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나의 아내 주세희가.
(108/110)
외전1. 나의 아내 주세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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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나의 아내 주세희가.
2022.04.14.
오늘 세희는 친히 자신의 집무실까지 이노기획 관계자들을 불러들였다. 정확히는 제작팀장과 전무인 영국을.
“그 정도 예산으로 이런 거지 같은 시안을 내밀다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네요. 바로 무능력. 아니면 돈 장난을 쳤든지. 내가 보기엔 둘 다일 것 같은데, 맞나요?”
지금까지 이노패션의 광고는 타 광고사가 진행했다. 하지만 이노패션의 대표로서 마지막으로 맡은 프로젝트 광고는 이노기획에게 맡겼다. 그것도 역대 최고의 광고 예산으로 말이다.
물론 최근 들어 자꾸만 들려오는 불미스러운 소문의 원흉을 유혹할 미끼였지만.
침묵하는 영국을 대신해 제작팀장이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셨다면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해외에서도 지금 가장 핫한 아이돌 출신 남자 배우를 섭외했고 그 배우 이미지에 따른 광고 콘셉트를 잡은 겁니다. 그래야 그 남자 배우의 해외 팬층까지 확실하게 사로잡아서 이노패션 고객으로 연결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 남자 배우 섭외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며 덧붙인 제작팀장을 세희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물론 광고에서 모델이 중요한 건 인정.
그렇다고 모델만 그럴싸하게 뽑아놓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날 속이려 들면 안 되지.
“그 남자 배우 팬층이 10대, 20대가 과반수 이상이에요. 이노패션의 충성도 있는 구매고객층은 30대, 40대이고. 그런데 그 남자 배우 팬층을 이노패션 충성도 있는 고객으로 잡겠다? 대체 무슨 수로?”
느닷없는 지적에 제작팀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희는 멈추지 않았다.
“컬러에 민감한 패션계에서 올봄에 유행할 컬러도 파악 못 하고 거만 떨다니. 이노패션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럴까.”
예상대로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걸 눈치챈 팀장이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토해냈다.
“모두 전무님 의견이었습니다! 저희 팀도 대표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을 걱정했는데, 전무님께서 문제 생기면 딸과 잘 이야기해보겠다고 하셔서…….”
“김 팀장은 나가봐요. 전무님과 둘이 할 말이 있으니.”
팀장이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간 후, 세희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경고했는데, 참 말 안 들어요.”
내가 한신가의 며느리 주세희 아빠라고. 한신가의 압박 때문에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그 애가 얼마나 뒤에서 효녀 노릇 하는지 모른다고.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작은 일에 야금야금 제 이름을 거론했지만 안타깝게도 세희의 귀에 모두 들어오고 있었다.
영국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비서가 바로 세희의 사람이었으니까.
광고 건은 자신이 조만간 이노패션 대표직을 사임하고 한신 뷰티로 간다는 소식에 옳거니 저지른 일일 테고.
“세희야.”
영국이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세희의 눈빛이 돌변했다.
어딜 감히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는 듯이.
“대표님. 호칭은 똑바로, 깍듯하게.”
어쩜 이렇게 변함없이 우둔하고 무능한 건지.
오랜 시간 무관심과 방치에 고통받게 한 것처럼, 당신도 그랬으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조 여사가 없는 유영국은 그야말로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였다. 뒤늦게 빠져든 도박에 사기에 그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여기저기 돈이나 빌리고 다니다니.
“유 회장님 말씀 들어보니 이노제약 원주 제3공장 공장장 자리가 비었다던데. 유 전무님이 내려가서 맡으시면 되겠네요.”
한신과의 동맹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인 세희의 부탁을 유 회장은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버려도 그만인 무능력한 아들놈을 이렇게라도 이용할 수 있으니, 오히려 옳거니 하는 눈치였다.
영국이 핏기 가신 얼굴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세희야, 어떻게 나보고 원주까지……!”
“대표님.”
“대, 대표님, 그래도 원주까지 내려가라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부녀……!”
“한 번만 더 그 말 들먹여봐요.”
