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그냥 해요, 우리
(109/110)
외전2. 그냥 해요, 우리
(109/110)
외전2. 그냥 해요, 우리.
2022.04.17.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오롯이 세 식구가 함께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세희가 소파에 앉자마자 영준은 새로 장만한 자동차 블록을 내밀었다.
포장을 뜯어주니 소파 밑에 앉아 블록을 맞추는 영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평범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아들인 영준에겐 서씨 집안 남자 유전자의 피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성장도 빠르고 말도 빠르다. 어른들도 맞추기 어려운 블록을 설명서의 그림만 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잘도 맞추었다.
그런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때 커다란 손이 작은 뒤통수를 감싸 끌어당겼다.
한껏 가까워진 입술이 허스키한 음성으로 세희에게 속삭여왔다.
“어딜 봐, 주세희. 남편을 봐야지.”
나른하게 내리뜬 짙은 눈동자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곧이어 뜨거운 입술이 깊게 맞물려왔다.
눈만 마주치면 끊임없이 부딪혀오는 이 남자의 키스엔 변함없는 욕망이 배어 있었다.
그건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4년 차에도 부부의 애정은 식긴커녕 더 애틋하고 절절하고 뜨거워졌다.
이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미세한 접촉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며 감각이 깨어난다.
유부남이 되고 아빠가 되고 30대 중반에 들어섰건만. 타고난 유전자와 철저한 관리로 강준은 더 매혹적이고 섹시해졌다.
나이 불문 여자라면, 한 번은 훔쳐보고 싶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 남자가 지겨워질 날이 오긴 할까.
입안을 헤집는 능숙한 움직임에 막연한 생각도 여기까지.
결 좋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파묻는 세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심장으로부터 발열된 열감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한 가닥 남은 이성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다리를 무언가가 휘감아왔다.
밑에 앉아 있던 영준이 세희의 다리를 꼭 안은 것이다.
아들의 존재가 떠오른 세희는 단단한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한껏 탁해진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얄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늘 이런 식으로 날 홀려. 세 식구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말로 하는 대화만 나누자고 했잖아요.”
언제 달아올랐냐는 듯 단호한 세희의 눈빛과 표정에 강준은 마지못해 상체를 뒤로 물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리는 손길이 나른했다. 마치 방금 전의 행위에 여운이 가득한 것처럼.
하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색은 서늘하고 담담했다.
“조기 교육시키는 거라 생각해요. 부모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또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아끼고 사랑해줘야 하는지. 내 아들이면 똑바로 알고 잘 배워야지.”
“이제 고작 세 살짜리한테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니까.”
막힘없는 강준의 대답에 세희는 결국 웃어버렸다. 정말 말이라도 못 하면.
“여보가 나만 보면 뽀뽀해대니까 영준이도 그러잖아요. 사람만 보면 뽀뽀하려고 입술부터 내민다구요. 어머님과 할아버님, 시터, 그리고 진경이랑 경진 씨한테도.”
“이런,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군.”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이 다가와 세희의 귓가에 속삭여왔다. 입맞춤은 아빠처럼 한 여자에게만 해주는 거라고 알려줘야겠다고.
능구렁이처럼 매끄럽게 넘어가는 강준을 바라보는 세희의 표정은 심각했다. 세 살 아들은 어른 대하듯이 하고, 32살이 된 나는 어린애 다루듯이 하고.
이 남자에게 여전히 내가 1순위라는 게 감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하다. 나에게만 다정한 이 남자가 아들에겐 너무 냉정하고 이성적이라서.
그래도 우리 아이인데, 하늘의 별까지 보면서 죽다 살아난 것처럼 힘들게 낳았는데.
“아빠, 도와주세요.”
그제야 강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영준에게로 향했다.
영준이 강준에게 내민 건 어른들이 취미로 맞추는 블록이었다.
정확히는 잘 빠진 스포츠카를 만드는 작고 복잡한 형태의 블록.
이럴 땐 정말 부전자전이다.
무관심한 건 지독히도 무관심하지만 마음이 가는 건 지독하게 집착하며 집중하니.
이번 자동차 조립은 좀 어려웠는지 요리조리 해 보다 안 돼서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였다.
소파에서 내려와 영준의 옆에 앉은 강준이 말했다.
“서영준, 한 번만 가르쳐 줄 테니 잘 봐.”
