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3화 (13/573)

< 1장 12화 - 폭. 풍. 전. 야 (7월 23일 수정) >

한 달 정도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을 조련하고 5월이 넘어서자 형수님인 양원 권씨(현덕왕후)가 회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게 시기를 뒤틀어 태어난 단종 이홍위인지 역사가 아예 틀어져서 딸일지는 모르겠는데?

그와 동시에 의외의 인물에게서 연락이 왔다. 양녕대군이 세자빈의 회임을 축하하며 종친들 여럿을 불러 주연을 연다 해서 나를 초대한 것이다. 백부인 양녕대군 얼굴도 직접 보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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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이 회임을 한 것도 있지만. 근래에 들어 간관들이 아주 고달프게 지낸다 하던데 그것이 기뻐 이 자리를 열었다. 이제 봄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껏 즐기자꾸나!”

“형님. 오늘을 위해 좋은 술을 마련해 왔습니다!”

여기는 양녕대군의 집이다. 평상시에는 내가 들어왔다면 쓴 소리를 들었겠지. 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작살나는 연쇄효과로. 이 시대의 문제아인 양녕대군의 견제가 줄어들었다.

관리들이 아침저녁으로 조를 나눠 세종대왕님을 따라 후원을 뛰어다닌 지 시간이 꽤 지났고. 피곤해서 바로 퇴청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 덕분에 자신이 뭔가 하면 매번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 정도가 매우 약해졌다던가.

“이 녀석! 네 어깨를 보니 풍채가 대단하구나. 그 양생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몸을 하고 있는 것이냐?”

“주상전하에 대한 효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학문이 미숙하니 몸으로 할 수밖에요.”

“이렇게 겸손하다니. 자 부어라! 오늘은 코가 빠지게 마셔보자! 비(裶 - 경녕군)야! 술은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다! 잔을 꽉 채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독한 소주를 콸콸 붓다시피 뱃속으로 쑤셔 넣는다. 세종대왕님이 고기면 양녕대군은 술인가? 이렇게 마시고도 60이 넘어서 죽다니 참 대단하네?

“형님은 너무 마시는 것이 아니십니까?”

“허허 괜찮다. 어차피 이 인생 떠가는 물에 조각배처럼 가는 것이지. 그런데 유에게 물어볼 게 있구나. 사헌부 그놈들이 무슨 일이 난 것이냐? 얼마 전에는 치도곤을 맞은 것처럼 거의 기어가더구나.”

“실은 아바마마가 사헌부 관리들이 보질 못하고 듣지 못한다면서 후원에 모이게 하여서…… 그렇게 반 시진 동안 말의 뒤꽁무니를 쫒다가 다들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푸하하하핫! 주상께서 아주 훌륭한 일을 하였으니. 다들 술잔을 들어라!”

마시면서 봤는데 이 양반은 태조 이성계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는지 체구가 우람하다. 세종대왕님이 체구가 살짝 있는 아저씨라면. 양녕대군은 무인? 무골? 정도로 봐야한다. 학문에도 뜻이 없다 했는데 말 타고 돌아다니고 활쏘기나 하면서 몸을 알아서 단련했겠지.

“이런 좋은 날엔 잡기(雜技 - 잡다한 재주)를 자랑 하는 것이 제일이지! 몸 자랑은 유가 너무 대단하니 할 것이 없고.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이번 주제는 뭐로 할까? 오냐 농(禯 - 근녕군)이는 무엇을 주제로 삼을 셈이냐?”

“얼마 전 우스운 광경을 보았으니 자기가 살아오면서 본 가장 우스운 것을 그려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옳다구나! 대접을 가져오라! 술도 많으니 탁주건 청주건 소주건 서로 그림을 그리고 한잔씩 부어라! 혼돈주(폭탄주. 이 시대에는 벌주로 쓰였다.) 한 대접이면 벌주로 충분하겠구나!”

상황을 보아하니 안평대군과 나만 항렬이 낮다, 세자도 아니고 궁중 어르신들 계신데 둘 중 하나가 마셔야겠지?

눈치를 보니 안평대군은 술이 약해서 벌써 한계 같은데 내가 마시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냥 질 순 없지! 가장 화려하게 패배하고 말겠다!

“농이는 뭘 본 게냐? 이건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아니더냐? 양물은 왜 덜렁거리는 게냐?”

“얼마 전 의금부 관리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나무를 타고 월담을 하려다 그만 나무에서 넘어져 거꾸로 걸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몸을 틀어대다가 바지가 벗겨졌다 합니다.”