싸늘한 눈빛이 찌를 듯 경고하자 영국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유 전무님이 빌린 도박 빚은 내가 해결할 테니, 다신 회삿돈에 손대지 말고 도박도 하지 말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영국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세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장 비서가 내려가자마자 엄마 묘로 안내해줄 거예요.”
원주는 세희의 엄마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쌍둥이 언니의 눈에서 벗어나고자 숨어들었고 생을 마감했던.
“하루에 한 번. 태풍이 오든 폭우가 오든 저녁 6시에 엄마 묘 찾아가서 참회하세요. 벌초부터 묘 관리까지 정성 들여 직접 관리하시구요. 후에 전무님 묫자리도 그 옆에 마련될 테니 저승에서라도 부부 연 맺으시길 바랄게요. 참고로 이건 유 회장님도 허락하신 일이구요.”
세희의 말에 영국의 눈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세희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사이였니까.
영국이 집무실에서 나간 후 세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런 남자 어디가 좋아서 엄마라는 사람은 그렇게 목을 맸을까.
그럼에도 엄마가 생에 단 한 가지 원했던 걸 주기로 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날 포기하지 않고 낳아준 것에 대한 빚을 갚는 셈 치고.
그 덕에 서강준을 만났고, 좋은 시댁 식구를 만났고, 영준이라는 소중한 내 아들도 생겼으니까.
난 지금 누구보다 편하고 행복하니까. 이보다 뭘 더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
조 여사는 멀거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그날을 떠올리며 아드득 이를 갈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좀 더 치밀하고 완벽했어야 했다고.
2년 전, 모든 걸 건 마지막 발악이 처참하게 끝났다. 정 실장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튀었고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국민 대부분이 그 영악한 것을 동정하고 존경했으며 자신과 영국은 손가락질하고 욕해댔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가서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완벽한 역전이고 복수였다.
답답할 만큼 조심스러운 그 성격에 걱정거리 한 개 정도는 놔두었어야 했는데.
이제 그 영악한 것은 모든 걱정을 털어버리고 맘 편히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난 이렇게 하루하루 여기서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창살 없는 편한 감옥에 갇혀서 조 여사는 날마다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너를 꼭 죽일 거야, 두고 봐.”
진즉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우아한 척 기품을 떨며 모질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거였다.
하지만 더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널 보게 될 거고, 그땐 그 질긴 목숨을 끊어놓고 말리라.
그렇게라도 복수를 꿈꾸지 않으면 정신줄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 여사는 모범환자처럼 지냈다. 잘 자고 잘 먹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척, 말 잘 듣는 척.
일거수일투족이 보고가 들어갈 테고, 그래야 그것이 날 보러왔을 때 방심할 테니까.
그깟 포크 하나를 숨기려고 얼마나 수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문이 열리고 남자 간호사를 대동한 주세희가 나타났다.
“다음 주에 이모 병원을 더 넓고 쾌적한 곳으로 옮길 거예요. 야외 산책도 되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내가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니?”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고상한 척 굴었다.
백발이 된 머리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네 앞에서만큼은.
“고마워하실 것까진 없어요. 그냥 이모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세희는 조 여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밖 너머로 보이는 당신 동생 묘를 보면서 사죄하세요. 그리고 해가 지는 저녁 6시, 당신 동생 묘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당신 남편도 보구요.”
“……뭐?”
“다음 주부터 지내게 될 그 병원 VIP 병실에서 엄마 묘가 한눈에 훤히 잘 보이거든요. 명당자리에 이모도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작업까지 하려니 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내가 기어이 널 죽여버릴 거야!”
악귀처럼 눈이 뒤집혀 세희에게 덤벼들려는 조 여사를 남자 간호사가 제압했다.
“그거 하나 숨기겠다고 꽤 오랜 시간을 애쓰며 투자한 거 알지만, 바지춤 안에 숨긴 포크는 회수해야겠어요.”
세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남자 간호사의 손이 조 여사의 허리춤을 더듬더니 포크를 찾아냈다.
그제야 거리를 좁혀온 세희가 조 여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바로 들어. 난 오늘 이후로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고 영원히 내 뇌에서 당신을 지울 거야. 이젠 당신을 봐도 아무렇지 않거든.”
