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내 여자를 위해서.2022.03.24.
잠결에 전화를 받은 알리샤가 욕을 쏟아냈지만 그걸 들어줄 마음이 강준은 조금도 없었다.
“대화는 지금 옆에 자고 있는 놈 깨워서 실컷 하시고.”
하루가 걸리지 않을 거리에 있었다면, 내가 이미 반쯤 죽여놨을 괘씸한 녀석이랑. 그 한마디에 알리샤가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잠시 흐르는 침묵이 무거우면서도 살벌하다. 그걸 굳이 건드리지 않고 일부러 몇 초의 시간을 끈 후 강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서류를 건넸던 사람이 오늘 아침에 또 찾아갈 겁니다. 상황을 완벽하게 역전시킬 레퍼토리 생각해놔요. 옆에 있는 놈이 잔머리 굴리는 분야는 최고일 테니.”
놀랐는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그것도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리샤는 횡설수설 시치미를 뗐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둥,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둥, 내가 왜 그래야 하냐는 둥. 다 알고 전화한 내게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강준은 싸늘한 비소를 머금었다.
“무슨 말이냐고? 사랑하는 남자 지키고 싶으면 그쪽이 와서 다 독박 쓰라는 겁니다. 한국에서 살 것도 아니니 이미지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든 말든 상관없을 테니까.”
어떻게 이런 멍청한 여자와 주세희를 바꿔치기할 생각을 했을까. 대체, 나를 뭘로 보고, 말이지.
“나는 내 여자 지키고, 그쪽은 그쪽 남자 지키고. 서로 윈윈하자고.”
무감한 말투는 언뜻 나긋나긋한 것 같지만 분명 협박이었다. 그건 알아들었는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겁나고 무섭겠지. 내가 뭘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를 테니. 사실 전화의 목적도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그래서 강준은 알리샤의 대답조차 필요 없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기사는 미리 넘겨야 하니 레퍼토리 짜서 내일 중으로 넘겨요. 검수는 내가 직접 할 생각이니.”
경수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당장은 뭘 어떻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결혼식 먼저 올린 후에 찬찬히 자신을 속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핏줄이라고 봐줄 생각도 없고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지만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지금 그 녀석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으니까. 그런데 그 귀차니즘에서 온 기다림이 오히려 강준에게 지금 득을 가져다주는 상황이었다. 주세희를 대신해서 세울 방패의 약점이 되어줬으니.
“기자회견이랑 인터뷰 잡아놓을 테니 일주일 안에 한국 들어와요. 비행기 티켓과 귀국 후 일정까지 그 사람이 넘길 테니 확인 후 오류 없도록 하고.”
제 성격을 잘 아는 경수이니 완벽하게 처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은 생을 사랑하는 여자와 잘 살고 싶다면 그래야 할 테고.
“물론 안 와도 상관은 없지만 대신 각오는 해야 할 겁니다.”
강준은 절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알리샤도 알겠지만 누구보다 경수가 더 잘 알 겠지. 내가 어떤 놈인지. 지금도 분명 옆에서 숨죽인 채 같이 듣고 있을 게 분명하고.
“내가 직접 찾아가면, 그 녀석을 어떻게 할지 모르거든.”
마지막 말은 알리샤가 아닌 허경수에게 하는 경고였다. 네가 네 여자를 위해 날 버린 것처럼, 나도 내 여자를 위해서 널 기꺼이 버릴 거라고.
*** 세희는 가벼운 차림으로 강준과 집을 나왔다. 입덧이 가라앉아서 요즘 잘 먹었는데 오늘은 기사 때문인지 입맛이 없었다. 집 근처의 식당에서 우동과 돈가스로 가볍게 저녁을 해결한 두 사람은 한강공원을 거닐었다. 여름이 한걸음 물러났는지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선선하다. 깍지 낀 커다란 손이 전해오는 온기가 좋고, 간간이 올려다볼 때 마주쳐주는 다정한 눈이 좋다. 눈이 환해질 만큼 잘생긴 얼굴도, 청량하면서도 강렬한 체취도. 한결같이 늘 곁을 지켜주는 이 남자 덕분에 날 선 감각들이 어느새 무뎌졌다. 그래서인지 세희의 음성이 밝았다.
“어머니가 플래너 만나서 다 알아서 결혼 준비할 테니, 저는 프레랑 일에만 신경 쓰라고 했어요.”
결혼 준비가 복잡하고 머리 아프고 신경 써야 할 게 많다는 걸 안다. 누군가는 그 결혼 준비를 즐기겠지만 안타깝게도 세희는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걸 연숙이 대신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회사 경영 쪽은 문외한이어도 이쪽은 전문가야. 도움받을 지인들도 많고. 너만 괜찮으면 엄마한테 맡겨줄래? 난 파티나 행사 이런 거 준비하는 걸 너무 좋아하거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연숙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히 세희도 싫을 이유가 없기에 받아들였다. 그때 강준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럼 나는?”
가늘게 뜬 눈동자에 질투와 소유욕이 이글거린다. 누가 그랬던가, 남자는 죽을 때까지 애라고. 암컷 앞에서 맹수도 고개를 숙이고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강준도 그러했다. 뻔히 내 마음 알면서 이렇게 확인하려는 거 보면. 세희는 웃음을 참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어머니 말씀이 강준 씨는 조금도 신경 쓸 필요 없다던데요? 어릴 때도 알아서 척척 잘하던 놈이 커서는 오죽 잘하겠냐고. 강준 씨한테는 그냥 기대래요. 그러라고 얄미울 만큼 잘나게 낳은 아들이라고.”
“…….”
