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부부의 밤.
(107/110)
107. 부부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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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부부의 밤.
2022.04.10.
새벽 2시 40분, 병원에 도착했다.
세희를 진찰한 담당 의사가 당장 애가 나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양수는 터졌는데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다나 어쨌다나.
결론은 자궁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무통 주사도 놓아줄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입원을 했고 세희는 침대에서 진통을 참아내며 끙끙거렸다.
강준으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주세희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건.
이날을 위해서 수백 번도 넘게 가상 시뮬레이션을 했었다. 진통이 왔을 때, 양수가 터졌을 때,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선택해야 할 때까지.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 상황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어야 세희가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까.
계획적인 계략남이라고 했던 세희의 말을 인정,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내에게 해줄 것도 없고 해줄 수도 없는 이 무기력한 상황 앞에서, 계획적인 계략냠도 소용없었다.
뭐든 움켜잡으려는 손을 잡아주고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고 부풀어 오른 배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지금 강준이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 순간에도 걱정시키기 싫었는지, 진통이 잠시 멈춘 사이 세희는 강준에게 웃어 보였다.
“와, 엄마 되기 너무 힘들어요.”
애써 짓는 연약한 그 미소가 부서질 것만 같은 것도 모르고.
나처럼 너도 처음일 텐데. 왜 또 괜찮은 척하는 건지, 날 배려하는 건지.
세희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강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내가 미안해요, 혼자 감당하게 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후회되었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아파할 줄 알았다면, 유달리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웠던 그 밤, 아기를 선물해달라는 주세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11시간의 진통 끝에 세희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분만실 앞에 앉은 강준은 숨을 죽였다.
호들갑을 떨던 서 회장과 연숙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분만실 안에서 세희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강준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기절할 만큼 조 여사에게 맞을 때도 신음소리 한 번 안 내던 독한 아내가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무통 주사 맞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중하지만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강준에게 간호사가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모님마다 달라요. 무통이 잘 먹히는 분도 있고 아예 안 먹히는 분도 있구요.”
그때 또다시 분만실 문을 뚫고 고통에 찬 세희의 비명이 들려왔다.
세희의 그 비명소리가 강준에겐 나 좀 살려주라는 SOS 신호처럼 들렸다.
계획적인 계략남이고 나발이고.
……빌어먹을.
머릿속이 하얘지고 이성마저 사라진 강준이 분만실 안으로 뛰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강준의 앞을 막은 건 연숙이었다.
“괜히 엄마가 위대하고 출산이 위대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차분히 기다려주자.”
“그러다 세희 잘못되면 어떡하라고요.”
늘 침착했던 아들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겁먹은 아들의 표정에 연숙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너 그렇게 낳았다. 다른 엄마들도 그렇고.”
그래도 아들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연숙이 말을 이었다.
“그래, 의사도 아닌 니가 들어가면 뭘 어쩔 거니? 데리고 나오기라도 할 거니? 아니면, 애 낳지 말라고 할 거니?”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해요. 그래야 세희가 덜 무서워하고 안심할 겁니다.”
여전한 강준의 고집에 연숙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원실에서 세희가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분만실은 강준이 못 들어오게 해달라고.
제 아내에 관련된 일에선 작은 것도 유난을 떠는 아들이 이럴 줄 알아서였겠지.
“아들, 니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출산은 아름답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절대 그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길 꺼린단다. 특히 세희 같은 성격은 더더욱.”
세상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 이 말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니 이해하려고는 하지 말렴. 강준이 니가 지금 할 일은 세희를 믿고 기다려주는 일이야. 옆에 있어주지 못한 만큼 그 힘듦을 알아주면 되는 거고.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말고 세희에게 평생 잘하면 돼. 알겠니?”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지만,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강준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두 손을 맞잡은 채 처음으로 기도란 걸 해보았다.
아내가 무사히 출산하기를. 아내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기를.
***
자궁문이 열리기까지 11시간, 출산하는 데 1시간.
세희는 꼬박 12시간 만에 프레를 낳았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게 무슨 의민지 알게 되었고, 목이 쉴 만큼 소리 지르고 울부짖기까지 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찾은 적 없던 엄마까지 수도 없이 불렀던 것 같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고통의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던 그 순간.
