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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14화 (14/573)

< 1장 13화 - 갈려나가고 (그림추가) (0723 수정) >

겨울이 지나가고 형님은 건강한 아들을 낳았으며 권 씨 또한 알코올과 비누의 힘 덕분인지 산욕열이 없이 몸을 회복했다, 홍위라 이름이 붙여진 이 아이는(2년 정도 지나야 안전하다 보고 그때서야 군호가 내려진다) 흉년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경사가 되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전까지의 입신체비가 도망가려는 세종대왕님과 형님을 잡아두는 것이면 이제는 구도가 역전되었다. 내가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입신체비를 안 한다고 말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의욕이 있건 없건 아주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측경(側絅 - 래터럴 레이즈)이라는 운동은 가벼운 운동이면서 힘이 많이 드는구나.”

“팔을 높이 드시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여섯 근(3.6kg)으로도 근육이 당겨오니 충분한 것 같구나. 서책을 꾸준히 읽은 게냐?”

“그렇습니다. 범어의 발음에서 당 대와 송 대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를 보아하니…….”

세종대왕님은 목표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끝없는 배움을 원하고 있다. 70권의 책에 추가로 30권을 더 읽고. 주역의 64괘와 음양오행을 다 외운 것은 물론이고 생전 모르는 옥편의 한자들도 계속 암기해야 했다. 산스크리트 어는 당연히 외워야 했고

그 지식으로 단순한 쪽지시험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고 요약해서 논술형식으로 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식이 얼마나 깊은지 내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바로 알아내서 따라오신다.

“한곳이 틀리구나, 그것은 송 대의 변화가 아니고 수와 당을 거치며 변화한 것이니 조금 더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천축에서 쓰이는 진정한 범어이건만 이를 찾을 방법이 없구나.”

“조금 더 심혈을 기울여서 서책에 집중하겠습니다.”

“이제 배움이 어느 정도 진행된 것 같으니 다른 것을 해야겠구나.”

이번엔 또 뭐인데? 언어학적으로 어중간한 거는 어떻게든 머릿속에 우겨넣었는데?

“말씀하시옵소서.”

“이전 나당시대에 있었던 향찰의 발음 또한 배워둬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서책이 있습니까?”

“전조시절에 많이 소실되어서 모두 구하지는 못하였다. 허나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시 집현전에 있는 내 자리에 가니 낡은 고서 몇 권과 새로 엮은 책들이 다시 쌓여있었다. 오늘 지적받은 성음학 부분을 복습하고 저것도 읽어야 내일을 버티겠구나. 퇴근 안하냐고? 진도가 딸리는데 퇴근이 가능해? 잠시 시간 들여서 근육량 유지만 하고 있는 형편에?

“현동이랑 놀아줘야 하는데 어쩐다. 오늘도 한밤중에 들어가겠구나.”

“대군께서도 이렇게 배움에 열중하시니 이 나라가 든든해 보입니다.”

“대제학 아니시오? 헌데 처음 보는 서책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오?”

“전하께서 새 역법(曆法 - 달력을 만드는 법, 이 시대에는 천문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을 만들라 명하셔서 회회교(回回敎 - 이슬람교)의 역법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정인지는 비몽사몽간에 인사를 하고 답한다. 그 또한 신밀레(신하 + 공밀레)를 당하는 건 마찬가지로 보인다. 나처럼 보고 배우는 것도 아니고. 칠정산은 이 시기 기준으로 가장 최신 역법이라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게 대학원생의 인생인가 그거냐? 졸업시켜 달라고 교수한테 랩돌이 생활 하면서 죽어라고 갈리고 졸업을 목표로 사는데. 나는 졸업이 있을까 모르겠네.”

서책의 이해를 도우려 했는지. 이두와 향찰에는 하나하나 형님이나 세종대왕님이 주석을 달아놨는데 이해가 안 되긴 매한가지고. 졸리다 잠깐만 눈을 붙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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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아니야!”

