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
(10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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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
2022.04.07.
강준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세희는 연숙에게 직접 말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충분히 이해해주실 분이라는 믿음도 있지만, 딸처럼 예뻐해 주는 연숙을 상대로 강준의 뒤에 숨긴 싫었다.
꽃을 좋아하는 연숙의 취향을 고려해 플라워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임신 초기에 속을 울렁거리게 했던 꽃 향이 지금은 향기롭게 코끝에 휘감긴다.
편한 마음으로 꽃들을 눈에 담으며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따알!”
익숙한 음성에 세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순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모습과 미소를 머금은 연숙이 보였다.
“바쁜 애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어머니가 늘 일찍 오시니까요.”
세희가 웃으면서 한 말에 연숙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맞은 편에 앉았다.
“나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그러지. 그리고 우리 딸이 너무 보고 싶기도 하고.”
이젠 자연스럽게 세희를 딸이라고 부르는 연숙을 강준은 무척 못마땅해했다.
왜 며느리를 딸로 부르냐고 대놓고 불만을 토해내는 강준에게 연숙도 지지 않고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딸 같은 며느리라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그리고 딸 같은 며느리를 줄여서 딸이라 부르는데 니 놈이 무슨 상관이냐고.
어머니가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다고 웃는 세희 때문에 강준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하지만 강준은 지금도 여전히 투덜거렸다. 4개월 후 태어날 아들도 모자라 어머니와도 주세희 쟁탈전을 내가 해야겠냐고.
물론 강준이 서운해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육아용품 장만하랴, 결혼 준비하랴, 강준보다 연숙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세희는 싫긴커녕 마냥 좋았다.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았던 엄마의 따뜻함을 연숙을 통해 알 것 같아서.
향긋한 차가 두 사람 앞에 놓이자 연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보낸 거 봤지? 넌 뭐가 마음에 드니?”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따스한 차로 입안을 적신 세희는 차분한 눈빛으로 연숙을 보았다.
“어머니께 제가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어머, 얘는! 결혼 무르겠다는 소리만 아니면 넌 나한테 미안해할 일 하나도 없다?”
연숙의 밝은 표정은 뭐든 어려워하지 말고 말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희는 편한 마음으로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다.
재벌 중의 재벌인 한신가의 스케일을, 정확히는 평소 소박한 연숙의 실제 스케일을 간과한 일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연숙의 뜻대로 결혼식을 올리려는 마음만은 변함없었다는 것을.
“강준 씨 덕분에 절 향한 마녀사냥은 멈추었고, 욕하는 사람보다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전 아직도 핫이슈고 지금 이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면 한신가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 같아요. 저도 좀 버거울 것 같구요.”
세희가 어렵게 하는 말들을 연숙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고 있었다.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강준 덕분에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내 안엔 겁쟁이 주세희가 남아 있었다고. 제 과거 때문에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하다고.
차라리 서운함을 드러내면 마음이라도 덜 무거울 텐데.
이번에도 연숙은 다시 한번 세희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우리 세희 혼자 마음고생 많았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엄마 속상하게 살까지 빠졌어?”
연숙은 조용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꼭 모으고 있는 세희의 손을 감싸고 다독여주었다.
“하필 기사가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터져서는. 그치?”
연숙이 부드럽게 바라보자 세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렇게 마음이 여린 아이가 오랜 세월을 어떻게 독기로 버텨온 건지. 새삼 신기하면서도 안쓰러운 연숙이었다.
듣고 보니 세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재벌가의 막장 러브스토리는 핫이슈였다.
이 상황에서 결혼식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성대하게 치르면 강준이 역전시켜놓은 여론의 방향이 다시 뒤집힐 수 있었다. 그 타격은 고스란히 세희에게 갈 테고.
이제 좀 살이 올라서 보기 좋다 싶었는데, 다시 핼쑥해진 얼굴을 보니 느껴진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혼자 하고 고민했을지.
프레를 가져서 몸도 힘들 텐데, 마음고생까지 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픈 연숙이다.
어떻게 얻은 귀한 며느리고 귀한 손자인데. 또 귀한 손주들을 더 낳아주겠다고 예쁜 말만 골라 하는 딸 같은 며느리인데.