마침내 고통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난생처음 겪어본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세희는 미소 지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핏덩이 아기가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쓴 탓에 입술을 달싹일 힘조차 없었다.
“산모님, 아주 건강하고 잘생긴 남자 아이예요.”
의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없이 감은 눈꼬리 끝으로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세희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눈을 뜨자 넓고 쾌적한 병실이었다.
손등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고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자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작은 손을 꼭 잡고 있는 커다란 손도.
“강준 씨, 프레는요?”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푹 숙이고 있다가 세희의 부름에 고개를 든 강준이 빤히 바라보았다.
“프레는 잘 있겠지.”
너무도 무성의한 대답에 세희는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아빠가 왜 그렇게 말해요.”
서운했다. 내가 정말 눈앞에 별까지 보면서 낳은 우리 아인데.
서운함에 강준을 빤히 바라보던 세희는 뒤늦게 보았다.
운 것처럼 붉어져 있는 강준의 눈을.
믿고 싶지 않지만 무수히 많은 감정을 폭풍처럼 쏟아내는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고통에 찬 자신의 울부짖음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 강준의 심정을.
그 눈으로 강준은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몸은 괜찮은데, 나 눈앞에서 별 봤어요. 그렇게 크고 많은 별은 처음 본 것 같아. 왜 출산한 여자들이 수박을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도 알 것 같구요.”
배시시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해보지만, 강준은 웃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손을 뻗어 각질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생채기가 난 입술을 쓸었다.
“입술이 다 터졌네, 속상하게.”
강준은 다른 말을 했다.
오로지 자신이 보고 듣는 걸로 판단하겠다는 것처럼.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고 싶지 않겠지.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한은.
아무래도 오늘은 멀쩡한 척하지 말고 어리광을 잔뜩 부려줘야 할 것 같다.
이 남잘 되돌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나 좀 안아줘요, 강준 씨.”
그제야 고개를 든 강준이 눈을 맞춰 왔다.
지독할 만큼 저밖에 모르는 남편의 눈을 보며 세희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 죽는 줄 알았다구요. 강준 씨도 못 보고 우리 프레도 못 보고 죽을까 봐.”
말없이 바라보던 강준이 세희를 와락 품에 안았다.
세상 듬직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강준의 품 안에서 세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 무서웠다.
다신 당신을 못 볼까 봐. 이 품에 안기지 못할까 봐.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강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신 나한테 그런 선물 바라지 말아요. 아무리 예쁘게 유혹해도 안 넘어가줄 거니까.”
세희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커다란 체구가 전해오는 가느다란 떨림에 세희는 강준을 꼭 안아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둘째 계획은 단단히 토라진 이 남자 먼저 달래놓은 후에 꺼내야겠다고.
***
프레가 태어나자마자 서 회장은 본가로 한신그룹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친인척들을 불러모아 선포했다.
‘우리 영준이가 건장하게 잘 자라도록 모두 빌어야 할 게다. 그래야 네놈들에게 부스러기라도 떨어질 테니 말이다.’
강준이 태어났을 때도 했던, 늘 그렇듯 서회장의 냉철하면서도 확실한 방식이었다.
권력의 구도는 굵은 가지 몇 개도 필요 없이 오로지 기둥 하나면 된다는. 적통 후계자가 아니면 한신그룹을 죄다 전문 경영인에게 넘겨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강준과 세희는 약속한 대로 서 회장의 본가에 있는 별채를 리모델링해서 신혼집으로 꾸몄다.
연숙이 영준을 도맡아서 키워주었고 강준과 세희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최대한 칼퇴근하려고 했고, 저녁 식사만은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하려고 했다.
세희가 들어옴으로써, 영준이 태어남으로써, 늘 적막하고 고요했던 한신가가 이젠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와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행복한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영준을 위해 진학 전문가가 집으로 초빙되기 전까진.
드디어 올 게 온 것이다.
국내 톱이라는 진학 전문가는 국내 플랜부터 해외 유학 플랜, 복합 플랜, 총 세 가지 플랜을 짜왔다.
