠습니다.”
추위가 몸을 에이는 동안에도. 칼바람이 코 끝을 스치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전부 모닥불 하나에 의지하면서 밤을 샜다. 목화솜이 들어간 누비침낭은 생각보다 따듯했다.
"아으으으 생각보다 잘 잤소."
“천막은 그대로 내버려 둡시다. 정상까지 올라간 다음 바로 내려오면 저녁이 될 겁니다.”
“그렇소? 그러고 보니 부신(符信 - 증거로 삼기 위한 나뭇조각)은 다들 챙겨왔는가?”
“네. 다들 안주머니에 잘 챙겼습니다. 그리고 깃발도 있고요.”
정상까지는 별 일이 없었다. 땅이 얼어 있으면 사갈을 꺼내 군화 아래에 덧대면 되었고. 가끔 쌓인 눈은 생각보다 깊지도 않았다.
“드디어 정상이군, 그런데 저 멀리 뭐가 보이는데?”
“북쪽 산이 심상치 않은데요?”
한 눈에 보아도 저 멀리 있는 산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쯤 되면 이 산까지 눈 폭풍이 덮칠 기세이다.
"신속히 하산한다. 천막을 찢어서라도 횃불을 만들도록. 야간행군은 다들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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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출신 병사들이 떠난 지 4일이 되는 날. 얄궂은 하늘은 점차 검어지더니 눈을 흩뿌리기 시작하였다. 함흥은 건조한 곳이라 눈이 거의 오지 않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당장 짐을 꾸려라. 내가 보건데 한창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박달봉 정도의 높이라면 벌써 눈이 허리까지 쌓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명령을 내렸으니 그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야!”
이징옥의 목에 핏대가 올라왔다. 이런 사고가 가끔은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도저히 주상전하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질서정연한 모습과 큰 체격을 보건데 아직은 살아있을 것 같았다.
“말을 탈 수 있는 자 중 몸이 날래고 산에서 생활했던 자 열다섯을 빨리 모이게 하라. 직급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알겠습니다!”
이징옥은 속에 입을 누비옷과 얼마 전 주상전하가 하사한 모피 옷을 챙겼다. 집합한 이들을 보니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런 눈이라면 살기 힘들 것입니다.”
몇 년만의 대설이었다. 특히 산 쪽에서 심각하게 내리는 것이 옳은 말이기도 했지만 이징옥은 훈련도감군의 몸을 믿어보기로 했다.
“산길을 걷던 중에 눈을 만난다면 허리까지 쌓여서 얼어 죽을 것이고. 날씨를 보고 시간을 미루려 했다가는 천막이 무너져 버리겠지. 그래도 나름 정병이니 버틸 수 있을거야.”
반 시진을 넘게 걸은 말의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어떻게든 산행을 포기하고 초소에 내려오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으로 이징옥은 말을 바삐 놀렸다. 저 멀리 초소에 사람이 나와있는걸 보니 이 사태를 알리려고 한 건가?
“도체찰사님?”
“자네들 올라가지 않았나?”
“이미 부신과 깃발을 두고 내려왔습니다. 생각보다 길이 편안하더군요.”
이징옥의 손이 뒤에 들것에 묶여 있는 커다란 산군을 향했다. 사방이 찢기고 꿰뚫린 산군은 제법 큰 녀석이었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데 숙영지에서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리더군요. 그래서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천막이 찢어지고 뒤집혀져서 못 쓰게 되었습니다..”
“저기 산군을 말일세. 아무리 서른 명이라 한들 쏘아 잡은 것이 아니고.”
“쏘아서 잡았습니다. 여럿이서 창과 방패로 몰고 다섯이 동시에 쏘았습니다.”
그 무신경한 모습에 이징옥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들은 뭘 하고 지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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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이 돼? 눈이 조금만 쌓였다지만 박달봉을 사흘 만에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고?”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자빠져있네.”
다들 불만이 넘쳤다. 날이 좋은 시기에도 박달봉을 오르고 내리는데 사흘이라면 산군을 제외한다면 가능은 하다. 물만 몇 통 챙기고 미수(미숫가루)라도 챙기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한 겨울에 군장을 짊어지고 산군까지 잡아왔다고?
“그래도 산군은 잡았지 않는가.”
“그 보총이라는 거 갑옷도 뚫는데 그걸로 멀리서 노루 뜯어먹는 놈을 노려 쐈을지.”
“아침부터 활기가 넘치는군. 훈련도감에서 팽배수로 훈련받은 정범수라 한다.”
정범수는 속보를 하고 와서 이마에 땀이 맺힌 채 대방패와 큰 환도를 구석에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하겠다. 아직 쉬운 훈련을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것이 무엇입니까?”
“체조를 하자. 훈영체조라는 것을 알려 줄 것이니 따라서 하도록.”
몸을 푸는 것은 모든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다. 배울 때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러나 체조 동작 다섯 번째가 자니가기도 전인데 다들 동작을 멈추었다.
