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24화 - 근자명국행(3) (0719 수정) >
장안 태수는 우리에게 환영회를 열어주려 하였지만 내가 점잖게 거절하였다. 풍경을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서책을 보러 온 것이며. 마음만 기쁘게 받겠다고 이야기를 하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왕진 아래에서 고생이 많아 보이니 사치는 피하련다.
길거리에 있는 찬정(餐廳 - 식당) 에 들어가서 큰 상에 앉으니 쭈뼛거리면서 뭐라 말하는데 번화(사투리)가 심해서 잘 모르겠다. 메뉴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자 한 냥을 주고 아홉이 먹을 만한 것을 달라고 말했다.
물갈이나 수인성 질병은 조심해야 하니 펄펄 끓인 물을 달라고 했고. 여기에 잘 덖은 우엉을 넣어 조금 우리면 좋은 차가 된다.
“아홉이 먹기에는 은자 한 냥이면 조금 싼 것 아닙니까?”
“우리는 배우러 온 것인데 진수성찬을 먹으면 배움이 되겠나. 한 냥 정도면 쌀로 한 섬이 조금 넘으니 아마 백성들이 잔칫날에 먹는 정도의 것이 나오겠지.”
라고 말했는데 제법 많이 나온다. 다진 돼지고기를 넣어 만든 국수에. 양고기를 넣어 만든 탕. 후추냄새가 조금 풍기는 돼지고기 볶음. 죽순과 가지를 볶은 것. 은조각을 주고 내가 먹을 도삭면과 쇠고기 요리를 추가로 시켰다. 역시 고추가 없으니까 심심해. 고추 찾자고 아메리카로 원정 가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마늘과 산초로 참자.
“면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죠?”
“도삭면(刀削麵 - 칼 대신 철편으로 썰어서 만드는 면 요리) 이라는 것인데. 아마 원 시절의 폭압 때문에 생겨난 것 같네. 그 당시에는 열 가구에 식칼을 하나만 쓰게 했으니.”
“가운데는 쫀득쫀득하며 가장자리는 흐늘흐늘하니 국물의 맛이 배어 아주 좋습니다.”
다들 요리를 잘 먹는데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표정이 팍 죽는다. 현대 기준으로는 질기고 냄새나는 조선의 소지만 중국의 소와 비교하니 맛이 정말 좋네.
“소고기를 시키지 말 걸 그랬습니다. 맛이 좀 떨어지는군요.”
“풀 냄새가 올라오고 질기군. 소는 역시 조선의 소가 제일인 것 같네.”
이제 본격적으로 패거리를 나눠서 최대한 시간을 쪼개야지.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획을 짜는 게 중요하잖아? 간단히 반주 한잔만 하고 인원 분배를 시작했다.
“장안에 있는 기한은 육일이오. 일정이 촉박하니 일행을 넷으로 나누어 행동해야겠소. 원호와 이개 그리고 강곤 셋은 서책을 아국에 없는 고서 위주로 찾아 필사하고 여분의 서책은 구매하시오. 사람들과 자금은 충분히 붙여주겠소.”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순의와 조서경 두 분은 이 지방의 약재와 의학 서적을 찾으시고 필요하다면 사거나 필사로 남겨오시오. 박강과 남빈 둘은 이 근방에서 사용하는 농기구와 각종 도구들에 대해 기록하며 비석과 같은 것은 탁본을 떠놓도록 하고.”
이제 나와 신숙주만 남았다. 눈이 마주치자 움찔 하는데 왜 이렇게 불편해 하지?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나는 신숙주와 함께 인근을 돌며 채소와 곡식의 종자를 모으고. 작법에 대해 알아오겠소.”
“네?”
편안하게 빠지고 싶었지? 응 안 돼. 병에 걸리면 모를까 어딜 빠지려고 그러시나. 난 이거 끝나고도 팔굽혀펴기부터 맨손운동 한 바퀴 돌아야 근육이 덜 빠지는데. 근손실은 감안해도 손실량을 최소화 해야지.
“저기 하다못해 무관은 없습니까?”