“어이쿠 깜짝이야, 유야 무슨 일이더냐?”

“뒤숭숭한 꿈을 꾸었습니다.”

엎드려 있다 일어나니 형님이 날 깨우려다가 화들짝 놀란 것 같다.

“책을 조금 적게 읽어야 하겠구나. 이제 한밤중인데 어서 들어가거라. 내일은 입신체비를 쉬는 날이니 조금은 여유가 있을게다.”

“아닙니다. 서책은 가져가서 집에서 읽겠습니다.”

진짜 끔찍한 꿈을 꿨다. 내가 조선에 있다가 대충 놀고먹고 하면서 적당히 미래지식으로 버무린 책을 써놓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별로 변하지 않은 대한민국을 돌아다니면서 TV를 봤다. 그 주제는 [수양대군은 과연 시간여행자인가?] 이었다.

그 내용에서는 아주 사실적으로 나의 언행도, 나의 행실도, 내가 써놓은 서책도 하나하나 파고들면서 시간여행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을 했다. 결론은 시간여행자이건 그게 아니건 머리만 잘 돌아가고 게을러서 왕족이 아니었으면 성공하지 못할 놈이라 욕을 먹었지.

입신체비서를 만들어 놓고 제자도 거의 만들지 않아서 힘만 드는 무엇인가로 전락하여 민속놀이 정도로 남아버렸고, 3대 운동을 민속놀이로 하는 것 외에는 원래 역사랑 거의 달라지지 않은 조선으로 남아버렸다.

“예지몽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여기서 아무 일도 안했을 때 벌어질 일이겠지. 다녀왔소!”

“요즈음 늦으시는군요.”

“아바마마께서 행하시는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소. 현동이는 잘 있소?”

“부쩍부쩍 커가는 것이 튼튼한 아이로 자라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금 용기가 난다. 지금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지식을 이 시대에 맞는 수준으로 바꿔서 풀어줄 생각도 하자. 그리고 제자들도 만들고 내 몸도 만들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훈민정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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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요즘 부쩍 달라졌구나.”

“그 아이가 집현전에서 자고 있기에 깨우려 하였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흉몽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헌데 그 이후로 달라지는 것 같더군요.”

“아마 나와 네가 입신체비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는 꿈이겠구나.”

“그럴 리가요, 요즘 들어 점심을 먹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학문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미수(미숫가루)를 점심으로 하는 덕분에 다른 집현전 관리들도 눈치를 보면서 점심을 먹습니다.”

사람의 한계를 쥐어짜내면 그 사람이 주저앉을 수도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인재들을 걸러 온 세종대왕이 기준에 수양대군은 충분했다. 지금까지 해온 수준은 적어도 평범한 집현전 학사들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유와 용이(안평대군) 그리고 정의공주를 들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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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마마께서 형님과 누님까지 부르시다니, 어쩐 일이신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것을 만들기 위하여 부른 것이 분명하다.”

“나라가 스러져도 남을 것이 있다니, 유야 네가 어떤 것인지 짐작은 가더냐?”

“누님, 제가 답은 할 수 없고 아바마마께서 하실 말씀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안평대군, 기억대로라면 오랜 간만에 보는 정의공주까지 3명이 뭉쳤다. 원 역사에서는 수양대군은 그냥 겉도는 놈이었겠지만 내가 있으니 달라질 거다.

“다 모였느냐? 훌륭하게 자란 모습을 보니 아비로서 참으로 뿌듯하구나.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이 나라 모든 이를 위하여 새로 만들 글이니라. 우선 이름을 정음이라 하였는데 추후 새로운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글이라 함이면 한문을 대신할 글이란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용아, 본디 아국과 전조부터 내려온 모든 나라에서 모든 말은 중국과 다르고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였다. 글을 읽는 자들은 부유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백성들은 배움에 힘이 들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유교의 논리는 모든 이의 교화이며. 특히 가난한 백성들의 교화를 중점적으로 삼고 있다. 본래 의미는 아주 좋은 것이니까. 안평대군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만약 그 글이 올바른 글이라면 이 나라가 스러지고 이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도 오롯이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천년을 가는 것이니 그게 가장 좋은 것이구나. 다들 이 서책을 보거라.”