“몸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들 집중하도록.”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소.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박달봉을 사흘 만에 제 집 드나들 듯 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한 명이 물고를 트자 다른 이들 모두의 시선이 차갑게 내리깔렸다. 농땡이를 피우면서 늦게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정범수는 치료법을 떠올렸다. 이럴 경우의 치료법은 단 하나 외에는 없다.
“새 군법이 하달되어 그대들에 대한 구타를 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뭐? 부악? 부와(팔굽혀펴기)라도 해보라고?”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가져와라.”
“어이구 그래도 패시겠다고? 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볼기를 맞아 보겠소.”
잠시 뒤. 정범수의 앞에는 적당히 낡은 나무 몽둥이들이 쌓였다. 아예 몇 명은 볼기를 미리 두드리는 시늉을 하는 둥 가관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얼마나 나약한 지 직접 알려주도록 하겠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몽둥이를 잡고 내 원패를 치도록.”
“뭐요?”
정범수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몸통을 가리고도 남는 등패가 아닌. 원패(지름 90cm의 원방패)였다. 지원을 잘 받는 병사들이라 그런지 참나무로 짜 만든 목판 위에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테두리엔 튼튼한 철띠가 둘러졌다.
“너희 같은 놈들 열다섯 정도는 원패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만약 내가 방패를 놓치거나 뒤로 넘어진다면 너희들에게 쌀 다섯 말씩 주도록 하지.”
“그럴 돈은 있소?”
“내 급료라면 먹는 것이 허술해지더라도 그 정도는 가능하다.”
잠시 눈을 마주치던 병사들은 미소를 지었다. 장수들은 ‘방패수 하나가 창병 다섯을 상대할 수 있다.’ 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다섯까지 막아낸다는 의미였다. 15명이 돌아가면서 두들긴다면 나자빠지고 말리라.
“그럼 쌀은 잘 받아가겠습니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휘둘러진 몽둥이가 원패에를 때렸다. 그러나 정범수의 몸 전체가 살짝 뒤로 밀리면서 충격을 흡수하였다. 오히려 그 것 때문에 휘두른 쪽의 균형이 깨졌다.
“그래서 애는 만들 힘이 있는가? 문지방은 어떻게 넘어 다니는 것인가?”
“그래 뭐 쉽지는 않겠지요. 내 뒤에 열 넷이 남아있는데 그거나 신경 쓰십쇼!”
몇 번이고 내리 찍히던 몽둥이는 결국 부러졌다. 손바닥이 까진 채 땀을 뻘뻘 흘리는 병사는 다음 사람과 교대했다. 그렇게 14명의 사람들이 죄다 몽둥이를 부러트렸지만 정범수는 약간의 신음성만 흘릴 뿐 멀쩡했다.
“다들 용두질(자위)만 하다가 나온 힘인데 자네는 조금 근골이 잡혀 보이는군. 혹시 토관 출신인가?”
“그렇소.”
여진족 출신이어서 나름 무기를 휘둘러 봤는지 자세도 좋았다. 그래 봤자 몽둥이는 튕겨졌지만. 다음 순간, 거칠게 밀어 찬 옆차기를 방패로 막은 정범수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아악 내 발!”
“이거 좀 단단하다네. 훈련도감에서 훈련받을 때 생각나는걸!”
“인삼이라도 들이켰소! 괴물딱지 같으니!”
“그럴 돈이 있으면 내 인생이 이 신세는 아니었겠지.”
전력으로 달려들어 어깨로 밀치는 순간. 정범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훈련도감에서 배웠던 동작을 했다. 방패로 어깨를 받아내고 뒤로 물러선 뒤 나서는 탄력으로 훤히 드러난 목을 올려친 것이다.
“꺼억!”
“아이고 이거 배우던 것을 그대로 해버렸군. 자네 괜찮나?”
한참동안 마른기침을 해대던 병사는 아예 겁을 집어먹었다. 다들 땀에 절어버려서 움직이기도 싫어했는데 정범수는 호흡만 거칠어졌지 안색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정 참교님이 이토록 강하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되었네. 다들 모르고 살 수도 있는 법이지. 다들 몸을 추스르고 있게. 잠시 위엣 분들에게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까.”
사라졌던 정범수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아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서 저리 기분이 좋은 것일까?
“보고를 마치고 왔다네.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거나 피투체조를 시키고 싶지만 법이 바뀐 것을 어쩌겠나. 그러니까 다들 부와 20회를 3번 반복하게나.”
“네?”
“군법에 허용된 얼차려이며 난 이미 보고를 마쳤기에 여기서 끝낼 수 있다네.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최대치인 부와 20회를 5번 반복하게 할 것이네.”
처음 겪어본 부와의 맛은 아주 각별했다. 처음 스무 번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며. 그 다음 스무 번 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고. 마지막 스무 번을 마치니 다들 땅 위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가르치는 것이 아주 즐거울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굴려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한계까지 쥐어짜여진 적이 있으니 사람을 얼마나 굴릴 수 있는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들도 생업이 있는 자인데 어찌 마구 굴리겠는가. 정범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농번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농한기 만큼은 철저히 가르쳐서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을 수준으로 만들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