“이만큼 많이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말랑해지는 영준의 귀여운 목소리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도 강준은 단호했다.
“영준아, 모든 기회가 열 번씩 오지 않아. 그러니 뭐든 한 번에 성공하도록 버릇 들여. 그래야 내 아들이지.”
너무 스파르타식 교육이 아닐까 걱정이 되지만 세희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자신만의 육아 방식이 있듯이, 강준에게도 강준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모든 걸 제게 맞춰주는 이 남자를 세희 또한 모든 면에서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4년이란 결혼 생활 동안, 서로에게 잔소리조차 한 적 없었다.
“난 서강준 아들이에요!”
씩씩하게 대답한 영준을 흐뭇하게 바라본 강준은 아들에게 일부러 천천히 손을 움직여 조립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3살 아이답지 않게 아빠의 손놀림에 집중하는 영준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아빠의 말대로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것처럼.
영준이 어어, 라고 작게 의문을 보이면 커다란 손이 잠시 멈춘다.
맞추었던 블록을 해체했다가 다시 맞추고 눈으로 아이의 표정을 확인하고 체크한다. 아이가 이해했는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는지.
세희는 오늘도 그렇게 살가운 대화가 오가지 않는 부자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빠의 손놀림을 조용히 지켜보던 영준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에서 블록을 가져가 스스로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그림 설명서를 보고 블록을 맞출 때마다 영준이 강준을 보았다.
강준이 고개를 끄덕여주면 박수를 치며 웃었고, 고개를 저으면 다시 블록을 조립했다.
세희 자신에게만 보여주던 그 인내와 끈기를 지금 강준은 아들에게도 보여주고 있었다.
독특하고 오묘한 분위기로 돈독한 부자를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세희였다.
그때 핸드폰으로 연숙이 전화했다.
[세희야, 엄마 지금 영준이 데리러 갈게.]
통화 내용이 들렸는지 강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늦게 재운다고 해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연숙과 세희는 동시에 당황했다.
강준은 아들이 아프지 않은 이상, 부부만의 시간을 칼같이 사수하는 남자였다.
부모 역할도 중요하지만 부부 사이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영준에게 푹 빠진 연숙도 날마다 손자를 품에 끼고 자고 싶어 했고.
하지만 오늘은 드물게 예외의 밤이 될 것 같았다.
몇 단계 난이도가 업그레이드 된 블록을 맞추는 아들이 강준도 기특한 눈치였으니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영준이 슈퍼카 블록 조립을 완성했을 땐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부자를 보고 있는 세희는 하루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구나.
참 부질없는 걱정을 했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준은 강준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하고 있을 뿐인데.
11시가 되어 연숙이 영준을 데리고 간 후에야 드디어 부부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침착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탁해지며 열감이 어렸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영준 아빠라는 역할은 잠시 내려놓고 주세희의 남편이고 남자로서 충실해야 할 시간.
고삐 풀린 짐승처럼 덤벼드는 내 남자를 세희는 기꺼이 환영했다.
서늘한 공기를 머금은 고요한 밤을 뜨겁게 데우고 일그러뜨릴 시간이었다.
***
영준의 돌잔치를 치른 후, 미자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서울의 대학 병원에 바로 입원했고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졌다.
부부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병원을 찾았고, 미자는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살만큼 살었고 이제 죽어도 여한 없다. 때 되면 보내 줄 줄 알어야 떠나는 사람도 맴 편한 거여.’
그리고 꽃샘추위가 유난히 시리던 봄날의 어느 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 연락에 한신가 일원이 모두 병원으로 달려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도 미자는 담담하게 한 명 한 명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다고, 우리 손녀 잘 부탁한다고.
하지만 손녀를 바라볼 땐 미자도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세희 넌 할미 때문에 절대 울지 말고 항상 행복해야 혀. 그게 할미 마지막 소원이니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희를 보며 미자는 조용히, 그리고 편하게 숨을 거두었다.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마지막 순간 머금은 채.
죽어서도 귀찮게 하기 싫다면서 화장을 고집한 미자의 유언을 부부는 기꺼이 받들었다.
미자는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넓은 세상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세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차분하게 견뎌냈다. 미자의 죽음도, 장례식도, 영원한 헤어짐의 마지막 순간조차.
