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계획적인 계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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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계획적인 계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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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계획적인 계략남.
2022.03.31.
세희의 말에 강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주세희 씨. 아직 하루도 안 지났습니다만?”
하루도 안 지났으면 뭐 어때. 반나절도 안 돼서 상황은 이미 정리되었는데. 내일은 더 완벽하게 정리되었을 테고.
내가 아는 서강준 당신은 원래 그런 남자잖아. 철두철미한 속전속결.
“꼭 하루를 기다려야 해요?”
“내가 계획적인 걸 좋아하는 편이라.”
그 소원도 계획의 일부라는 의미였다.
“계획이 아니라 계략이겠죠.”
중얼거리듯 세희가 한 말에 강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왕이면 듣기 좋게 계획적이라고 해줘요.”
“그럼 계획적이고 계략적인 남자라고 할래요.”
세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작정하고 다가온 순간부터 기어이 점령당하고만 그 순간까지.
순차적으로 차곡차곡 단계를 밟으며 계획적으로 조여오는 이 남자의 치밀한 계략에 속절없이 빠져버렸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거절해.
“인정. 내가 좀 많이 계획적이고 계략적이긴 해요.”
피식 웃으면서 세희의 허리를 조심히 당겨 안은 강준이 귓가에 은밀히 속삭여왔다.
“물론 주세희를 만나기 전까지.”
“거짓말. 나도 계획적으로 공략했으면서.”
그러자 강준은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마음고생 한 것 좀 알아주라는 것처럼.
“그럴 리가. 내가 주세희 때문에 작전 변경에 작전상 후퇴까지 몇 번을 했는데.”
마음고생한 건 딱히 모르겠지만, 강준의 인내심과 참을성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그 인내심과 참을성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
계획적이고 계략적인 데다 인내심과 참을성까지 갖춘 남자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세희는 연하게 웃으면서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앞으론 작전 변경하지도 말고 후퇴하지도 말아요. 지금부턴 내가 다 당신에게 맞출 테니까.”
입술을 맞댄 채 달콤한 고백을 한 후 강준에게 짧고 강렬한 입맞춤을 했다.
쪼옥-.
기습 입맞춤에 조금 놀란 듯 커진 눈도 잠시뿐.
강준은 기다렸다는 듯, 세희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주인을 잃은 접시 위의 망고 셔벗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
초인종이 울렸다.
강준 대신 세희가 일어나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알리샤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TV 속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반전미가 있는 커플이었다.
노출이 과한 원피스에 짙은 화장을 한 알리샤와 체크 셔츠를 목까지 정갈하게 잠근 대학생 같은 남자라니.
그런데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와, 너 배 좀 나왔다?”
부드럽게 핏되는 원피스를 입은 덕에 귀엽게 봉긋 솟은 세희의 배를 본 알리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5개월 넘었으니까.”
부드러운 손길로 배를 감싸는 세희를 잠시 바라보던 알리샤는 세희의 어깨너머를 살피며 툭, 말을 다시 내뱉었다.
“그나저나 왜 피곤하게 사람을 오라 가라야. 사람 뺑뺑이 돌렸으면 푹 쉬게 해줘야지. 니 애인은 눈치가 있니, 없니?”
강준이 눈앞에 있으면 찍 소리도 못 할 거면서 우선 지르고 보는 알리샤였다.
여전히 변함없는 성격에 세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눈치 없는 내 애인은 거실에 있어요.”
“니가 보고 싶어서 우리 불렀다며? 그럼 피차 불편한 사이끼리 껄끄럽지 않게 니 애인은 좀 내보……웁!”
“안녕하세요. 형수님.”
버둥거리는 알리샤를 품으로 끌어당긴 남자는 외모처럼 목소리까지 반듯했다.
“반가워요, 경수 씨.”
“렉스라고 불러주세요.”
다시 봐도 참 유순하고 순박하다. 서강준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세희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게 이 만남이 불편하단 거 알아요. 근데 정말 궁금했거든요. 강준 씨가 아꼈던 동생이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세희가 말끝을 흐리자 다음 말이 궁금하다는 듯 렉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처럼, 사촌이라서 그런지 그 얼굴이 살짝 강준과 닮아 보인다.
