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36화 (36/573)

< 1장 35화 - 씨앗 심기 >

훈련도감의 첫 사열식은 대 성공이었다. 203명중 천민 출신인 7인은 즉시 세종대왕님의 명에 의해 면천 되었으며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다.

사노비 출신이니 주인들에게 잔뜩 보상이 돌아간 것은 당연하고 가족도 면천의 대상이 되었다.

"깔창도 코르크 가공품으로 새로 만들어 넣어야겠고. 우비는 도롱이 대신에 뭐 쓸만한 게 있을까?"

집에서 이번 훈련에 대한 평가와 보완점을 서책으로 엮고 있는데 사람이 왔다. 지난 7월부로 나에게서 훈련도감을 인계받은 홍달손(洪達孫)이다.

훈영절제사(訓營節制使 - 훈련도감을 최종 통솔하는 종3품 관직, 신설된 관직이다)로 임명되고 내년 2기부터 담당할 사람이었는데. 내가 사고를 쳐서 갑자기 일을 떠맡은 덕분에 정말 바빴을거다.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예까지 오신 것이오?”

“잠시 시간이 비어서 여쭤 볼 것이 있기에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자. 한참이 지나자 마침내 입이 열렸다.

“꼭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까. 훈련병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다루시고 저에게 모든 걸 떠넘기시다니요.”

“그대도 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잖소.”

“그들은 대군어른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다루시니 제가 어떻게 다시 거둬들이고 가르쳤을지 그 힘든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나도 좀 찔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유격 이후로는 내가 손 댈 훈련은 없었고 반복 숙련교육이라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다 아예 화끈하게 유격에서 준 가혹행위 수준으로터트려버린 거니까.

간관들은 ‘수양대군이 남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며 이야기를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세종대왕님과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었으니까.

“나도 그들을 믿었소. 적어도 유격훈련에서 심각한 부상자는 없지 않소이까.”

“조용히 말을 해도 되었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그렇게 다루어 아직도 원성이 나옵니다.”

“그렇게 거칠게 하지 않았다면 간관들이 입이 닳도록 주상전하의 귀를 어지럽혔겠지.”

홍달손은 유격훈련에서 혹독하게 사람을 다룬 나를 대신해 훈련도감의 총 책임자를 물려받았다. 축 처진 그의 등을 보면서 나 또한 한숨이 나왔다. 형님이 빨리 왕위에 올라야지 내가 어디 참의라도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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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10월. 훈련도감의 다음 기수들을 위해 잡다한 것을 만들면서 몸을 다듬고 있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 무슨 일인가?”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궁에서 누가 왔다고? 하고 나가보니 마당에는 이미 가마가 들어서 있고 거기서 얼마 전 원손에서 왕세손으로 책봉된 미래의 단종, 홍위가 내려온다. 관속(官屬 - 배정된 하인)에 집현전에서 근무하는 학사도 두 명 인사를 한다.

“주상전하께서 세자저하와 함께 온천에 가신다 하셨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저에 세손을 보낸 것인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런 건 금성대군이 담당하는 것 아니었나? 얼떨떨한 나를 보면서 홍위가 허리를 구부리고 인사한다. 올해 9세니까 11세인 현동이와 두 살 차이가 난다.

“큰 숙부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어이쿠 세손님!”

가져온 짐들을 옮기고 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홍위는 명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아직 안평대군이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해야겠지. 조카가 이렇게나 원하는데 숙부 된 몸으로 해 줘야 하지 않겠어?

“명에서는 산으로 배가 넘어 간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산을 넘지는 않지만 산 사이에 있는 강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럴 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이렇게 한단다. 나도 처음 보니 정말로 신기하더구나.”

현동이를 가르칠 때 쓰는 칠판으로 그림을 그렸다. 배가 갑문 앞에 서면 뒤의 갑문이 닫혀서 수위가 올라가 높이를 맞추고. 반대로 배가 내려갈 때도 서로 높이를 맞추는 개념. 단번에 이해하기는 힘들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든 것입니까?”

“본디 처음의 대운하는 팔백년 전 수나라의 양제가 만든 것이다. 그 양제가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황하와 장강을 이었고…”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자 어느 새 낮이 지나고 식사까지 마쳤다. 집현전 학사가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세손 각하(閣下 - 세손의 호칭)의 석강 시간이옵니다.”

“알겠소. 숙부님 이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해 주십시오.”

“지금 석강이라 하였소? 내가 조금 가르치면 어떨까 싶소만.”

홍위의 표정이 활짝 피어오른다. 입신체비는 아직 필요 없지. 그렇지만 애들도 할 수 있는 운동을 최근에 하나 만들어 놨으니까 그걸 시험해 봐야지.