드디어 공개되는 최초의 한글은 글자 하나와 수백 개의 한문 단어, 그리고 예시들로 뒤범벅된 글자가 완성되다 만 덩어리였다. 이걸 최소한 15년 전부터 준비하셨다니 몸이 그렇게 망가지시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부터는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서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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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로쓰기와 우행서는 도입을 못하겠다. 연필을 발명하면 모르겠지만. 이 시대에는 지우개도 없을뿐더러 이놈의 한지는 흑연을 머금기에 세척해서 재활용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떡으로 지운다면 그만한 사치도 없고. 세로쓰기에 좌행서(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씀)가 기본인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

“아바마마. 자주 쓰이지 않는 부호도 있는데 이를 통합하심은 어떠하십니까.”

“유야, 비록 글자의 수가 적고 발음을 뭉뚱그릴수록 백성들이 편한 것은 옳은 말이다. 허나 시일이 지나면 올바른 발음이 점차 잊혀 갈 것이고 쓰임이 적은 발음도 소중한 법이니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음소(音素 - 음의 최소 단위)의 종류가 많은 것은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빙의하면서 뇌에 보정이라도 걸렸는지 자동으로 언어가 이해되는데. 이 이해되는 언어에는 세월이 지나가며 사라진 어휘도 있고 사라진 발음도 있다.

그런데 이게 지금 시대에는 그대로 쓰이고 나도 당연하게 쓴다. 오히려 현대어를 발음하면 역으로 보정이 걸려 발음이 이상하게 박혀버린다. 일전에도 아놀드를 발음했는데 아논두가 되었지.

내가 세종대왕님이나 형님한테 빙의했다면 훈민정음의 발음을 합쳐서 글자 수를 편하게 만들 방법이 있겠지. 듣자하니 형님은 14세부터 이 일에 참여했으니까. 하지만 난 수양대군이니 가장 쉬운 규칙부터 만들자.

“띄어 쓴다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정음은 쉽게 쓰는 글이어야 하니 촌부부터 규중처녀 팔순노인 모두가 쉽게 익힐 수 있어야 하므로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헐버트 목사님 하늘에서는 아니고 한 23대 선조의 몸속 어딘가의 미토콘드리아에서 보고 계십니까? 한자는 띄어쓰기 개념이 없다. 알아서 머릿속으로 끊고 의미를 예상하면서 읽지. 그래서 세종대왕님도 개념이 없는 것이고.

“한문은 본디 뜻이 숨어있는 글입니다. 한문을 읽을 수 있다면 머릿속에서 음을 읽는 것이 아니고 뜻을 새겨내어 문장으로 읽습니다. 하지만 정음은 음을 나타낸 것이니 구분이 필요합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구나, 어디 한번 설명해 보거라.”

없는 개념을 도입하니 세종대왕님도 모르신다. 종이에 효경의 첫 구절을 한문, 훈민정음 그리고 띄어쓰기를 적용한 훈민정음으로 썼다.

“효경 첫 귀는 중니한거증자시좌(仲尼閒居曾子侍坐) 로 읽히지만 한문을 배운 자라면 이를 중니한거 증자시좌로 끊어 읽으며 이것이 정음으로 오면 ‘중니께서한가히계실때증자가시좌하고있었다.’ 라고 쓰입니다.”

“그러하다. 가만히 보면 정음만을 보는 자들은 한문의 뜻을 모르니 어디서 말이 끝나는 것인 지 드러나지 않는구나.”

“그렇습니다. 이렇게 중니께서 에서 반 칸을 비우고 다시 한가히 에서 한 칸을 비우는 식으로 써야 합니다. 그리 하면 쉬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규칙을 어찌 만들어야 할 것인지 모르겠구나, 오히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읽으니 오히려 보이지 않는구나. 유에게는 생각이 있느냐?”

