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27화 - 발전을 위한 아픔(1) (0718 수정) >
“이것이 돼지가 맞더냐? 명국의 돼지는 다 자라면 정말 크고 우람하구나.”
“전하 이 돼지는 태어난 지 기껏해야 삼 개월이 지났을 뿐입니다.”
“뭐라고? 당장 잡으려 하였거늘.”
세종대왕님 침 좀 삼키세요. 안으로 들어가신 세종대왕님은 내가 가져온 서책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하셨다. 농서 공업서 위주로 모아온 책자여서 일부러 정분에겐 안 알려줬지. 알려주면 북원으로 도망갈지도 모르거든.
“전조시절에 잃어버린 지식도 있을 것이고. 아국에서 꼭 필요로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공조와 호조가 정말 바쁘겠구나. 그리고 이 고서들은 무엇이냐.”
“수와 당 시대에 있었던 서책들을 모아왔습니다. 장안과 낙양에서는 관리하기 힘든 것이기에 떠넘기려 하여서 다행이었습니다.”
세종대왕님은 쌓여있는 고서들을 보시더니만 제목들을 천천히 훑었다. 고서들 대부분이 오백 년 이상의 기간이 지나 표지가 삭아있는 정도면 양반이니까.
“정말 잘하였다. 역사서를 편찬하여야 하는데 기록이 없어서 문제였으니. 이 집(集)이라는 책은 필적을 보아하니 신라 이전의 것이다. 집현전에 넘기면 될 것이고.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소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생각한 것인데…….”
----------
사신행을 돌아와서도 일 일 일의 연속이다. 딸 주현이의 돌잔치는 그렇다 쳐도 그 이후에는 보고서를 쓰고, 서책을 분류하고, 선물들도 드리고, 결정적으로 새로운 제자들이 열일곱이나 더 생겨버린 것이 가장 컸다. 아무리 내년 과거시험을 보고 사라질 제자들이라지만 내 2대 제자이니 열심히 가르쳐야지 아주 열심히.
“자네 정말로 훌륭해졌네. 내가 명에 있을 적에 얼마나 열심히 한 것인가?”
“누구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 한눈 팔 새도 없더군요.”
“그간에 저 치들이 자네를 무시했다 하였나?”
마일용은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하위지의 말을 들으니 마일용이 서자라고 무시한 놈들이 꽤 되었다 한다. 다들 지방에서 한가락 하는 집안 후손들이니 콧대가 드높았겠지.
“아 그것은 그저 제가 부족하여.”
“부족한 것이 아니고 저들이 부족하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지! 참된 자는 배움을 위해 농부에게도 숙일 수 있거늘! 오늘 들어가서 쉬고 내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오게나. 교행훈련을 처음으로 할 것이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내가 가르치는 놈들이 마일용보다 잘났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럴 때는 격차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교행훈련(크로스 핏)으로 굴리면 적당하지.
“오늘부터 며칠간은 일반적인 입신체비가 아닌. 몸을 전반적으로 활용하는 교행훈련(交行訓練)을 실시하도록 하겠다.
“교행훈련이 어떤 것입니까?”
“별 것은 아니네. 자네들이 열심히 서책을 읽고 입신체비를 하였으나 아쉬웠겠지. 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내 몸은 하나고 그대들은 여럿이니 운동을 교차하여 빠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네. 이것이 교행훈련일세.”
“대군어른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줄서서 역기 들고 기구운동하고 맨손운동 하니까 크로스 핏이 뭔지도 모르지? 그럼 내가 한번 해보고 짜증이 솟구쳤던 버피가 섞인 크로스 핏으로 가보자.
“둘은 좋은 숫자이지. 서로 짝이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둘이 여럿 있는 스물 둘은 더욱 더 좋은 것일세. 폭풍이 불 것 같은 기세로 임하게.”
“포! 포풍!”
“명에 있을 때 창안한 부와도약(俯卧跳躍 - 버피)을 알려주겠네. 몸을 공좌(스쿼트) 준비자세로 만든 뒤 엎드려서 부와(팔굽혀펴기)를 한번 한 뒤. 개구리가 뛰듯 번쩍 뛰어올라 제 자세로 돌아오네. 마일용이 하는 법을 보게나.”