창백하고 핼쑥한 세희의 작은 얼굴은 지독할 만큼 단정하고 침착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강준은 생각했다.
차라리 서럽게 울었으면. 주세희의 눈물은 끔찍하게 싫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
집에 도착한 후에도 세희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담담했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만큼.
연숙이 영준을 안고 본채로 넘어가자 그제야 세희의 얼굴에 옅은 피로감이 번진다.
“나 피곤해요. 좀 잘게요.”
중얼거리듯 강준에게 말한 세희는 침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따라가서 품에 안고 재워주고 싶지만 돌아서는 작은 어깨가 단호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고집스러운 그 메시지에 강준은 막연한 눈빛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강준은 노크도 없이 침실문을 벌컥 열었다.
침대 위, 하얀 시트를 뒤집어쓴 작은 형체의 잔떨림이 시야를 흔들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아서.
자신만의 좁은 공간에 숨어 세희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간 강준은 시트를 끄집어내렸다.
새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세희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내 앞에선 실컷 울어도 돼요.”
“…….”
“할머님한텐 안 이를 테니.”
주세희의 눈물은 강준에게 잘 벼른 칼날과도 같았다.
그 칼이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난도질할지언정, 지금만큼은 그랬으면 한다.
“흐윽.”
가슴을 뜨겁게 적시는 눈물을 느끼며 강준은 생각했다.
지금 이 눈물이 주세희의 마지막 눈물이었으면.
들썩거리는 가녀린 등을 끊임없이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잔떨림이 잦아들더니 세희가 젖은 눈으로 강준을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지그시 내려다보자 젖은 눈처럼 젖은 입술이 속삭이듯 달싹거렸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참 다행이야.”
별것 아닌 이 여자의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 건지.
늘 그렇듯 답은 하나였다.
그야 사랑이니까.
그래서 이 여자의 눈짓 한 번에 손짓 한 번에, 웃음과 눈물에, 내 피가 마르고 심장이 퍼석해졌다가 또 이렇게 힘차게 뛰는 거겠지.
“당신은 절대 날 두고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강준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어떤 새끼 좋으라고 내가 먼저 죽어. 다른 새끼들이 눈빛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단 하루라도 주세희보다 더 오래 살 거니까. 그것도 아주 악착같이.”
단 하루라도 내가 곁에 없는 주세희는 상상하기 싫었다.
물론 지독한 집착이고 소유욕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죽는 순간까지 멈추고 싶지 않다.
모든 인생을 걸고 심장을 건 여잔데, 그 정도 집착과 소유욕은 보여 줘야 마땅하지.
강준은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러운 촉감과 다디단 살 냄새에 퍼석해졌던 심장에 피가 돈다.
마치 흡혈을 한 뱀파이어의 심장처럼.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진 욕망에 강준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짐승 새끼가 따로 없네.”
그것도 변태 짐승 새끼.
힘든 일을 겪은 아내에게, 아플 만큼 젖어 있는 저 눈을 보고도 이 꼴이라니.
어떻게든 자제해보려는 강준의 고삐를 풀어버린 건 늘 그렇듯 주세희였다.
“섹시한 그 짐승을 내가 지금 원한다면요?”
가느다란 손이 야살스럽게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움직인다.
얄미울 만큼 앙큼하게 새침 떨다가도, 대담할 땐 한껏 대담해지는 요마녀가 어련하실까.
이러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지.
사르륵사르륵. 침대 밑으로 옷가지들이 떨어지며 가빠진 숨결이 얽혀들었다.
늘 그렇듯 주세희 앞에서 강준은 속수무책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엔 트라우마처럼 떠올리는 게 있었다.
영준을 낳을 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주세희를, 그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그렇게 독한 마음으로 둘째를 바라는 아내의 유혹을 매번 잘 견뎌냈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급하게 협탁 옆으로 향하는 손을 잡은 주세희의 젖은 눈과 마주하기 전까지.
참을성의 한계가 온 강준이 미간을 구기자,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해요, 우리.
눈물 젖은 눈동자가 이렇게 유혹적일 줄이야.
“……빌어먹을.”
나약한 스스로에게 툭 던진 자조적인 중얼거림이었다.
협탁으로 향했다가 툭 떨어지는 커다란 손에 세희는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껴왔다.
제게로 끌어와 따뜻하게 감싸며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왔다.
이번엔 내가 서강준 당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