한글 맞춤법 표준안? 그건 정확히 모르는데.

“제가 보기엔 다른 말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토씨 까지는 붙여 쓰되 단위나 다른 말에 연관된 명사는 띄어 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 이상은 저 혼자서는 힘들다 생각합니다.”

“괜찮다! 용아, 이 띄어쓰기라는 것을 한번 혼자서 생각해 보거라. 우선 유가 말한 규칙대로 행하고 부족하면 더 규칙을 만들면 될 것이다.”

안평대군은 대체 뭔지 이해도 하지 못하는 표정이지만 어떻게든 규칙을 꾸역꾸역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중에 가면 새로운 안이 나오고 언어가 변하면서 현대처럼 교정되겠지.

“과연 대단하구나. 정의공주가 책력에 밝고 시문에 능통하다 하였는데 이런 방식이 있을 줄이야.”

“아예 없다 하면 새로운 것으로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헌데 이 것이 아바마마께서 만든 규칙에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음양의 규칙을 사용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어있는 곳을 채웠으니 이 명쾌한 답이다.”

정의공주도 나름 대단한 것 같다, 야사에서는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공헌을 하여 노비를 받았다 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가? 이제 할 일은 숫자를 만드는 것인데. 근거를 또 어디서 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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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 대제학 있소?”

“정인지 어르신이면 지금 대제학이 아니고 형조판서로 계십니다.”

“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역법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인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쪽 구석에서 서책이 와르르 쏟아지며 정인지가 튀어나온다.

“저 여기 있습니다…… 왜 찾으시는 겁니까.”

“일전에 회회교의 역법을 참고한다 하지 않소? 그들이 쓰는 숫자를 알고 싶소.”

“숫자는 어찌하여 찾으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셈법에 능통하여 훌륭한 역법을 만드는 것은 숫자가 알기 쉬워서 그런 것 같소.”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일어나는 정인지를 보면서 조금 찔렸지만 숫자 만들어야 해! 제발 현대 숫자랑 비슷한 서부 아라비아 숫자를 보여줘!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들의 숫자는 특이하게도 열 개의 문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회회교의 숫자나 범어의 숫자나 비슷한 면모가 있는 것 같은데.”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인지에게서 얻어낸 것은 산스크리트어 숫자, 동 아라비아 숫자, 힌두 숫자 정도였다. 그럭저럭 아귀에 맞게 조합해볼까? 여기다 적당히 핑계를 붙이고 구성된 원리를 넣어서 해보면 현대와 비슷해지고 쓰기도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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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는 오늘도 범어 경전과 회회교 경전을 보고 있더냐?”

“그렇습니다, 정음에 맞는 쉬운 숫자를 찾아낸다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지도 반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그래도 유의 도움 덕분에 정음이 더 쉬워져서 다행이다.”

문 밖에서 이야기를 들으니 세종대왕님도 관심이 많으시네. 나는 흥분을 감추며 숫자를 들고 왔다. 서양의 학자들이 ‘비슷하게 진화한 것 같다’ 라면서 넘어갈 수준이다.

“아바마마, 정음에 맞는 새로운 숫자와 부호를 만들어 냈습니다.”

“새로운 숫자라니?”

결국 완성한 새로운 숫자는 동 아라비아 숫자에서 따오다 뒤집고 꺾고 변형하고 하여 만들었다. 1,3,6,7,9.0은 현재 우리가 쓰는 숫자와 비슷한데 2는 동그라미 아래에 작대기가 달린 것, 4는 정 반대로 뒤집혀서 둥글게 쓰고 5는 y자에 가까운 형태며. 8은 X자로 되게 만들었다.