“고맙다는 말도 직접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서강준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세희의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렉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제가 더 형수님께 감사해요. 알리샤도 도와주고 노총각으로 살다 죽었을 세상 까칠한 본부장님까지 이렇게 구제해주셔서. 그리고 이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렉스가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알리샤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거예요.”
“고마워요.”
아기용품이 분명한 쇼핑백을 세희가 받자 렉스의 품에서 알리샤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주세희, 제발 딸이라고 해줄래?”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세희는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들이야.”
“리틀 서강준이라고? 말도 안 돼!”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것 같은 표정으로 오버하는 알리샤를 렉스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맹목적일 만큼 다정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은 강준이 자신을 볼 때와 비슷했다. 서 씨 남자들이 하는 사랑도 어쩌면 유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여간 뭘 해도 유별나다니까.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나쁘지 않은 첫만남이었다. 유별난 알리샤도, 사람 좋아 보이는 렉스도, 그리고 두 사람을 상대하는 자신도.
예전과 달리 계산적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서강준으로 인해 달라졌고 서강준을 통해 살게 된 삶으로 인해.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세희는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
현관에서 꽤 긴 시간을 소비했음에도 여전히 강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강준 씨.”
세희가 부르자 강준이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
대답 대신 짙고 새까만 눈동자가 두 사람에게 닿는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나쁘지 않은 첫만남이라는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세희가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준을 원래 싫어한 데다 이번에 제대로 이용당한 알리샤의 눈빛이 표독스럽다.
누구보다 강준에 대해 잘 아는 허경수는 지은 죄가 있기에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반면 강준은 깊은 바다처럼 지독히도 고요한 모습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거실에 있는 네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폭풍전야임을.
소파에서 강준이 슬로우 모션처럼 일어났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 입안이 타들어 갈 만큼 풍기는 분위기가 위압적이었다.
놀랄 것 없는 세희와 달리 노려보던 알리샤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렉스도 어지간히 무서웠는지 움찔했지만 다행히 자리는 지키고 있었다.
긴 다리로 단 몇 걸음 만에 강준은 알리샤 커플 앞에 멈추어 섰다.
뭔가를 하기 전 강준이 가만히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무언의 허락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세희가 마음대로 하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자 강준은 바로 렉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따라와.”
강준에게 힘 하나 쓰지 못하고 렉스는 테라스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화들짝 놀라 그 뒤를 쫓으려는 알리샤를 세희가 잡았다.
“이거 안 놔?”
알리샤의 얼굴이 험악하지만 세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우리가 끼어들 일 아니에요.”
“니 남자 맞을 일 절대 없다고 그렇게 편하겠지. 근데 난 아니거든? 저 짐승 같은 놈이 우리 렉스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물론 강준 씨가 무슨 짓을 하긴 하겠죠. 근데 몇 대 맞는 거 말고 더 있겠어요? 동생이 잘못한 게 있으면 형이 혼내주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게 형제 사이니까.”
형제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사촌이지만.
“……뭐?”
“강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 언니도 알잖아요. 작정했으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상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릴 사람이에요. 근데 강준 씨가 직접 주먹다짐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요.”
이해가 안 가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알리샤에게 세희는 나긋나긋 속삭여주었다.
“화해하겠다는 거잖아요.”
찐한 우정을 나눈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어찌 되었든 세희로선 강준이 렉스를 정말 친동생처럼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적당히 주먹다짐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들어올 거예요. 그동안 우린 차 마시고 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강준 씨는 무척 이성적인 남자라서 적당히 조절 잘할 거니까.”
그때 테라스 너머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놀라서 흠칫한 알리샤와 다르게 세희만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야! 넌 저 소리를 듣고도 네 애인이 이성적이라는 말이 나오니!?”
“난 강준 씨를 믿어요.”
세희는 강준을 안다. 악몽과도 같았던 그 순간조차 지독할 만큼 이성을 잃지 않았던 그 남자를.
그런 남자가 고작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두를 리가 없었다.
적당히 몇 대 때려주고 훈계하고 아무 일 없는 듯 데리고 들어온다에 세희는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나는 서강준 안 믿거든?”