“하나 두울 셋 넷!”
“이 속도가 가장 적당하다네. 이 부와도약을 22회 반복한 뒤. 바로 일렬로 서 앞에 놓인 통나무를 22개를 뛰어올라 넘고. 석쇄(케틀벨) 22근 무게를 22회 휘두른 다음. 공의압(무게 없는 스쿼트) 22회. 마지막으로 상체기(윗몸일으키기)를 22회. 이렇게 하여 4회 반복일세.”
내 첫 제자들이면 적당히 힘들게 할 수준인데 너희들은 이해가 안 가지? 버피 22회. 박스점프 22회 케틀벨 스윙 18kg 22회. 스쿼트 22회. 윗몸일으키기 22회를 논스톱으로 4번 돈다고. 처음의 버피는 아주 쉬우니 좋다고 하겠지. 그렇게 두 세트를 반복하자 다들 체력이 고갈된다.
“우웁! 저 토할 것 같습니다!”
“토하고 계속하게. 나도 그렇게 했다네.”
“저기 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입을 여는 것을 보면 한번은 더 할 만한데.”
“으갸아아악!”
“통나무를 뛰어오를 땐 조심하라 하지 않았나!”
마일용. 하위지. 서산군은 전부 신속하게 4회를 마치고 땀을 식히고 있었다. 교행훈련의 난이도가 높은 건 휴식의 조절이 불가능한 것이 첫째고. 버피 때문에 몸의 체력이 급속도로 고갈 되어 연속적인 동작이 다 엉망이 되는 것에 있다.
“올해 초부터 임하였으면 일 년이 조금 안된 것인데 그 수준에 맞추려 하였거늘. 혹여나 소변의 색이 갈색이 되거나 구토와 오한이 치밀어 오르면 즉시 말하게나.”
“사지가 사시나무 떨리듯 후들거립니다.”
적당히 체력이 고갈될 시점에서 끊었다. 무리하면 횡문근융해증의 염려가 있어서 중단한 건데 다들 기가 팍 죽어버렸다. 육체적 격차를 확실히 체험할 수 있었겠지.
“그러니 조금 더 열심히 임하였어야지. 아무래도 교행훈련을 계속 하기에는 배움이 부족하군. 종제가 경험하니 어떤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몰아서 하니 조금 힘들 뿐입니다.”
“시간은 금과 같으니 이렇게 시간을 아끼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마일용 자네는 이 정도의 강도로 교행훈련 몇 개를 짜오게. 앞으로도 성과가 좋지 않으면 교행훈련을 시키겠네.”
“알겠습니다.”
지방에서 향반노릇하고 한양까지 자식들 올려 보낼 정도면 공부하기엔 충분한 환경이다. 노오력 드립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대충 살아온 거라서 이런 환경에 적응도 못하고 툴툴대는 거지. 이렇게 몇 번 교행훈련으로 굴리면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겠지.
----------
공조와 호조 두 곳과 휘하기관들 전체가 해가 떨어질 때 까지 퇴청하지 않았으며. 안에서는 관료들의 아우성이 끊이지 않았다. 제발 퇴청하게 해줘. 제발 이 끔찍한 서책의 산더미를 벗어나게 해줘 라고. 그 산더미의 중앙에는 공조판서 정분이 있었다.
“서책 분류는 끝났나?”
“네. 판서께서 지시하신 대로 분류하여 필사중입니다. 여러 곳에서 보아야 하니 아예 정음으로 바꾸어 필사하고 있습니다.”
“이건 농서고. 이건 가축이고. 이건 농업기구고? 요즘 내가 밤낮이 바뀌는 것을 모른다네.”
아예 몇몇 책자는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인쇄를 위해 옮겨졌다. 다들 피로가 극심히 쌓여 있었고 하품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하라면 해야지요. 별 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수양대군께서 나에게 서책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네. 아마 중간에 말을 했으면 저 멀리 달단(북원)으로 달아났을지도 모르네.”