“이 숫자는 짝과 홀의 개념이 음과 양으로 맞물려져 있습니다. 홀수는 남는 것이 있으니 밖으로 뻗어나가며, 짝수는 남는 것이 없으니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단 열 개의 문자로 수를 표현한다고? 혹시 산학(算學 - 수학. 여기서는 산가지로 셈함)의 산가지를 참고한 것이더냐.”

“한번 보시옵소서. 정음으로 이천삼백삼십사를 쓴다면 일곱 자이지만 이 수로 쓰면 네 자입니다. 아무리 큰 수라 한들 붙여 쓰고 늘려 쓰는 법을 적용한다면 어려움이 없습니다.”

산학에서 쓰이는 산가지에는 현대 숫자처럼 자리의 개념도 있으니 0이 빈 자리를 표현한다는 개념은 다들 쉽게 이해했다.

“정말 쉽고 좋구나, 네가 보아왔던 범어 서책과 회회교의 서책들이 큰 도움이 되었구나.”

“그리고 아바마마. 그리고 문장 부호도 만들었습니다.”

“부호라? 궁금하구나.”

물음표나 느낌표 같은 것은 기원이 애매해서 못 넣었다. 대신 문장이 끝나는 부분 오른쪽 위에 마침표를 넣고. 문단이 끝나는 부분은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쓰던 고리점으로. 인용이나 이름은 낫표를 사용했다.

세종대왕님은 내가 내민 한지를 보더니만 끙끙 앓으시면서 다음날 저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조금 수정하신 숫자를 최종안으로 만드셨다.

“팔자가 사방이 모이는 것인지 안에서 나가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므로. 위와 아래를 막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훈민정음에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그리고 숫자를 넣은 다음에야 간신히 해방되었다. 이제 일 년 정도 더 손을 보신 다음에 발표하기로 했으니 더 이상의 속박은 없다. 세종대왕님이 건강해 지신 덕분인지 훈민정음의 완성은 원 역사보다 2년 가까이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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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마마와 내가 조금 더 다듬으면 정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리고 네 눈초리가 뭔가를 원하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는데. 이제 저도 제자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나이가 스물이고 학문이 완성되려면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정도의 포상은 양보해 주시겠지. 왕의 동생이라 받는 견제도 합법적인 학문 연구에 쓰이는 인원이라 하면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구나. 허면 입신체비를 가르칠 사람으로 누가 좋을 것 같더냐?”

“우선 종친 중에 한명을 정했습니다. 백부님의 셋째 아들인 서산군인데 올해 스물 하나이며. 백부님을 닮아 풍채가 탁월하니 옳다 봅니다.”

형님은 조금 고민하시는 듯 턱에 손을 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필이면 문제를 일으켰던 서산군이라니. 하지만 너에게서 효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 기대한다. 헌데 종친 중이라 하면 다른 이들 중 봐둔 자가 있던가?”

“있습니다, 마 씨 가문의 서자인 자가 하나 있는데 아직 관직에 나서지는 못하였으나 재능이 있어 보이기에 가르치려 합니다.”

“관직에 나서지 못한다 하더라도 입신체비는 제법 어려운 학문이다. 소과 정도는 합격하여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소과 정도라. 궁궐에 있는 신료들은 최소 소과는 따고 들어오고 음관(음서)로 들어온 자들도 부끄러워서 과거는 봐야하지.

“역기는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역기가 답을 안다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구나. 차라리 무관을 가르치는 것은 어떻겠느냐.”

“입신체비서에 대한 것을 다른 이와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무관을 위한 것은 추후에 병장기를 다루는 장수와 이야기를 하고 다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구나. 종친이 입신체비를 배운다면 앞으로 가르칠 사람이 많겠지.”

우선 서산군 얘는 성깔도 있고 사고도 치고 했는데 전에 보니 몸은 좋더라고. 아버지인 양녕대군 사이에 최악의 일이 터지고 완전 맛이 가버리잖아? 역사 속의 인물을 함부로 입신체비의 길로 받아들이면 뭔 일이 날지 모르지만. 망나니를 개심시키면 별 문제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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