“위병 몇이 호위하는데 문제가 있겠나? 여의치 않으면 그냥 내가 잡아 던지면 끝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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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이라는 도시는 거대한 평원을 끼고 있지만 토지의 염화로 인해 농사를 짓는 곳이 별로 없다. 서안(서쪽 수도) 라는 뜻과 걸맞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현대라면 절대 볼 수 없을 맑은 공기와 드넓은 자연을 보면서 잠시 감상에 젖어있었다.
“대군어른께서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것이 말인가?”
“장안은 너른 평야를 가지고 물도 충분합니다. 비가 적게 내린다 하여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생각보다 논밭이 적습니다.”
“이 땅은 상고시대의 도읍지여서 계속 농사를 지어 온 탓에 지력이 쇠하였다네. 하지만 민초들은 꾸준히 농사를 짓고 있으니 그 지식을 찾으려 하는 걸세.”
당연히 농민들은 ‘어이구 조선에는 제대로 된 채소나 곡식도 없어요?’ 라는 눈치였지만 뭔가 불만을 내놓기엔 너무 많은 은자를 쥐어줬다. 쌀 종자를 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방법이 있나. 토양 염화가 심해서 거의 기르지도 않는데.
“이것들이 과연 아국에서 잘 자랄 수 있을까요?”
“북방에서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네. 지력이 떨어지는 곳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니 북방의 거친 환경에서도 잘 버티지 않을까 싶네.”
밀은 반드시 챙기자. 예전에 들은 것으로는 한반도 밀은 낱알이 작아서 생산량이 적다는 말이 있었어. 이 지역 밀과 합쳐지면 수확량이 좀 늘어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숙주의 기초체력을 키우게 조금 빠르게 말을 몰았다
“저수량(篩遂良 - 당나라 초기 문신. 명필로 손꼽히는 자)의 글귀는 다 탁본을 떴나?”
“물론입니다.”
“종자는 많이 건졌는데 다른 것은 별 볼일이 없더군. 원호 그대는 어떠한 서책을 건졌는가?”
“당대의 서책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낡은 고서가 있어서 제가 관원을 시켜 필사하려 했는데 너무 많이 망가져서 그냥 가져가라 하더군요.”
그러면서 보자기에 싸놓은 책을 꺼내려다가 집어넣는다. 책이 부서질까 염려되는 것이겠지.
“그 책의 이름이 무엇이기에 그러나?”
“집(集)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필사한 내용은 거의 같았습니다. 이문(李文) 이라는 글귀도 보였습니다만 다섯 권이 전부에 너무 훼손이 심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손으로 손대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고서이니 함부로 펴보면 손상이 올 수도 있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천천히 보도록 하게나.”
수, 당시대의 도읍이어서 사서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황소의 난과 오호 십육국 시대의 타격이 너무나 컸던 것 같다. 일본 애들 입 못 놀리게 백제본기가 나와 버리면 아주 대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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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죽겠다.”
“기운 내시게. 그래도 다들 열정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저도 지난 한달 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네 배로 넓어진 입신체비장에 스무 명의 사람들이 왔으니 정말로 바빴다. 오전에는 마일용과 서산군이 입신체비를 알려주고, 오후에는 하위지 와 비번인 관료 둘이 와서 수업을 진행한다. 지방 부호와 향반의 자제들인데 이들이 여기까지 온 사유는 이러하였다.
‘지방에 있는 이들이 한양에서 서로 모여 배울 터전을 만들었는데. 몸을 다스리고 학문을 갈고 닦을 방책을 수양대군과 함께 마련했으니 아직 소과에 이르지 못하며 연령이 16세가 넘고 25세 아래인 이 스물을 뽑아 이년간 가르치겠다.’
라는 어명이 내려지고 삼남지방에서 고르고 고른 스무 명이 올라오니 바쁘고 또 바빴다. 궁에서 온 자들이 삼시세끼 끼니를 만들고 빨래와 청소를 해주는 것 정도는 도와주니 육체적으로 버틸 만은 했다.
“서자한테 그리고 관직도 없는 자에게 배우기 싫다고? 지금 소과 보면 생원은 따놨는데!”
“참게나. 그 뒤로 내가 나서니 다들 입을 다물지 않았나?”
“대군 어른께 말씀드려서 소과라도 한번 봐야겠습니다. 어차피 합격하여도 서자이니 낙방과 같게 볼 것이 분명하지만요.”
