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도화 맞지? 유도화.”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던 나에게 다가온, 너의 첫 인사. “이름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어.” 그건 그토록 싫어하던 이름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정의하는 단어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으면 하게 됐다. 목소리, 향기, 단정한 교복…. 책장을 넘기는 하얀 손가락이나, 웃을 때 그림처럼 접히는 눈매, 부드러운 말투, 혹은… 한여름의 어느 날,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끌어안아 주었던 다정함 같은 것들이었으면. …작품 속에서… 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우리 집과 반대 방향으로 한 블록 건너가야 했다.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며, 혹시나 모자라도 있을까 싶어 가방을 뒤적이려는데 누가 내 앞에 소리 없이 다가와 섰다. 낡은, 익숙한 운동화였다. 고개를 들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우산과, 군데군데 젖은 회색 티셔츠와, 웃고 있는 유재우의 얼굴이 차례로 보였다. 촌스러운 옛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꼭 내가 곤란할 때 나타나는 유재우라든가, 우스꽝스러운 효과음보다 더 크게 뛰는 심장 소리나- 마치 아웃포커스처럼, 그 애 주변의 모든 배경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는 그런 것들이. * 그래도- 노란 커튼 너머 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이나 방 한쪽에 걸어놓은 교복을 볼 때, 무작위로 재생되는 음악목록에서 우연히 기타 반주를 따라 속삭이는 노래가 나오면, 불을 끄고 침대에 가만히 누운 밤 문득,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났다.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조용한 목소리, 햇빛을 빚어 만든 것 같은 따뜻한 향기와… 내 뺨을 감싸던 흰 손가락, 마지막으로 오래 눈에 담은, 잠든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