10월이니 농한기이다. 그래도 가져온 종자들은 호조의 휘하인 침장고(沈藏庫 - 왕실의 채소와 밭을 관리하는 기관. 훗날의 사포서)에 보관했다. 10년이 지나면 종자들이 다 죽어버리니 가급적 빠르게 심어서 수확을 봐야한다.
“그리고 그놈의 돼지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종자들인가?”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예빈시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명의 돼지가 아국돼지를 잡아먹었다 합니다.”
“뭐? 돼지가 돼지를 잡아먹어?”
돼지가 난폭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영리한 짐승이기도 하지만 먹이를 주지 않거나 하면 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덩치가 커지니 투정의 수준이 아니게 된 건가?
“그것이 성장속도가 너무 빠른데다 먹이를 한 끼니 걸렀더니만 순식간에…….”
“돼지를 기르는 수를 줄이고. 한 농장에 이전의 삼분지 일만 기르라 명하게. 덩치가 3배 이상이니 그 정도로도 조금 벅찰 걸세.”
“수양대군 어른께서 공조판서 어르신과 함께 새 작물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하십니다.”
----------
다들 죽어라 바쁜가보다. 하긴 내가 가져온 양이 많아 공조와 호조에서 몇 년간 업무가 꽉 차버렸단다. 가져올 때는 몰랐지만 실무진 입장에서는 아니지.
“공조판서와 호조판서께서 오시니 나라의 일을 위해 어찌나 고생하는지 한 눈에 알겠습니다.”
“대군어른께서 하신 고생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공조가 제법 바쁘긴 합니다만 어디 대군어른께서 하신 고생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을 하지만 정분은 이미 눈이 풀려있었다. 얼마나 피곤한지 졸면서 걸어온 것 같다.
“고생이라뇨. 사행길이 그렇게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겸손하시니 저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는 그 몸이 비대하였는데 사행을 다녀오고 그렇게나 몸이 마르게 되었으니 어찌 고생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신숙주의 다이어트를 비롯하여 사행 일원들은 사행 중에 했던 건강관리로 인해 전체적으로 근육이 붙지는 않았지만 살은 확실히 빠졌다. 그래서 내 평판이 좋아졌구나. 살이 쪽 빠질 정도로 고생한 사행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본론부터 말하겠소. 명국에서 가져온 종자들을 따로 관리할 필요가 있소. 정확히는 격리하여 기르고 씨앗만 전국에 보내야 하오.”
“이 종자들을 그대로 조선 팔도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가져온 것이 맞소. 허나 이 종자들은 수량이 적지 않소. 조만간 섞여서 점차 아국의 종자로 변할 것이오.”
유전법칙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그래도 역사적 지식으로 ‘청에서 배추씨를 가져왔는데 십년도 안 가서 조선배추가 되는 바람에 다시 종자를 가져와야 했다.’ 라는 것은 기억나니까.
“그것이야 계속 명국에서 가져온다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국과의 관계가 나빠진다면? 달단이 일어나 명과의 길을 막는다면? 그러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국에서 따로 기를 공간이 필요하니 그렇소.”
다들 피로에 절어있어서 일거리를 더 늘리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을 막으려면 종자의 순수성을 보존하거나 잡종을 확실하게 뽑아낼 지역이 필요하다. 사행이 끝난 날 세종대왕님과의 이야기 끝에 답이 나왔다.
“근래에 들어 주상전하께서 양수척과 화척(백정)을 교화시키려 하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발도 심각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고. 정착하려 하지도 않으며. 수렵과 목축을 좋아하지. 그러한 자들을 한 군데 모아서 농사만 짓게 하니 반발이 일어나는 거요.”
사실은 지금 백정들은 독한 애들 몇몇 빼고는 다들 짜증내면서 적응하는 단계다. 수십 년에 걸친 동화 노력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니까.
“주상전하께서도 아는 말씀이십니까?”
“이미 논의를 끝내고 온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하시구려. 처음의 설득은 직접 나서겠소.”
“그럼 그들에게 농사를 일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오. 그것이야 농서를 보고 호조와 공조에서 해야 할 일이지.”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네.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
“야 이 새끼야 어서 눈을 부라려!”