다들 껄껄 웃어대면서 바닥을 뒹군다. 이 시대에는 유흥거리도 없었으니 이 정도로 노는 게 최선이었겠지.

“옳다구나! 어디보자. 용(안평대군)이는 무엇일까? 이것은 대체 무엇이냐? 왜 사람이 뒤엉켜 있느냐? 네 그림은 언제 보아도 대단하니 일단 좋구나.”

“형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저도 보았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말에 오르시어 뛰시니. 형님은 따라갈 수 있었지만 간관들은 전부 넘어지고 자빠져 참으로 볼만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대다니. 수양대군도 그림은 좀 그렸지만 안평대군에 비하면 아무런 것도 아니군. 다들 웃기 보다는 그림 솜씨에 넋이 나갔다.

“이게 과거였다면 오늘의 장원은 용이로구나! 자 그럼 마지막으로 유의 것을…… 이건 뭐더냐?”

“고양이입니다.”

“아니 이건 고양이가 아닌데. 고양이가 어찌 이렇게 걸어 다닌단 말이냐? 위에 있는 걸 잡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사람처럼 걷는 것은 처음 봤다. 그리고 표정이 슬프기 그지없는 무슨! 이 녀석! 이런 게 정녕 세상에 있단 말이냐? 농이 지나치니 네 녀석이 낙방이다!”

양녕대군이 좀 화가 난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른 종친들도 내 그림을 돌려보더니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아 혼돈주를 만들었다. 죽으려면 화려하게 죽자!

“이렇게 우스운 꼴을 한 고양이가 있다면 그 고양이에게 말을 남기 거라!”

“마! 혼돈주 무봤나! 주도를 지대로 알면 혼돈주도 마싯게 묵는다 아이가! 스까묵자!”

“네 녀석 동래 사투리를 잘 하는구나! 단번에 들이켜라!”

그런데 취기가 많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내 간이 괴물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고 혼돈주를 먹고도 술자리가 끝날 때 까지 넙죽넙죽 술을 받아마셨다.

“끄윽, 더는 못 마십니다.”

“주도라는 것은…… 어이쿠!”

“왜 그리 놀라십니까.”

“아 아니다, 잠깐 그 궁을 가져오너라! 유야 잠깐 일어서 보거라.”

잠시 뒤 하인들이 가져온 것은 보통 각궁크기의 한배 반 정도 되는 무지막지한 활이었다. 크기만 큰 게 아니고 붙여진 쇠뿔과 나무의 두께도 상당한 것이 보통 활이 아닌데? 당겨보라고 하도 재촉해서 당겨봤는데 무슨 철근을 당기는 것 같다. 그래도 꼿꼿이 서서 당겨보니 힘들지만 된다.

“내 착각을 할 만 했구나. 덩치가 좀 좋아야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등판만 보고 술김에 널 태조대왕님으로 착각하였다.”

“태조대왕님이요? 그럼 설마 이 궁은 태조대왕님이 쓰시던 그 궁입니까?”

이 궁이 왜 여기 있어? 함흥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다, 그걸 어린 시절 보아둬서 거의 같게 만든 것이지. 네가 혹시나 당길 줄 알았는데 역시나 쉬이 당기는구나. 이렇게 용력이 좋으니 앞으로 고생은 적겠구나.”

“고생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아비 아니 전하께서 재주가 뛰어난 관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더냐? 이제 궁 안에서 일을 하면 알 것이나 몸이 튼튼하여 잔병치례는 없겠구나.”

에이 뭐 기껏해야 내금위 훈련시키거나 병사들 조련하거나 하겠지. 설마 날 훈민정음 만드는 일에 끼워 넣겠어? 하지만 장기간 외지에 나갔다 올지도 모르니 할 일은 다 마쳐두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미래의 단종이 겨울쯤 태어날지도 모르니 어의들한테 주정으로 소독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비누로도 충분한 소독은 되는데 99%랑 99.9%는 엄연히 다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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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얼마 전 세자빈께서 회임한 걸 들어서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부인의 열독을 막는 법을 우연히 서책을 보다 찾아서 사용해 보았는데 효험을 본 것 같소. 독한 주정으로 손을 닦고 환부를 닦아 열독을 막는 방법인데 이것이 쓸 만할 것 같아서 말이오.”

어의들은 세종대왕님을 치료한 일로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주정을 이용한 소독개념인 거고. 이 소독개념을 시대에 맞게 설명해야지.

