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번의 전생을 모두 기억한다. 노예로도, 대마법사로도, 여기사로도, 성녀로도 살았던 끔찍한 삶들. 괴로운 기억을 전부 잊게 해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텐데.
주신이 있다면 바네사에게 너무 잔인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자신과 계약해줄 악마를 찾아낸 이유도 그래서였다.
아이작 카밀. 6번을 결혼했으나 새 신부가 매번 첫날밤만 되면 죽어나가 악마가 씌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대공의 뒤를 따라다녔다.
“역시, 내 정체를 아는 건가?”
다시 턴.
“역시, 제 정체를 아시는 거죠?”
바네사의 입김이 카밀의 코끝을 스쳤다. 허리가 뒤로 숙여진 바네사 위로 카밀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 조금만 입술을 내밀어도 키스가 가능한 거리였다. 딱딱한 힘과 함께 깔끔하게 몸이 일으켜져 다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가슴이 밀착하며 깊게 닿는다. 두근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화음처럼 얽혀 울렸다.
“그런데 전하, 계약자가 다른 남자와 혼인하도록 내버려 둘 건가요?”
“그럴 리가. 먹잇감을 풀어두는 취미는 없어.”
후일 알게 된 그의 이름은 벨제뷔트. 오래 전에 소멸되었다고 알려진 마계의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