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서강준 씨 당신 소원.2022.03.27.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단상 앞에 서 있는 알리샤는 선글라스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그건 곧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뚜렷한 의도. 두 사람은 TV 속 화면에 집중했다.
[저는 이노그룹의 장녀이자 이노패션 전대표 유태령입니다. 저를 대신해서 희생해준 이복동생이 마녀사냥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독일에서 오늘 오전 급히 입국했습니다.]
알리샤가 운을 떼는 순간 기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복동생에게 남편도 빼앗기고 회사도 빼앗기고 처참하게 독일로 쫓겨난 거 아니었냐고. 그 질문에 알리샤가 가소롭다는 듯 비소를 날렸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내가 뭘 빼앗기고 어디로 쫓겨날 사람처럼 보이나요?]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알리샤의 의도가 정확히 기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빼앗긴 게 아니라 남편도 회사도 다 스스로 넘기고 독일로 제 발로 떠난 거라고. 그걸 증명하듯 알리샤의 외모는 화려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둘렀다. 무엇보다 당당하고 오만했으며 행복해 보였다.
[위암에 걸린 딸조차 물건 취급하며 계약 결혼에 팔아넘긴 건 제 어머니인 조영희이고 아버지인 조영국은 그런 딸을 외면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절 구해준 건 이복동생인 주세희였습니다.]
알리샤의 선언에 고요했던 공간이 일렁거린다. 누군가는 사진을 계속 찍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두드리느라 바빴다.
[전 한신 후계자와 맞선에서 얼굴을 한 번 본 게 전부입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지내고 아내와 며느리 역할을 한 건 동생입니다. 이미 전 독일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걸 부모님께 고백하자 병원비까지 끊겠다고 협박했고 퇴원 후에는 감시하에 통제된 생활을 했습니다.]
감정에 북받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알리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동생은 부모님에게 갖은 무시와 폭행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주었고 이노패션도 잘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독일로 떠나도록 도와주고 넉넉한 자금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걸 안 어머니가 이노패션 주주총회 때 제게 손찌검하려는 걸 동생이 임신한 몸으로 막아주었습니다. 제 말을 증빙할 자료 및 영상은 추후 공개하겠습니다.]
반은 진실, 반은 거짓. 그것들을 적절히 섞어 증거 자료까지 내밀겠다는데 누가 감히 의심할까.
[처음엔 이복동생이 싫었지만 아픈 절 걱정해주고 마지막까지 제 행복을 바란 건 세희가 유일했습니다. 병원 기록도 제출하겠지만 절 문병 오고 말벗해준 것도 세희뿐이었으니까요.]
흠 하나 잡을 수 없이 치밀한 레퍼토리. 하나부터 열까지 강준이 진두지휘했을 것이다. 세희는 웃음을 참고 강준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강준 씨 계획이 나 대신 알리샤 언닐 방패로 세우는 거였어요?”
“뭐 어때요. 어차피 한국에 살 것도 아니니 이미지가 시궁창에 처박히든 말든 상관없을 사람인데.”
세희의 침묵에 강준이 눈썹을 치켜떴다.
“혹시라도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갖지 말아요. 우리를 만나게 해준 건 고맙지만 그건 그거고. 그 사람들이 세희 씨에게 한 짓은 괘씸하고 벌 받을 짓이니까.”
세희에겐 늘 다정했던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단호하다. 죄책감 따윈 조금도 느끼지 말라는 것처럼.
“알리샤도 예외는 아니에요. 날 농락했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세희 씨 때문에 참은 거예요. 그러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저 정도 방패 해주고 내가 용서해주겠다는데.”
세희는 문득 공항에서 재회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참 무섭고 어렵고 버거워서, 같이 있는 일 분 일 초가 숨 막혔던 서강준이란 남자가. 그런 남자가 이젠 옆에 없으면 안 될 남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사랑이었고 그래서 전부가 되어버렸고. 그런 당신을 내가 미워하거나 원망할 날이 오긴 할까. 세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래도 귀띔은 해주지 그랬어요.”
“서프라이즈 이벤트 해주고 싶어서.”
“그 이벤트 두 번 받았다가는 놀라서 쓰러질걸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요?”
진지하게 묻는 강준의 말에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결단을 내린 강준을 이해할 수 있다. 날 위해서 한 일이고 또 강준이 말한 대로 이게 최선의 방법이란 걸 알기에. 궁금한 게 하나 있다면 강준이 어떻게 알리샤를 설득했느냐였다.