“강준 씨랑 화해해야 렉스도 든든한 형을 얻죠.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편이자 핏줄.”
언니랑 나처럼. 작게 덧붙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알리샤의 손을 세희는 웃으면서 잡아끌었다.
테라스에서 눈을 못 떼면서도 알리샤는 마지못한 척 끌려와 주었다.
그리고 세희의 예상은 적중했다.
따스한 찻물이 식고 반쯤 잔을 비웠을 때쯤, 두 남자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준은 처음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렉스는 양쪽 코에 휴지를 꽂은 채로.
“세상에, 렉스!”
요란스럽게 달려간 알리샤가 엉망진창인 렉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세희는 잔잔히 웃으면서 태연하게 옆에 앉은 강준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동생이랑 화해 잘했어요, 칭찬해주려는 것처럼.
잠시 요란하긴 했지만 무탈한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
이 집을 나갈 때까지 알리샤는 여전히 강준에게 발톱을 세우며 갸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물론 그런 고양이에게 반응할 강준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알리샤는 적수가 안 되고, 렉스는 남자들만의 방식으로 적당히 응어리를 풀었고.
그 후 강준은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시큰둥하고 담담했다. 두 사람은 애초에 이 자리에 없다는 것처럼, 오로지 세희에게만 집중했다.
아내 바보 예약. 그렇게 알리샤는 대담하게 놀려댔지만 여전히 강준은 무반응이었다.
원래 그런 남자였다. 뭐든 시큰둥하고 담담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고.
렉스는 세희의 예상대로 재밌고 따뜻한 남자였다.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 고슴도치 같은 알리샤를 잘도 케어했다.
어찌 되었든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다음을 기약하며 알리샤 커플은 집을 나섰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된 시간.
전화를 받는 강준을 뒤로하고 테라스로 먼저 나온 세희는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게 너무 무탈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나는 세희였다. 이렇게 내가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꿈인가 싶고 현실감을 종종 잃을 만큼.
강준과 함께 있으면 세희는 문득 자신이 여전히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만큼 강준의 배경과 재력, 그리고 빈틈없는 완벽함이 버거웠었다. 그래서 참 많이 망설이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 남자로 인해 행복을 알게 되었고 웃음을 찾았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게 되었으니까.
그때 강준이 테라스로 나왔다.
세희는 웃음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눈으로 강준을 보았다.
이 모든 게 당신 때문이야. 그래서 당신에게 고맙고 사랑해.
세희가 눈빛에서 쏟아내는 무한한 사랑에 옆에 털썩 앉은 강준이 가늘게 눈을 떴다.
“왜 그렇게 날 애틋하게 바라보실까.”
“그냥 고마워서요. 당신을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란 생각도 들구요.”
입덧은 가라앉았고, 답답했던 상황은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프레에게 이모와 이모부도 생겼고.
이 모든 게 강준의 세심한 배려임을 안다. 가슴 안에 꼭꼭 숨겨둔 좁쌀만 한 크기의 불안함마저 모른 척하지 않고 말끔하게 없애버린.
이제 남은 건 결혼식을 올리고 프레를 낳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
“주세희에게 프레는 선물이고 나는 행운이고?”
강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하자 세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나랑 결혼해줄래요?”
세희는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이 남자에게 결혼에 대해 흐지부지 대답한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강준 씨한테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내 설득에 마지못해 넘어온 거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집요한 설득에 넘어간 건 인정.
하지만 결국은 사랑이라서 하겠다고 한 결혼이었다.
그런데 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희에게 강준이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그래서 지금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는 중이고.”
화려한 이벤트도, 값비싼 반지도, 무릎 꿇은 백마 탄 왕자님도 없었다.
그저 결혼해달라는 말 한마디뿐인 담백하고 소박한 프러포즈였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늘 화려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남자가 왜 프러포즈만큼은 담백하게 하는지.
가감 없이 날아든 한마디 진실은 허리케인처럼 세희의 심장을 강타했다.
“나와 결혼해줘, 주세희.”
그 진실을 강준이 다시 입에 담는 순간 세희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강준은 프러포즈마저 계획적인 계략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