“열독이라 함은 종류가 표열(表熱 - 체표의 열), 이열(裡熱 - 소화기의 열) 등이 있고, 더 나아간다면 심화(心火 - 홧병) 도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열은 환후에 나는 열인 염증(炎症 - 한의학에서는 불타는 것 같은 증상)이오.”

“산욕열도 염증에 속하긴 합니다. 헌데 주정은 술을 거른 것 같은데 술은 열에 속하고 있고 염증이 있는 자나 체내에 열이 많은 자는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염증반응은 결국 발열을 불러오고. 화병이 나도 열은 나지만 구체적이지가 않지. 그렇다면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를 풀어볼까.

“우선 몸에서 나오는 비말(飛沫 - 물방울)을 생각해 보시구려. 감모가 걸린 자의 주변에서 비말을 맞은 사람은 쉬이 감모가 걸리게 되니 이는 감모가 비말을 통해 옮겨가는 것이오. 풍사가 몸에서 번성해 다른 이의 몸으로 옮겨가는 것이지.”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헌데 염증이라 함은 상처가 깊고 크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고. 이를 막을 방법은 말이 안 되지만 석감이오. 나도 석감을 사용하고 나서야 알았소.”

비누는 99%의 세균을 제거한다. 이 시대 사람들은 비누를 쓴 적이 없으니 다들 피부에 세균이 넘쳐나지. 그러나 어의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석감이라뇨. 처음 듣는 것입니다.”

“석감을 사용한지 벌써 일 년이 지나가고도 남았소. 그 동안 궁에서 부스럼이 일어난 자나, 작은 상처에 염증이 번져 앓는 이가 있었소?”

“듣고 보니 종들을 빼곤 거의 없었습니다. 헌데 기름때를 씻어내는 석감이 어찌하여 이런 효험을 보이는지요.”

그래 이놈의 조선을 비롯한 동양에는 통계나 제대로 된 실험논리가 없이 개인의 의사나 상태만 보고 대충 우겨넣어서 정확도를 높이는 방향이 주로 사용되었지. 안 그래도 빈민가 애들 단백질 공급한 거 통계 만들고 분석자료 써야하는데 일단 넘어가고.

여기서부터는 하나하나 종류마다 논리적인 접근방법을 알려줘야겠다. 적어도 내 손이 닿는 것에서는 다 그렇게 만든다.

“우리 몸에는 땀뿐만 아니고 기름도 나오게 되오, 기름이 나오는 것은 피부를 보하기 위한 것이나 여기에 먼지가 붙어 뭉치게 되면서 환후가 있는 이의 나쁜 기가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소. 가끔 땀구멍이 막히면 몸에 쌓인 열독과 같이 뭉쳐 종기가 되는 것이고.”

“하면 석감이 기름때를 벗겨내면서 이 나쁜 기를 씻어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석감을 사서 쓴 뒤부터 양반가 자제들의 종기가 줄어든 것도 같습니다.”

“바로 그거요. 헌데 술은 보통 기름을 씻어낼 수 있지만 석감보다는 못하니 이 술을 동으로 만든 고리로 다시 만들어 낸 것이 주정이오.”

“효험이 있다면 한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모든 발전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세균 관련한 논리 진짜 어렵게 풀어썼네. 그런데 여기서 세균이 어떻고 현미경이 어떻고 하면 내가 미친놈 취급받으니 방법이 있나.

“이건 오늘을 위해 준비해온 것이오, 우무(우뭇가사리 묵)인데 일부러 얇게 펴놓고 끓어오를 때 부어 뚜껑을 덮으니 적어도 칠 주야는 절대 상하지 않을 거요.”

“어째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필 우무라뇨.”

“별 이유는 아니고 이 묵이 투명하고 기이한 것을 보아서 그렇소, 얼마 전 집에서 일하던 종이 우무를 밖에 두었는데. 비를 맞고 이틀이 지나자 곰팡이들이 매화처럼 피어오르지 뭐요.”

임시로 만든 실험 배지다. 제대로 만들려면 소 눈알을 졸여서 젤라틴을 만들어야 하던가? 그런데 순도 문제도 있고 내가 그걸 정확히 알지도 못하니까.

“그렇다면 방법을 알겠습니다. 우무가 네 판이니 한 개는 그냥 손을, 다른 한 개는 물로 씻은 손을, 그리고 물과 석감으로 씻은 손, 마지막은 물과 석감과 주정으로 씻은 손이겠군요.”

“완벽하오.”