“이것이 우모구(羽毛球 - 배드민턴)라는 것이다. 세자저하께서 입신체비를 하시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입신체비는 관례를 치룬 뒤. 뼈가 굳을 때 하여야 한다. 어린 아이에는 많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 옳지 못하니 이런 운동을 하면 어떻겠느냐.”

채로 가볍게 모구(毛救 - 셔틀콕)를 치니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다. 채는 등나무 줄기로 만들고 안에 아교풀로 먹인 두꺼운 무명실로 그물을 만들었다.

셔틀콕 머리의 코르크는? 굴참나무 껍질로 만들었지. 탄성도 가벼움도 부족한 야매 코르크지만 못 쓸건 아니더라고.

“신기합니다. 깃털이 달려있어서 날아가지 않을 것 같은데 아주 빠릅니다.”

“바로 그렇지. 공도 가볍고 채도 가벼우니 쉽고 좋은 운동이다.”

배드민턴을 처음 배운 사람들은 라켓을 잡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하지. ‘와 이 운동 쉽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파김치가 되어 버리고. 몇 개월만 지나면 살이 순식간에 빠진다니까.

“어떤 가르침이 있기에 석강 대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도 배움일세. 입신체비 관례 다음에 뼈가 굳고 나서야 행할 수 있으니 이것을 먼저 한다면 도움이 될 걸세. 이것이 예습이 아니면 무엇인가?”

홍위는 처음 잡아본 라켓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간단한 기본기부터 알려주자. 운동의 기본은 몸 풀기다. 지금 입신체비장 에서 배우는 유생들도 운동 빼먹다가 다치는 경우가 있지.

“홍위야 먼저 내가 하는 동작들을 따라해 보거라. 우모구는 몸을 날래게 움직여야 하니 다리를 다치기 쉽단다.”

“네! 숙부님!”

“입신체비나 다른 운동을 할 때도 이렇게 온 몸을 풀어주는 것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소학도 떼지 않고 십삼경을 모두 알려는 것과 다를 게 없단다.”

체조 동작을 잘 따라오는걸 보면 운동신경은 확실히 있네. 그 다음은 가볍게 몇 번씩 치면서 주고받기를 하였다.

“숙부님 보기보다 재미있습니다.”

“그렇지? 떨어지는 순간 받아쳐야 한단다. 그 순발력이 중요하다.”

슬슬 따라오는 걸 보니 현동이와 한번 겨루게 하면 어떨까? 현동이는 삼일 전부터 아내와 함께 우모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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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좀 가져오게.”

“여기 있습니다.”

홍위는 비지땀을 흘리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미 등이 흠뻑 젖었고 상투를 틀어둔 머리에서는 땀이 계속 흘러내린다. 그런데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손께서 구 점 도원군(桃源君 - 현동이의 군호)께서는 십일 점 입니다.”

“꼭 이기고 말 것이네.”

“제가 삼일이라도 더 배웠으니 쉽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리하지 말거라.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더 이상 가다가는 탈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끊어야겠지. 현동이도 눈치는 있어서 실수인 척 한번. 정말 실력으로 한번. 그렇게 동점에서 적당히 그만뒀다.

“그만. 더 이상 하시다가는 다칠 수 있으니 다음 날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재미있는 운동입니다.”

“그렇더냐? 그 채와 우모구는 가져가서 궁궐에서도 해 보거라.”

다음날 근육통은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다음 날 아침 쌩쌩한 홍위는 이미 요륜(腰輪 - 훌라후프)를 잡고 현동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어린아이의 회복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니까.

“아침부터 열심히구나. 홍위에게 요륜을 가르쳐 준 것이냐?”

“아버지 기침하셨습니까?”

옳지 잘한다. 우리 현동이는 운동도 남에게 알려주고 착실하네. 내 후계자가 되면 좋겠어. 주현이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얼마 전 태어난 막내 명환이는 아직 갓난아기고.

“숙부님! 어제 생각을 해 보았는데 석강을 빠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에 행하는 것이 낫겠지. 그리고 몇 가지의 운동을 더 알려 주겠다.”

한 달간 홍위는 현동이와 같이 우모구(배드민턴)부터 시작해서 도삭희(줄넘기) 등의 간단하고 가벼운 기구운동과 체조 등의 운동을 했다. 형님은 홍위의 몸이 얼마나 튼튼해 졌는지 단번에 알겠지.

“숙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오냐. 부디 세자저하께도 알려드려 우모구를 꼭 같이 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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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혹여나 숙부가 역기를 들라 하지 않았느냐?”

“관례를 치른 후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신 재미있는 것들 알려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들이라? 무엇이 가장 재미있더냐?”

홍위는 구석에 둔 채와 모구를 내밀었다. 몇 번 만져본 문종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털이 달렸으니 천천히 떨어지겠구나. 이것을 제기처럼 서로 주고 받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네 자 높이의 그물 위로 넘겨 상대가 치지 못하고 땅에 떨어트리게 만들면 일 점을 얻습니다.”

