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폐광촌의 여름, 이탈리아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휴가차 사촌의 집을 방문한 선겸은 아무도 걸음하지 않는 산속에서 소름 끼치는 바이올린 선율에 이끌린다. 그가 마주친 것은 삼백 년 묵은 악기와, “너…… 너 뭐야?” 세상과 단절된 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연주해 온 소년이었다.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바이올린과 재희의 재능에 이끌린 선겸은 그날부터 소년의 부친을 피해 재희와 은밀한 만남을 지속한다. 재희에게도 이 낯선 방문자가 묘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무례하다가도 다정했으며, 한없이 가벼워 보이다가도 음악과 악기에 진지했고. “브라보.” 최고의 찬사를 건네며 웃어 주었다. 청중을 자처하고 더 넓은 음악 세계를 소개해 주는 그의 존재에 점차 익숙해지고, 재희가 매일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기 시작할 무렵. 산에서 불이 났다. 바이올린을 든 재희가 붉은 배경을 뒤로하고 선겸의 앞에 섰다. “그날…… 당신이 이름을 말해 준 날. 사실은 당신 이름이 더 예쁘다고 말하고 싶었어.” 숲을 헤치고 걸어 내려온 재희의 발은 너덜너덜했고. “나를 데려가 줘.” 파리한 얼굴로 내뱉기엔 정중하고 간절한 부탁이 힘겹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