“하나만 말해줘요. 도대체 언니는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별말 안 했는데.”
그 말을 내가 믿을 줄 알아요, 당장 말해요. 세희가 눈빛으로 협박하자 강준이 짐짓 겁먹은 표정으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네가 내 여자 지켜주면, 나도 네 남자 지켜주겠다고 했지.”
“언니의 남자요?”
당장은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세희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강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세희를 끌어안았다.
“화면을 잘 봐봐요. 알리샤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마지못해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세희는 그제야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전교 학생회장을 했을 것 같은 반듯한 분위기에 유순한 얼굴을 한 남자와 알리샤는 눈빛 교환을 하고 있었다. 그새 벌써 애인이 생긴 걸까. 물론 그러고도 남을 알리샤긴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자를 미끼로 협박하다니. 이건 강준이 너무했다 싶어 세희가 바라보자 강준은 엄청난 진실을 털어놓았다.
“저 녀석이 허경수예요.”
“네에? 하지만 경수 씨는 죽었다고…….”
잠깐, 설마. 세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 죽었더라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겠다고 날 완벽하게 속인 거지.”
이번에도 강준의 표정이 너무 담담해서 세희는 감이 안 잡힌다. 위로를 해야 할지, 같이 화를 내줘야 할지. 근데 세희가 생각해도 허경수가 너무하긴 했다. 사랑이 뭐라고 친동생처럼 아껴주던 형까지 속이다니. 순딩이같이 생겨서 강준을 상대로 사기극까지 벌인 걸 보면 보통 담은 아닌 것 같았다.
“진짜 죽여버릴까 하다가 겨우 참는 중이고.”
강준의 담담한 얼굴에 희미한 분노가 스치자 세희는 품을 파고들었다. 어르고 달래주려는 듯 강준의 커다란 손에 손깍지를 끼며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참지 말고 그냥 용서해줘요. 경수 씨의 사기극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사랑하게 됐는데.”
“그게 왜 저 녀석 탓이에요? 이렇게 아니어도 어차피 우린 만날 운명이었는데.”
장난이라고 하기엔 강준의 표정이 진지해서 세희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지금 나한테 운명을 믿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운명이 아니면 뭔데.”
내가 못 살아, 정말. 결국 웃음을 터뜨린 세희를 품에 꼭 안으며 강준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요,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강준 씨 말대로 미안한 마음 손톱만큼도 안 가질게요. 근데 나요…….”
말끝을 흐리자 강준이 시선을 내렸다. 고집스러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수 씨가 보고 싶어요.”
그 말에 강준이 미간을 구겼다. 도대체 왜, 그 녀석을 봐서 뭐 하겠다고. 눈빛으로 투덜거리는 강준에게 세희는 새침하게 물었다.
“안 돼요?”
“그렇게 보고 싶어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희의 눈을 강준이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진심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그 눈을 피하는 대신 세희는 더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친동생처럼 아꼈던 남자라서 보고 싶은 이 마음이 전달되기를.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강준이 한숨처럼 말했다.
“주세희가 보고 싶다면 봐야지.”
감히 누구 분부시라고. 투덜투덜 강준이 작게 덧붙인 말이었다.
*** 밤 10시. 인천 공항에 입국한 순간부터 시작된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교 알리샤와 렉스가 도착한 곳은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물론 호화로운 이 객실 또한 강준이 예약해놓은 곳이다. 핸드백을 소파에 집어던진 알리샤가 씩씩거렸다.
“미친 XX! 아, 욕밖에 안 나와.”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시차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토 나올 만큼 이리저리 뺑뺑이를 돌렸다. 기자회견을 했으니 그걸 토대로 언론사들이 알아서 기사를 써서 내보내도록 두면 끝날 일을. 강준은 큰 언론사부터 작은 언론사까지 죄다 인터뷰를 잡아놨다.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시간에 쫓겨 여기저기 돌아다니도록 말이다. 알리샤로선 태어나서 이렇게 하루가 고된 적은 처음이었다.
“렉스,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분을 못 이기는 알리샤와 달리 렉스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난 괜찮은데.”
“넌 뭐가 다 괜찮아? 니 그 잘난 형이 우리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잖아!”
“난 자기만 있으면 다 괜찮은데. 자긴 아닌가 봐요?”
내려보는 유순한 눈꼬리에 불붙었던 알리샤의 분노가 스르르 녹아버린다.