문종과 홍위 사이에서모구가 여러 번 오갔다. 문종도 어느 정도 입신체비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보기보다 힘든 운동이었다. 어느새 문종의 등에는 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하여 보니 몸에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이 것을 자습시간에 마음껏 하여도 좋다.”

“그런데 같이 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원군과 같이 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만 동궁에는 제 또래가 없지 않습니까.”

가벼운 우모구이니 힘 보다는 속도가 중요할 것이다. 성인 남자면 몰라도 궁녀라면 홍위와 좋은 상대가 되겠지. 일이라 생각하면 한없이 힘든 것이 운동이지만 약이라 하면 누구보다 좋아 하는 것이 운동이다. 문종은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

“우모구는 다리와 허리를 쉴 새 없이 놀리니 일을 하여도 허리가 아프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휘둘러도 새털같이 가벼운 것을 치니 팔에 힘이 들어가며 가늘어질 것이고. 두 눈으로 항상 공을 쫒아야 하니 눈이 또렷해질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동궁(세자의 거처)부터 왕비의 처소. 심지어 유행이 번지고 번져 사대부의 규방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굴피집을 만들던 굴참나무의 껍질이 도성에서 품귀현상을 보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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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避鬪 - 싸우고 피하다)체조 팔번세 천답지부세(天踏地負勢 - 하늘을 밟고 땅을 짊어지는 자세) 삼십 일회 준비!”

“준비이이잇!!”

“횟수는 삼십 일회!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않는다! 실시!”

“실시!”

죽을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산길 사십 리를 걸어 지옥 같은 이 곳에 왜 그런지는 몰라도 또 왔다. 어째서? 나는 분명 유격을 하지 않았나?

- 삑 삐익 삐익!

“하나 두울 셋!”

“다들 자세 똑바로 유지합니다. 모든 것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잠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가증스러운 호각이 또 멈췄다. 남에게 모범을 보이고 챙겨주었던 수양대군은 어느새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다리를 움직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데 멈추니 배에 불이 올라왔다.

“다 다리가!”

“백 삼십 사번 휴류(休留 - 부엉이, 올빼미의 옛 말) 자세 똑바로 유지합니다! 오십육 번도 똑바로 유지합니다!”

빌어먹을 전투화는 이미 물을 잔뜩 먹어서 흙탕물을 종아리로 보내고 있었다. 엉겨 붙은 진흙덩어리가 천근과도 같았고. 평소에도 무겁던 투구는 목을 꺾어버리는 고문도구와도 같았다.

- 삐익 삐익 삑!

“열여섯!”

“이백 십 이번 후류 다리 내려갑니다!”

몇 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서른 한번이었나? 한번이 맞나? 서른 번이 아닌가? 고통과 혼미한 정신 속에 홍산은 아주 크고 또렷하게 소리쳤다.

“서른하나!”

낮은 탄식이 깔리면서 뱃속에서는 묵직한 납덩어리가 내려가고 등골이 오싹해 진다. 끔찍한 피투체조에서 가장 끔찍한 천답지부세 중이었다. 수양대군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면 안 될 말이 나왔다.

“반복구호 나왔습니다. 반복구호 나오면 몇 회?”

“육십 이회!”

“피투체조 팔번세! 천답지부세! 육십 이회 시작!”

“으아아아아악 아니야아아아아!”

눈을 떠본 홍산. 아니 주상전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신 정범수는 식은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지옥 같은 남한산이 아니었다. 퀴퀴한 메주냄새가 진동하는 주막이었다.

“…시육번 줄타 올기 할 자신 네 잇습다.”

“이보시오 최 형 일어나 보시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같은 훈련소 동료. 그도 마찬가지로 그 끔찍한 유격훈련의 악몽을 꾸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니 그도 마찬가지로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오늘은 또 뭐야?”

“피투 팔번세였소.”

“난 줄 타고 오르기였는데.”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끼로 준비된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달포 사이에 세 번이나 꿈을 꾸었다.

“휴류가 뭐야 휴류가.”

“참으시오. 그래도 버텨낼 수 있었지 않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이니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지 못하면 불효와 같고. 그렇다면 아비 가슴을 파먹는 휴류와 같다고? 좋게 봤는데 정말 내가 참을 수 있어야지!”

새벽이 밝아오니 동료들도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9월 9일 중양절에 해산한 훈련도감 졸업생들은 북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집에서 신변정리를 마치고 11월 1일까지 함길도 함흥으로 가라 명을 받았다.

“이러다가 광인으로 오해받아 이징옥 대감이 내치지 않으시려나?”

“주상전하께서 직접 명하신 것 아니오.”

아마도 이 끔찍한 꿈은 적어도 오년간은 잊혀질법할 순간마다 다시 꾸게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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