하위지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못했다. 식년시 장원급제면 삼년간 학문을 갈고닦은 조선 팔도에서 당대의 정점이며. 성균관에 들어간다면 대선배이자 스승이었다. 서산군은 행실을 고쳐서 오히려 주상전하를 가르친다 하니 아예 우러러 보기까지 하고.
반면 서자인 마일용에게는 소과도 떼지 못한 이들 주제에 버럭버럭 대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일용은 입신체비를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교부(敎簿)의 역할을 하니 그 강도가 너무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놈 아니 저 양반 자제들이 내년 식년시에 합격하면 어떻게 된답니까?”
“소과에 합격하면 당연히 벼슬을 받는 것이지. 허나 합격하지 못하면 배움이 부족하였다 하여 함길도로 올라가 야인 자제들을 이년간 가르치고 온다더군.”
“함길도라고요?”
함길도는 북방의 명장들이 머물고 있기에 그나마 잠잠한 곳이다. 그래도 툭하면 일탈을 일삼는 야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오라니?
“그러니까 내가 더 답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일부터 몇몇 불성실한 자들을 알려주겠네. 그들을 조금 더 엄히 다뤄주게.”
“불성실한 자라고 하면 엄히 다루기보다 답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을 알려준다고?”
“역기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많이 경험해봤죠.”
그렇게 다음날부터 입신체비장에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말로 신묘한 것이 이 역기이며. 횟수가 많아지거나 공령 한 장이 늘어나면 답이 절로 나오니 정말로 효과적인 학습법이었다. 그리고 역기가 답을 알려준 자들이 가진 생각은 하나였다.
‘나만 당할 순 없지’
그렇게 역기가 알려주는 답이 조선 팔도로 퍼질 씨앗이 뿌려졌다. 아직은 미미한 씨앗이었지만 그 씨앗은 아주 독하고, 번식력이 뛰어난 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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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 있는 시간은 10일인데 이 기간은 내 개인적인 욕구도 조금은 섞여있었다. 문화 대혁명으로 [문혁] 당한 것들을 보러 가는 것이지. 운하가 다 풀리지 않아 운하를 타려고 개봉까지 바로 가봤자 시간이 남았으니까. 은근슬쩍 경로에 백마사와 용문석굴을 껴 넣고 돼지를 먼저 보러갔다.
“이게 돼지입니까?”
“돼지 맞네. 그 숙수가 맞는 말을 하였군. 낙양일대의 돼지는 피부가 검고 주름지며 거친 먹이도 잘 먹는다고. 거기 이보시오! 이 돼지는 얼마나 지나야 다 자라오? 무게는 얼마고?”
“삼 아니 이년만 지나도 이백 근(120kg)이 됩니다.”
“이게 돼지라고요? 멧돼지도 이 것 보다는 작을 것입니다.”
신숙주는 우리 안에서 잔반을 퍼먹는 돼지를 보고 혼이 반쯤 나가있었다. 살이 출렁거리고 거대한 몸을 뒤뚱거리는 이게 돼지지. 조선처럼 살 찐 진돗개 사이즈는 돼지도 아니야.
“듣자하니 성장이 빠른 종은 2년이면 다 자란다는데. 우리가 돼지를 사는 줄 알고 고쳐 말한 것이 분명하다네. 실제로는 성장이 조금 느릴 거야.”
“이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니요.”
“기록은 해두지만 다른 종자들을 계속 찾아봐야지.”
낙양은 장안보다 상업이 발달해있어서 거리가 제법 화려하다. 그런 시장거리를 지나가는데 웬 웃통 벗은 남자와 의원 복장을 한 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조선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위병들 안색이 변하는 것이 암만 봐도 약장수들이지?
“뭐라 하는 건가? 번화(사투리)가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군.”
“저도 거의 알아들을 순 없지만 번국 조선의 어쩌고. 이것이 인삼이다 뭐 이런 말입니다.”
“자네들은 나서지 말게나. 안으로 들어가서 내 웃옷을 하나를 챙겨오게.”
명에 내가 들어온 게 두 달이 겨우 넘었는데. 얼마나 되었다고 벌서 소문이 퍼지고 있어? 번국 왕자 어쩌고 하니까 내 이름을 파는 것이 열이 확 오른다. 인근 가게에서 산 적당한 나무통에 물을 잔뜩 담아 역기 대용품을 만들고 축기(蓄氣 - 펌핑)를 시작했다.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저 놈들이 끌려가 봤자 다른 이가 팔아먹을 것이 분명하네. 장사치들의 속이란 다들 검어질 수 있고 저들과 같은 자는 이 거리에 수백 명이 있을 것이니 본보기를 보여야지.”