“그럼 결혼식은 비공개로 간소하게 하자꾸나. 하객들은 이백 명 안으로 추리고.”
너무 쿨한 연숙의 대답에 오히려 놀란 건 세희였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건 뭔데.”
세희가 조심히 묻자 연숙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니 딸 같은 며느리 자랑은 약속 잡아서 옆에 딱 앉혀놓고 해야 제맛이지.”
중얼거리듯 말한 연숙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식 장소는 스몰웨딩으로 유명한 펠리스 호텔 야외 세비지……아.”
그런데 연숙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펠리스 호텔 세비지 가든은 세희가 유태령의 이름으로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기에.
“전 괜찮아요, 어머니. 아니, 거기서 하고 싶어요.”
서강준을 처음 보았고, 서강준과 처음부터 꼬였던 그 장소, 그럼에도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던 결혼식과 신랑.
세희는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엄마가 알아볼게. 그나저나 신혼집은 어디가 좋을지 생각해 봤니?”
“어머니만 괜찮으시면 본가 별채를 저희에게 내주시면 안 될까요?”
연숙이 당장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세희는 조곤조곤 말을 했다.
“전 아이 낳은 후에도 계속 일을 하고 싶고 그러려면 어머니 도움이 필요해요. 베이비 시터보다는 어머니가 프레를 키워주셨으면 하구요.”
언뜻 스치는 말로 연숙이 몇 번씩 했던 말을 세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기 같지 않은 아들내미 덕에 육아의 힘듦과 뿌듯함과 재미를 자기만 모른다고. 그래서 손주만큼은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키우면 안 되겠냐고.
“제가 외롭게 자라서 프레만큼은 북적거리는 가정에서 키우고 싶어요. 물론 할아버님과 어머니만 괜찮으시다면요.”
“안 괜찮을 리가 있겠니? 당연히 환영이지!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들어오겠다는데 누가 싫다고 해? 아버님도 그깟 그림들 다 창고에 처박으실걸? 잠깐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리모델링 업체 먼저 알아봐야겠어!”
리모델링이 빨리 되어야 아들과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걸 연숙은 파악한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연숙을 보며 세희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
펠리스 호텔의 세비지 가든.
신부대기실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신부는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세상에, 너무 예쁘세요. 배 나온 것도 전혀 티 안 나요.”
헬퍼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칭찬할 만했다.
허리라인이 짧은 디자인 덕분에, 시선을 상체로 끌어올리는 빛을 뿌린 것처럼 눈부신 디테일 때문에, 우아한 목선과 가녀린 어깨라인 때문에.
풍성하고 화려한 벨라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희는 6개월 차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은 소박해도 웨딩드레스만은 화려해야 한다는 연숙의 고집 때문이었다.
헬퍼가 단정하게 틀어 묶은 머리 위로 면사포를 씌우려는 순간, 세희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면사포는 벗겨주세요.”
“그럼 티아라만 올려드릴까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희의 머리 위로 눈부신 티아라가 올려졌다.
그때 호텔 관계자가 들어와 말했다.
“신부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긴 속눈썹 너머로 입구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드레스 자락을 꼭 잡고 일어난 세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4년 전,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기에 그저 두렵고 무서웠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되돌리고 싶지도 않고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이 길이 내 길이고, 이 길 끝엔 그가 있을 테니까.
당당하게 발을 내딛는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는 바로 주세희였다.
***
4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결혼식이다.
푸르른 산과 탁 트인 한강뷰, 높고 푸르른 가을 하늘, 완벽한 철통 보안, 비공개 결혼식. 애초에 200명에서 100명으로 줄어든 하객, 신랑이 위험할 만큼 잘생긴 한신의 후계자 서강준인 것도.
달라진 건 신부뿐.
이젠 면사포에 얼굴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사랑을 가득 담아 신랑을 바라봐도 된다. 눈시울을 적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도 되고.
남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올리는, 가짜 신부가 아닌 진짜 신부가 되어 올리는 결혼식이니까.
“결혼 축하해. 그리고 꼭 행복해야 해, 주세희.”
