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지 못할, 지워서는 안 될 죄를 저질렀다. 평생 속죄조차 사치라 여기며, 그저 숨이 붙어 있기에 살아가던 와중... 별안간 타인의 몸에서 눈을 떴다.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며 독을 여섯 번이나 삼킨 여자란다. 세실리아 린튼 백작 부인. 그녀의 유서나 다름 없는 일기를 통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 더는 남편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 존재만으로 타인을 저주하는 기구한 생.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여 설렘 따위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 몸을 떠넘기고 떠난 여자의 마지막 소원 쯤은 들어줘야 마땅하겠지. "세실리아, 앞으로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조차도 스스로를 원치 않게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니 내가 세실리아가 된 이상 그녀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 없을 터였는데. 나와 비슷한 남자, 리카르도 바스티안과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