“설마 그 몸으로 때려눕히신다면.”
신숙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괴력으로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겠지.
“사람은 덮어놓고 때린다고 달라지지 않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일단 놈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자세히 들어보게.”
“한 알을 먹으면 기운이 솟고. 백 알을 먹으면 천하장사가 된다는 말 같습니다.”
“왔어~요 왔어요! 조선의 신비한 약! 북경에 온 조선 왕자에게 구매한 인삼을 넣어 만든 최고의 약! 단 한 알로 기운이 샘솟고 세 알을 먹으면 피부가 희어지며 일백 알을 먹으면 옆에 있는 이와 같이 천하장사가 됩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이니 마음껏 쳐보십시오! 소림사에서도 기르지 못한 근육을 이 약과 함께 길렀습니다.”
펌핑을 마치는 시점에서 옷이 도착했다. 아무리 번화라 해도 이 시기의 중국어를 배워둔 덕분에 점점 알아듣는 양이 많아졌다. 놈의 몸은 뱃살은 뽈록 나오고 근육이 보이긴 하는데 형편없다. 그런 몸을 자랑하다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약을 사러 오셨소?”
“네가 먹은 약을 시험하러 왔다.”
단번에 상의를 잡아 찢어 뒤로 훌러덩 벗어던졌다. 누비솜과 털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내 힘을 다 쓰니 바느질한 부분이 종잇장처럼 찢겨진다. 털과 솜이 날리는 가운데 낙양 길거리 한복판에 자랑스러운 내 상반신이 노출되었다. 대흉근을 불룩거린 다음 목을 한번 꺾고 손가락으로 놈을 가리키니 흥분해서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다가온다.
“어디서 기어 들어와서 남 장사를 망치려고!”
“그 비계 덩어리가 강철보다 단단하다고?”
“너 대체 누구야!”
“지나가던 조선 둘째왕자다!”
양 손을 머리위로 마주 잡고 악력 대결을 한지 일초도 안 되서 놈의 팔이 뒤로 밀려나고 허리가 구부러진다. 그럭저럭 힘 좀 쓰나본데 넌 체중대비로 마서방보다 못하는 거야. 덩치는 나보다 커서 힘은 삼대 팔백 근 할까 말까한 놈아.
“저 몸 좀 보게나. 조선의 왕자가 대장군감이라는데 대장군이 뭐야! 항적(항우)은 되어야 용력을 비교할 수 있겠는걸?”
“빨리 그려야겠네. 지필묵을 좀 주시게! 다음번에 불상을 조각할 때 참고할 것이 생겼어!”
“어찌 저리 태산과 같이 우람하면서도 세세한지 모르겠군. 크고 아름다워.”
“조선 왕자의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 상대방만 밀리고 있어! 저 자도 장사인데 정말 엄청난 힘이군!”
덩치는 좀 더 버티다 아예 뒤로 자빠져 버렸고. 놈의 몸을 뒤집고 다리를 거꾸로 잡아 보스턴 크랩. 속칭 새우꺾기를 하자 유연성 운동도 별로 안했는지 부득부득 소리가 나면서 놈의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적당히 하다가 풀어주고 사기꾼을 노려보니 오줌을 지리고 주저 앉아버린다.
“인삼은 오장의 기를 보하고 기운이 약해진 것을 치료하는 데 효험이 있는데 어디서 거짓을 늘어놓느냐! 난 인삼 같은 것은 먹지 않고 이런 몸을 만들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숙소로 돌아가니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내 눈앞에는 잃어버린 고서적. 이걸 그대로 남기기만 해도 역사를 말 그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책들이 놓여있었다. 내가 있던 역사에서는 존재만 확인된 책이니 당연하지.
“정말 훌륭한 일을 했네.”
“네?”
“이 서책은 백제신찬이 아닌가?! 분명 팔백여년 전의 서책인데 이것이 어찌 여기에 있는가.”