“누, 누가 난 아니래? 나도 그렇거든?”
사실은 정말 그랬다. 그러니까 이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속으로 투덜거리는 알리샤에게 렉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알리샤. 내일 만나게 되면 본부장님께 우린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해요.”
“우리가 왜?!”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알리샤가 사납게 눈을 치뜨자 렉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도 알잖아요. 내가 당신 때문에 본부장님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거.”
“웃기시네. 그 덕에 니 형도 주세희를 만났잖아!”
“그래서 이렇게 용서받을 기회를 준 거잖아요.”
너무 기가 막힌 듯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는 알리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렉스가 말했다.
“본부장님 성격대로 했으면 날 진짜 죽였을걸요? 그런데 이렇게 난 렉스란 이름으로 살아 있고 당신이 내게 와줬고 우리는 함께잖아요. 그래서 난 이제 뭐든 괜찮아요.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렉스…….”
알리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젠 진짜 사랑이 뭔지 알기에, 아픈 마음이 뜨겁고 또 먹먹해서. 자신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유일하게 의지했던 형을 버리고, 허경수란 이름을 버리고, 무모한 짓까지 한 눈앞의 남자 때문에. ***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남자라는 걸 강준은 오늘 다시 증명해 보였다. 오전에 알리샤가 했던 기자회견 후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크고 작은 언론사에서 기사를 쏟아냈다. 조 여사의 과거와 그간 저질렀던 비리, 갑질 영상까지 동시에 우르르 터졌다. 마치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특히 이노패션 집무실까지 찾아와 세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영상과 이노패션 주주총회에서 알리샤와 세희를 폭행하는 영상은 엄청난 공분을 일으켰다. 대리 결혼, 가짜 신부, 아내의 이복동생, 한신 후계자, 이노그룹의 사생아. 진실은 변하지 않았고 이래저래 얼굴이 팔린 건 여전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폭로 기사에 세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확 달라졌다. 세희를 향한 일방적인 마녀사냥은 이제 조 여사를 향한 온갖 비난과 질타로 바뀌었다. 자신의 난임을 숨기려고 어렵게 살던 쌍둥이 동생을 대리모로 이용하려 한 것도. 이용가치가 없는 동생을 죽음으로 몬 것도 모자라 어린 조카까지 괴롭혀왔던 것도. 위암에 걸린 자신의 친딸마저 물건 취급한 것도. 조카의 마지막 아량으로 한신에서 건넨 마지막 제안조차 거절하고 사람을 고용해 임신 4개월인 조카를 해하려 했단 것도. 이제 세희는 국민 누가 봐도 가련한 피해자일 뿐이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이모의 오랜 괴롭힘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이모를 무너뜨린 세희를 오히려 응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물 흐르듯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 이 모든 게 강준의 치밀한 계략 덕분이었다. 그것도 하루 만에 아니, 정확히는 반나절 만에. 안도가 되면서도 씁쓸함이 번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등바등 독하게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내 힘으로 뭘 어쩔 수 없는 세상이란 걸 새삼 깨달아서. 이 남자가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말끔하게 해결되지 못할 일이란 걸 알아서. 세희의 시선이 강준에게로 향했다. 자신은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담담히 말한 강준은 이제 막 배달 온 망고 셔벗을 접시에 옮겨 담고 있었다. 괜히 가슴이 뜨거워진 세희는 천천히 다가가서 강준의 허리를 뒤에서 안았다.
“고마워요, 강준 씨. 나와 프레를 지켜줘서.”
얼굴은 좀 팔렸지만, 당분간 동정 어린 시선을 좀 받겠지만, 뭐 어때. 평생토록 마음 편히 당당하게 살 수 있는데. 프레에게 낙인 같은 그 꼬리표를 물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거면 된 거다. 몸을 돌린 강준이 세희를 품에 안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평소에는 작은 것 하나까지도 오만한 남자가 세희 앞에선 늘 이렇다. 겸손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하지만 세희는 알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강준이 모두 한 일이란 걸. 조 여사가 입원한 순간 세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자료를 강준에게 넘겼다. 그걸 강준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활용해서 최고의 시너지효과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 모든 걸 생각해내고, 사람들과 언론을 장기판 위의 말처럼 입맛대로 움직이고. 세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당신을 통해 내려다보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난 참 좋아. 하지만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아본다.
“이제 말해줘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강준에게 세희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서강준 씨 당신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