서 회장과 연숙은 당연한 절차를 밟는 거라지만, 세희는 그 절차가 싫었다.
그 밤 세희는 강준의 품에 안겨 먼저 의견을 말했다.
“난 영준이가 한신의 후계자가 아니라 주세희와 서강준의 아들로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강준 씨는요?”
“남자는 평범해선 안 돼요. 완벽하게 뛰어나야 어떤 상황에도 자기 여자는 거뜬히 지켜내지.”
단호한 대답에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당신 완벽하고 뛰어난 거 아는데. 근데 우리 영준이가 당신이 아닌 날 닮아서 조용하고 평범한 애면요. 그 과정이 힘들고 버거우면 어떻게 해요.
이럴 때면 세희는 생각이 깊어진다. 아들을 위한 최선이 뭔지 모르겠어서.
단 몇 개월 만에 느낀 건 육아에 답은 없다는 거다.
그런 세희를 빤히 주시하던 강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이고. 영준이에 관한 건 세희 씨 원하는 대로 해요. 그게 뭐든,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나이가 될 때까지는.”
강준은 훌륭한 아빠지만 그만큼 엄한 아빠였다.
세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 아빠와 아들이 단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늘 가졌다.
영준을 안아주고 잘 놀아주지만 잘못한 부분에선 단호했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넘어지면 달려가서 안아주는 대신 스스로 손을 털고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이래서 딸을 낳아야 하나 생각을 날마다 수도 없이 할 만큼.
세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낸 후 밤 10시부터는 오롯이 부부만의 시간이고 부부의 밤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영준도 절대 끼어들지 못했다.
열이 나거나 아픈 게 아니라면, 아이가 엄마를 찾는다고 아무리 울어도 강준은 봐주지 않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리틀 서강준과 주세희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나 뭐라나.
괜히 서운한 마음에 세희가 토라진 듯 물었다.
“혹시 영준이한테 애정이 많이 없어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건 아니구요?”
사실 세희도 알면서 묻는 거였고, 역시나 강준도 재미없는 질문을 받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우리 아들인데 내가 왜 애정이 많이 없어요. 상대에 따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그래도 세희가 표정을 풀지 않자 진지한 표정으로 강준이 말을 이었다.
“임신하고 입덧하고 진통하고 출산하고, 세희 씨 혼자 다 했어요. 당신이 영준이 최대 주주고 그러니 당연히 엄마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은 것뿐이고.”
이래도 서운해요?
웃음기 어린 다정한 눈으로 물으며 어느새 강준이 세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에겐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섞어주고, 아내는…….”
이 시간이면 변함없이 열기를 품은 검은 눈동자로.
“늘 뜨거운 사랑으로 보답해야지.”
집어삼키고 싶어 죽겠다는 것처럼.
혼인신고도 했고,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았고.
이젠 세희를 향한 사랑이 식을 법도 한데, 어떻게 된 게 강준은 더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강준은 늘 세희와 함께였다.
업무 스케줄 장소마저도 세희와 가까운 곳이면 어떻게든 겹치게 하거나 들러서 얼굴을 보고 갔다.
때론 몇십 분을 함께 있었고, 때론 고작 50미터 거리에서 눈인사만 주고받더라도.
그리고 하루 종일 참았던 강준의 욕망은 야심한 밤에 폭발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침대에 둘만 있게 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야심한 밤, 침대, 둘만의 시간, 드디어 부부의 밤이 흐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술을 인두 삼아 세희의 입술부터 낙인을 찍기 시작한 강준의 목을 가느다란 팔이 휘감았다.
더, 더 뜨겁게 안아줘요.
세희가 손짓으로 보내는 대담한 신호를 받은 강준이 기다렸다는 듯 폭발했다.
이 밤, 아내가 치밀하게 세운 계략은 꿈에도 눈치 못 챈 채.
세희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떻게든 오늘은 유혹에 성공하고 말겠다고.
이 남자의 이성을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인생 최고의 두 번째 선물, 리틀 주세희를 갖기 위해서라면.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