배지는 우무에 조청을 좀 섞은 걸로 어떻게든 되었고. 중학교 때 했던 실험이 여기서도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실패하면 좀 둘러대고 재시도 해보자. 아니면 주정을 함 써보라고 강요하던가. 그렇게 손바닥을 각자 찍고 일주일 뒤 보니 다행히도 결과가 극명하게 나왔다.

그냥 내 손으로 찍은 거는 세균 덩어리(곰팡이라고 말했다), 물로 씻은 손은 손가락 쪽에 곰팡이, 비누로 씻은 손은 그래도 곰팡이가 경계를 넘어서 번졌고, 알코올로 씻은 것은 잔여 알코올이 세균을 죽여서인지 곰팡이가 오히려 손바닥 찍은 곳을 조금 피해갈 정도였다.

“주정이 정말 효험이 있습니다. 헌데 주정이 효과를 보인다면 소주도 쉬이 쓰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정이 아주 독해야 효험이 있더구려. 물 한 되에서 팔 할 하고도 칠푼 무게와 주정 한 되의 무게가 같으면(비중 0.87) 효력이 있었소. 소주는 사용해 보아도 효력이 없던 것이나 독해지니 효험이 나타나는 것이 신기하더구려.”

“우선 동으로 만든 소줏고리를 한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궁으로 들여오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사용법을 좀 알려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궁궐로 옮겨진 소줏고리는 명물이 되었다, 어의들은 이 말을 듣고 자신들 나름대로 소독했던 침을 이제는 쓰기 전에 다시 소독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형님도 ‘이리도 비싼 기물이니 요긴하게 사용하겠다.’ 하시면서 나중에 값을 되돌려 줄 거라는 이야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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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몸을 다시 만들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겨울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세종대왕님은 사전에 알아야 할 지식이 있다면서 주강과 석강 사이에 집현전을 이용하라 하셨고 거기에 쌓인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게 전부인가?”

“아닙니다, 아직 더 있는데 먼저 이것부터 보라고 하셔서 먼저 가져온 것입니다.”

“열 스물 서른 오십 칠십… 칠십 권이라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군사 조련이나 다른 업무도 아닌 훈민정음이다! 조선시대 책이 지금으로 치면 좀 글자가 큰 책으로 100페이지도 안 되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70권! 한자로 된 책이 어중간한 소설수준으로 쌓여있었다. 일 년간 배우는 고등학교 교과서 분량정도 되는 것 같다.

“이게 뭔데! 이게 사전지식 맞아? 이러다가 책 더미에 깔려 죽고 먹물범벅이 되겠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세종대왕님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최 측근 몇 명과 함께 장기간 작업을 하고. 거기서 발생할 수 있는 허점이나 오류를 종친들과 같이 잡아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다 없애버리고 망쳐버리고 하던 세조도 애착이 있어서 훈민정음 보급에 힘썼겠지. 문제는 사전지식을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 거다.

“내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다 꿰고 있어야지 태클을 거는 건 상식적인 것이 맞는데 지금 문법이 꽤 다르니까 배워두는 것이 맞고. 그리고 음양오행? 주역이 아무리 필수도서라지만 장난 아니다. 이건 차라리 학교공부를 다시하고 말지.”

세종대왕님과 형님이 내년 초부터 시작한다고 말은 하셨는데 거기에 필요한 지식으로 일단 옥편부터 깔고 들어가고 주역의 음양오행 원칙을 적용한 놈이다. 그러니 주역정의(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주역 관련 서적)또한 사전지식으로 깔고 들어가는데 이게 산더미다.

세조가 주역을 한글로 번역한 것도 여기서 배운 것이겠지. 이렇게 고생을 해서 완성한 것이라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아낀 것 같다.

“대군어른. 여기 서책을 가져왔습니다.”

“또? 이번에는 대체 무슨 책인가?”

“절운, 당운, 광운 입니다. 주상전하께서 특별히 말씀하신 것이라.”

책을 펴보니 성음학(현대의 음운학) 책이다. 각기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어떻게 발음하는 지에 대한 서적인데. 이제는 범어까지 알아둬야 하는 거야? 그 무협지에 나오는 언어? 그래도 음운학적 지식이니 꼭 알아둬야만 하는 거야? 그래도 수양대군이 불경 좀 읽어서 산스크리트어는 몇 글자 아네?

그렇게 나는 폭풍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 덩어리는 폭풍전야 그 자체였다. 거대한 폭풍이 오기 전 밀려온 비구름 덩어리일 뿐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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