“내 마을 사는 놈인 오을미(吾乙未)가 사람을 죽인 것인데 왜 나를 붙들어놓고 그러쇼?”
“네놈이 촌장인데 똑바로 관리를 안 하니까 그렇지!”
충주의 한 산골에서 촌장 노릇을 하던 우전상(禹田上)은 의금부에 갇혀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말을 기르고 소를 치며 마음껏 행동했다. 당연히 노략질도 했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수나 있나? 배워서 지으라고? 그래서 굶어 죽지 않으면 얼마나 다행인데. 충청도 그 산 깊숙한 곳에서 어휴.”
“입 다물고 나와라. 네놈을 만나보려는 분이 오셨다. 말실수 안하게 조심하고.”
“입을 잘못 놀리면 그 분이 반으로 접기라도 한답니까?”
“접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놈을 던져서 대들보에 박아버리는 것은 가능하시다.”
우전상의 앞에는 관복을 입은 거한이 있었다.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으며 팔뚝은 자신의 곱절은 될 만큼 거대했다. 자신은 반으로 접고도 남을 괴력이 보였지만 복식을 보아하니 정말 높은 사람 같았다.
“그대가 촌장인 우전상인가? 마을에 중죄를 지은 자가 있다던데.”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방법이 있나. 반역향에 지정되지 않더라도 한동안 손가락질을 받을 것일세. 차라리 내년 봄에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런다 한들 농사를 짓는다면 따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구백정. 양수척이기도 하고 팔도를 주유하며 소와 말을 기르고 사냥을 하여 고기를 즐겨 먹었지. 그대들이기에 가능한 일이 있다네.”
----------
“이건 샘물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땅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입니까? 위쪽에 평평한 곳이 있긴 합니다만.”
“밭을 만든다면 천수답(天水畓 - 관개시설이 없고 물이 흐르지 않아 빗물에 의지하거나 물을 수차로 퍼 올려야 하는 농지)이 되어야 하는 땅이네.”
“그렇다면 지금 있는 고을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것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부업일세. 씨앗을 많이 받아내는 것이니 소출은 그리 관계가 없지. 이곳에서 구백정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면 된다네.”
백정들이 범죄만 저지른 수준도 아니다. 한 곳에 정착하라는 명령조차 듣지 않고 멋대로 날뛰니 최소한 한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백정들을 주로 포섭하기로 하였다. 백정들은 나름 유목민의 생활습관을 가져서 다용도로 쓸 수 있었다.
일반적인 농민들은 감당하기 힘든 명나라 출신 돼지를 기르게 하고 백성들에게 대여할 소를 기르게 한다. 일전에 세종대왕님과 이야기를 했던 타락색(駝酪色 - 우유소의 후신 관청. 소를 관리하고 우유를 생산한다)의 지방 분할 설립과도 연계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내려주는 종자를 기르게. 관리를 파견하여 수차도 설치하고 농사를 도와주겠네. 명국에서 가져온 돼지들이 있는데 그것들도 길러야지.”
“돼지가 커봤자 얼마나 크다고요.”
“다 자라면 이백 근이 넘는 거대한 돼지라네. 그 돼지들을 노리고 산군부터 표범 그리고 도적들이 득시글거릴 것이니 지켜서 잘 키우게나.”
명분은 돼지를 지키기 위해 주변의 맹수들을 잡는 거다. 백정들은 관아에서 허가도 안 받고 산속을 다니며 마음대로 사냥했는데 이제 사냥 할 명분이 생겼다.
“말도 탈 수 있고. 그리고 농사를 크게 짓지 않는데 소는 왜 기르는 것입니까?”
“소는 산천의 목초를 베어 먹이다 농번기 때 인근 농부들에게 빌려주게. 가급적이면 유락(乳酪)과 수유(酥油)를 만들어야 하는데 혹시 만들 줄 아는 자가 있나?”
“당연히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중 몇 분은 아직도 만들고 계십니다.”
“훌륭하군. 그것과 돼지들, 그리고 천수답에서 나는 종자들이 마을의 세금일세.”