그걸 증명하듯 조 여사를 빤히 응시해오는 말간 눈동자가 차갑다. 조 여사를 향한 어떤 증오도 원망도 없다는 것처럼.
“그곳에 가서 잘 먹고 잘 자고 병원 사람들과 좋은 인연 맺고 잘 지내든, 아니면 발악하며 생을 마감하든. 이제 그건 이모 선택이에요.”
예전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진 얼굴을 가까이 한 세희는 조 여사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이모를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난 앞으로 어떤 증오나 원망도 없이 완벽하게 행복할 생각이니까.
문을 닫고 나오자 조 여사의 악 받친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세희는 평온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왔다.
지긋지긋한 당신도, 당신과의 악연도. 이젠 모두 다 안녕.
***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강준이 외계인처럼 쭈글쭈글한 작은 생명체를 처음 품에 안을 때 중얼거리듯 한 말이었다.
배 속에서 열 달간 엄마를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세상 밖으로 나올 때도 기어이 엄마를 고생시킨 아들이었으니까.
세희에겐 비밀이지만 막 태어난 아들에게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한 강준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세희를 제외하고 그의 감정을 자극하는 존재는 없었고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들이라기보다는 처음으로 접한 아기라는 생명체가 신기해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달까.
외계인처럼 쪼글쪼글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서는, 이제 제법 살이 붙어 눈을 맞추며 웃을 줄 알았다.
2.9킬로의 몸무게로 작게 태어나 엄마를 닮은 게 분명하다고 들었던 아이는 돌이 지나자 ‘나 사실은 아빠 닮았어요’라고 항의하는 듯 폭풍 성장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아등바등 뒤집으려고 기를 쓰더니 기었고 무언가를 잡고 낑낑거리며 일어나서 꽃게 걸음을 하고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찍어대더니 아장아장 걸었다.
그리고 이젠 제법 잘 뛰었다.
지금처럼.
“아빠아, 아빠아!”
정원 한쪽에 마련된 놀이터에서 연숙과 함께 놀고 있던 영준이 아빠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부성애까진 모르겠지만 그런 아들에게 정이 붙었다는 생각이 제법 들 만큼.
그런데 영준이 짧은 다리로 뛰어오다가 넘어졌다.
깜짝 놀라 달려오려는 연숙에게 강준이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으앙 하고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아들이 자신을 쏙 닮은 새까만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세 살.
하지만 23개월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면 길 수도 있는 삶을 살면서 아들은 영악해졌고 눈치도 빨라졌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엄마도 할머니도 증조할아버지도 아닌,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아빠라는 걸.
훌쩍훌쩍하면서도 기저귀를 한 귀여운 엉덩이 먼저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통통한 두 손으로 잔디를 짚더니 기어이 혼자 힘으로 일어난다.
“손 털고.”
강준이 한 번 더 엄한 소리를 하자 보란 듯이 손을 탁탁 털곤 다시 강준에게 달려왔다.
그제야 강준은 아들을 안아 하늘 높이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까르르 웃는 아들의 웃음소리가 저녁 공기를 가르며 정원으로 번졌다.
살며시 얼굴을 찌푸린 연숙이 강준에게 핀잔을 주었다.
“넌 아들에게 너무 엄해. 고작 세 살인 애한테.”
“무서워하는 사람 한 명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세상 신중하게 잘살지.”
그 말에 동의 못 하겠다는 듯 연숙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아들, 엄만 너 그렇게 안 키웠다? 그리고 세상에 무서운 사람 한 명 없어도 잘살고 있는 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왜 없어요.”
때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강준이 돌아섰다.
저녁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긋한 냄새, 흩날리는 부드러운 머리칼, 눈에 박힐 만큼 작고 섬세한 얼굴과 여리여리한 실루엣.
“저기 있잖아요.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
늦을 거라더니.
강준과 눈이 마주치자 곱게 눈을 접으며 예쁘게도 웃어 보였다.
옆에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섭게 만들고.
옆에 있으면 너무 좋고 행복해서 미치게 만드는.
목숨보다 소중하고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주세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