약속대로 세희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 강준에게 데려간 건 진우였다.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세희는 강준이 내민 손을 꼭 잡았다.
차가워진 손끝을 따스한 손이 감싸오면서 온기를 전해왔다.
4년 전 그때처럼, 강준은 천천히 세희에게 얼굴을 내렸다.
“고마워, 주세희.”
차가웠던 눈빛은 다정하고, 싸늘했던 음성은 부드럽다.
“내 아내가 되어주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줘서.”
귓가로 번지는 강준의 속삭임이 눈물이 날 것처럼 달콤했다.
울면 안 되는데. 그런데 의지와는 다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고 있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질끈 깨물자 강준이 낮게 속삭여왔다.
“울어도 되는 날이고, 울어도 예쁘니까 울어요.”
내 앞에선 뭐든 참지 마. 부드럽게 덧붙인 강준의 그 말에 세희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재치 있는 경진의 사회 덕분에 그 눈물은 몇 초 만에 쏘옥 들어가 버렸지만.
“이를 어쩌나요. 신랑이 결혼식도 시작하기 전에 신부를 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신랑이 발바닥 몇 대 맞고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어머니, 할아버님, 괜찮겠습니까?”
연숙과 서 회장 대신 미자가 예쁨받는 손녀사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 손녀사위 때리기만 해보라고.
한바탕 웃음이 터진 후 진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서 회장의 지인이 봐준 주례는 심플하며 짧았고 경진이 본 사회는 웃음이 계속 터질 만큼 유쾌했다.
세희가 던진 부케는 푸르른 하늘 높이 날아올라 진경의 품에 떨어졌다.
결혼식이 끝난 후, 눈부신 비주얼을 자랑하는 신랑 신부 머리 위로 향기로운 꽃잎이 흩뿌려졌다.
죽을 때까지 기억에 영원히 남을, 아름답고 행복하고 유쾌한 결혼식이 그렇게 끝이 났다.
강준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세희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좀 걸을래요?”
강준의 손을 잡고 세희는 사락거리는 잔디밭을 걸었다.
예전에 이 잔디밭을 걸을 땐 차갑게 외면하듯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보안요원까지 보이지 않는 장소에 도착하자 강준은 기다렸다는 듯 세희를 품에 당겨 안았다.
가만히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맞추고, 강준이 부드럽게 속삭여왔다.
“우리 진짜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됐어요.”
그러게요. 세희는 수줍게 강준을 올려다보며 예쁜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강준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세희의 눈빛과 미소였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오늘 내내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듯 말한 강준은 푸르른 하늘 아래서, 파릇한 잔디 위에서, 세희에게 깊고 농밀한 키스를 퍼부었다.
시작은 4년만 버티면 끝날 결혼이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4년 만에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분노가 사랑이 되어, 불행이 행복이 되어, 끊어야 했던 부부 사이가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되어서.
***
4개월 후.
깊은 잠이 든 강준의 어깨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자 허리를 세우고 옆에 앉아 있는 세희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강준은 세희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중얼거리듯 횡설수설한 세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무심코 같이 시선을 내리자 젖어 있는 시트가 보였다.
주세희가 실수했을 린 없고.
완독했던 육아서적의 내용을 빠르게 떠올린 강준은 우선 놀랐을 아내를 품에 안았다.
세희가 불안해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만삭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가녀린 등을 쓸어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양수가 터진 것 같으니 우선 병원부터 가요, 다 잘될 거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 믿죠?”
강준의 품 안에서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해진 표정을 보고 나서야 강준은 핸드폰을 들어 침착하게 전화를 돌렸다.
먼저 병원에, 그리고 서 회장과 연숙에게.
나갈 채비를 마친 순간, 집 안으로 서 회장과 연숙이 들이닥쳤다.
“세희야!”
“아가!”
출산을 처음 접해본 강준과 세희는 침착했지만 정작 경험 있는 두 사람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귀하게 들인 며느리와 귀하게 생긴 손주가 어떻게 될까 온갖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집에서부터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입원실에서 분만실로 들어갈 때까지.
참 요란한 출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