혹시나 문제 일으키면 하나하나 지원을 끊어서 진짜 고사시켜 버리고 말거다. 그래도 욕구 중에 유랑에 대한 욕구만 제외하고 전부 들어줬으니까 얘들도 알아서 참겠지? 정말 일을 잘하면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한 녹봉이 아닌 진짜 녹봉도 내려 줄 계획이다.
“그리고 처음 몇 년간은 일에 익숙지 않으니 곡식을 내려 줄 것이네.”
“알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말을 듣지 않는 놈은 두들겨 패서라도 뜯어 말릴 것입니다.”
----------
탁본을 뜬 명필들의 글씨는 안평대군에게 보여줬다. 원래 이 목적으로 탁본한 것도 맞고 안평대군이 필사한 다음 왕실에서 글쓰기 교본으로 쓰이게 될 것들이다.
이것이 그 명필 저수량의 탁본입니까?”
“저수량의 탁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의 탁본이며. 안진경의 안근례비 탁본도 있다.”
“이 세밀하면서도 담대한 필적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인원에 제한이 없었다면 안평대군도 꼭 데려가고 싶었다. 내 서예와 그림솜씨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지만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니까. 나처럼 인삼 풀어서 다니는 것도 아니고 비단에 글 좀 써주면 다들 껌뻑 죽을 거다.
“한번 장안과 낙양으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더냐?”
“다음 사행에 제가 참가하게 된다면 남경은 들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너와 함께 장안과 낙양을 거쳐 중니(공자)의 후손이 있는 곡부로 가서 돌아오고. 다른 한패는 바로 남경으로 움직이면 될 것이고.”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마음이 동하는군요.”
“그렇다면 내일 주강 시간에 동궁으로 오너라. 세자저하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거기가 적당할 것이다.”
다음날. 동궁에 있는 입신체비장에는 장영실이 만든 제비기구(擠臂器具 - 체스트 프레스 머신)가 움직인다. 형님 드디어 육백이십 근을 달성하셨군요. 이 동생 몸과 마음을 다해 형님을 갈아서 칠백 근으로 빨리 올려드리겠습니다.
“형님 오늘은 종전과는 다른 교행훈련을 한번 해보려 합니다.”
“이미 서산군을 통해 교행훈련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 들켰네. 하긴 형님도 목적이 없긴 하지. 경쟁자가 없으면 저렇게 정체되기 마련이니까. 과연 안평대군은 형님의 경쟁자가 될 수 있을까?
“이곳인가? 고맙네. 세 세자저하?”
“용(瑢 - 안평대군)이 왔느냐.”
“형님? 여기는 대체 무슨 곳입니까!”
“용아,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의 체구를 보았느냐. 그만큼 고생하는 것이 사행인데 이 형은 너의 몸을 보고 언제나 불만이 많았다.”
안평대군은 입신체비장 안에 있는 기구들을 보더니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히 알겠지. 그리고 형님은 안평대군을 경쟁자로 보지는 않고 헬린이로 보는구나. 그 말은 안평대군은 이제 죽도록 고생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나도 적극적으로 도와야지.
“빼어난 재주를 가진 용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몸은 빈약하여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동궁에서 가르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저기 제 손길은 세밀하여 그런 거대한 것은 도저히 들 수가 없습니다.”
“용이는 이 좋은 것을 모르는구나. 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가 근력이 종전의 두 배 이상이 되었지만. 서예실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평대군의 입신체비는 결정되었다. 사행까지의 시간은 꽤 남았지만 기본이 없는 몸이니 아마 죽을 맛이겠지. 그렇게 입신체비가 끝나고 안평대군이 바닥에 뻗어있는데. 형님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는 내일 군기시로 나오너라. 너에게 보여줄 것이 어제 완성되었다.”
“어떠한 겁니까?”
“새로운 화포를 완성하였다. 아직 손을 댈 부분이 있으니 네 의견을 묻고 싶구나.”
“저기 저도 화포를 보고 싶습니다!”
“화포에 그림이라도 그릴 생각이더냐? 그러기 전에 삼대 운동 사백 근을 달성하여라.”
안평대군에게 탈출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포가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