“일전에 장안에서와 같이 낙양에서도 행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준 것이 백제신찬 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필사본을 남기게 하고 원본을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도읍은 과거 신라와 당에게 함락당해 그 서책이 대부분 유실되었네. 이 머나먼 곳에서 백제의 서책을 찾다니 정말 대단하군. 낙양 태수와 사서들에게 선물을 줘야겠어.”
아주 만족스러운 수확이다. 강남에 가서 이것저것을 다 가져오려고 했는데 낙양에서의 이 하나만으로도 온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정주를 거쳐 개봉까지 간 다음에야 바로 운하를 가로지르는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제 여정의 삼분의 일을 왔나?
“배에 타니 참으로 편하군요.”
“하루 이틀을 탈 배가 아니라네. 슬슬 준비해야겠군.”
“준비라뇨?”
“사람은 몸을 쓰지 않으면 고생한다네.”
배를 구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둔 돌로 만든 소역기를 꺼내자 신숙주의 표정이 아주 썩어 들어간다. 듣자하니 사가독서를 하면서 입신체비를 하나둘씩 하는 풍조가 되었는데도 끝까지 안 했다고? 다들 대충 이해했는데 신숙주 혼자서만 싫다는 표정이다.
“적적한데 잘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몸에 병이 생기지요.”
“배 위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몸이라도 굴려야죠.”
“좋은 생각이네. 그렇다면 하나하나 가르쳐 주겠네.”
가벼운 맨손운동을 시작으로 돌로 만든 소역기로 할 만한 운동을 계속 가르쳐줬다. 짐의 한계가 있으니 소역기는 6근, 8근, 10근을 각기 2개만 가져왔지만 초보자에게는 아주 적당하지.
“아아 이것이 의비막(依臂莫 - 프리쳐 컬) 이라는 것이다. 팔의 힘을 강화시키지.”
“제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 겁니까!”
“강남으로 내려가면 기후가 덥고 습한데 그 비대한 몸으로 어찌 버티겠나?”
손가락으로 신숙주의 뱃살을 가리키니 다들 살짝 웃는다. 일행 중에 신숙주의 몸만 비대했던 것이다. 조금 빠졌는데 중도비만 이상이다.
“저기 제가 뙤약볕을 나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 배 안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몸이 더 비대해 지겠지?”
다들 책을 읽고 몸을 놀리고를 반복하면서 계속 나아갔고. 중간에 소주(蘇州)에 내려서 작물 종자를 다시 챙기면서 일주일 정도 있었다. 소주의 고전원림(古典園林 - 개인이 건립한 정원들)을 보니 다들 의욕이 되살아났고. 그렇게 여정을 이어나가 홍택호에 도착하니 때는 3월 26일. 예정보다 10일정도 빠른 도착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 오셨는데 운이 아주 좋아서 다행입니다.”
“운이라뇨.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명국 황상께서 보살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신 분들이니 피로가 심하실 터. 여독은 며칠이나 푸실 계획이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목적지인 강남을 앞두고 있으니까 빨리 출발하자는 눈치다.
“일은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틀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운이 좋으시군요. 이틀 뒤라면 아주 적당한 시기입니다.”
운이 좋다니? 이틀 뒤에 축제라도 있나? 없을 텐데?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출발준비를 하자 정말 운이 좋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이게 배야?”
“배가 아니고 성 아닌가?”
“이걸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고?”
30년 동안. 명의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필두로 하여 대규모 원정단을 만들었다. 그 원정단은 인도를 넘어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원정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보선(대장선)만 하여도 현재 추측으로는 최소 600톤급. 적당히 보아도 1500톤급으로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선박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 눈으로 봐도 600톤은 넘는 것 같다.
“명국에서는 이런 배를 운하에 굴릴 정도인가?”
“세상에 맙소사 이게 아직도 남아있다니.”
“대군 어른께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초거대 선박은 대충 길이만 해도 40미터가 넘고 돛대는 7개이다. 동 시기 최고 크기의 선박이자 백년 뒤 마닐라 갈레온이 나와야 겨우 크기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시대를 뛰어넘은 역작.
“30년 전부터 벌어진 대원정. 천축을 넘어 머나먼 대륙까지 향한 여정을 하였던 배일세.”
우리 앞에는 대운하에서 운송용으로 쓰이고 있었던. 아마도 정화의 마지막 원정에 쓰였을 보선(대장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