“돌 때 젖병 떼면서 울지 않고. 두 살 때 기저귀 떼면서 한글도 같이 떼고.”
“…….”
“세 살 때 영어, 네 살 때 중국어. 6살 때 주식 시작하고. 더 말할까요?”
급기야 걸음을 멈춘 강준이 세희의 앞에 마주 섰다.
“그래서, 나는 신경 안 쓰시겠다?”
강준은 나름 가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세희에겐 여전히 오만한 눈빛이었다. 가련한 상황에 처해봤어야 그 느낌도 알지. 덩치는 산만 한 이 남자의 투정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세희는 살며시 손을 뻗어 강준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맞추었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죠?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내가 강준 씨 생각하고 신경 쓰는 거 알면서.”
강준의 하루가 세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참에 애정 표현을 마음껏 받아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힌 듯 강준이 버텨낸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세희는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그까짓 애정 표현 더 해준다고 배탈 나는 것도 아닌데, 까짓거 해주지, 뭐. 세희는 강준의 귓가에 부드러운 숨결과 함께 달콤하게 속삭여주었다.
“내가 많이 사랑한다구, 서강준 당신을.”
다시 발꿈치를 내린 세희는 강준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이래도 부족해요? 더 확인시켜 줄까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강준이 세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더 사랑해, 주세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있는 듯 강준이 물었다.
“근데 세희 씨는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없어요?”
결혼은커녕 연애도 생각 안 해봤는데 로망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틀어 강준을 올려다보았다. 유려하게 빠진 얼굴은 질리긴커녕 보면 볼수록 중독된다. 이제 알겠어, 나도 몰랐던 내 로망이 뭔지.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결국은 당신인 것을. 서강준 당신이 내 로망이라구. 세희는 생긋 웃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신랑이 서강준인데, 어떤 결혼식이든 로망이겠죠.”
이런 남자가 신랑이라면 물 한 그릇 떠놓고 절만 해도 생애 최고의 결혼식일 것이다.
“그런 멘트도 날릴 줄 알아요?”
걸음을 멈춘 강준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세희는 싱긋 웃어보였다. 사실 세희도 지금 자신이 무척 신기했다. 포털마다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다는 게. 오로지 서강준을 향한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한없이 든든한 이 남자가 나와 배 속의 아이를 지켜줄 걸 알기에.
“못 할 건 또 뭔데요.”
물론 안 하던 짓을 하니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톡 쏘아붙이면서 먼저 걸어가는 세희를 몇 걸음 만에 따라잡은 강준이 다시 손을 잡아왔다.
“못 할 거 없으면 자주 좀 해줘요. 듣기 좋네.”
은근한 그 눈빛을 모른 척하며 걷는 세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강준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고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세희에게 물었다.
“유 부회장,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세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이대로 유지시켜줄까,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줄까. 세희 씨가 그것만 결정해줘요.”
세희가 대답 대신 가만히 바라보자 강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 유 부회장한테 물을 생각이거든.”
강준에게 유 부회장은 임시 보류해둔 장기판 위의 말이었다. 물론 기존 계획대로 적당히 기다리다 끌어내릴 수도 있지만, 굳이 왜. 좋은 기회가 생겼고 끌어내리면 그뿐인 것을. 하지만 그 전에 세희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혹시 이번 일에 유 부회장이 관련된 거예요?”
“그럴 만한 머리도 담도 없는 남자인 거, 세희 씨가 더 잘 알지 않나.”
강준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영희가 착용하고 있던 다이아 귀걸이를 뇌물로 주고 간호사 한 명을 회유했어요. 퇴원 못 할 건 뻔하니 잠깐 면회 허용하는 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더군. CCTV는 이미 녹화해놓은 다른 영상으로 잠시 대체하고, 10분 정도 정 실장과 만나게 해줬고.”
“그런데 그 잘못을 유 부회장에게 묻겠다구요?”
“그러면 안 되나?”
너무도 담담한 그 물음에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세희는 생각에 잠겼다. 그 침묵을 묵묵히 기다려준 강준에게 세희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복수의 대상은 이모였지만, 이모보다 더 미운 사람이 유 부회장이었단 거.”
무관심과 방치만큼 무서운 건 없다. 적어도 조 여사는 세희를 괴롭혀서 독기라도 품게 만들었다. 그 독기로 악착같이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라왔고 그래서 강준을 만났다. 하지만 친부라는 그 남자는 내게 뭘 해줬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놀라울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난 이제 유영국 당신이 밉지도 않고 원망스럽지도 않아. 어차피 이어진 적 없었던 핏줄의 연, 끊어낼 것도 없고.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과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강준 씨가 알아서 해줘요. 난 이제 그 사람에게 관심 없으니까.”
“기꺼이 분부 받들죠.”
세희의 대답을 들은 이상 망설일 이유도 시간을 끌 이유도 없다. 강준은 부재중으로 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서강준입니다.”
[서, 서 사장! 내 말 좀 들어보게! 나도 기사 보고 얼마나 놀랐……?]
기사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데도 연락 한 통 없으니 어지간히도 애가 탔나 보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영국의 목소리에 어린 긴장과 초조함은 강준이 알 바 아니었다.
“유 부회장님 말을 들으려고 전화한 게 아닙니다.”
영국의 말을 차갑게 자른 강준은 하나하나 콕콕 짚어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도 관리를 제대로 못 하셨네요.”
이번 일은 이래도 당신 때문이고.
“돈 써서 될 일이었으면 내가 했고 아니라서 맡긴 일인데.”
저래도 당신 때문이라고.
“결론은 아내도 관리 못 했고 기사도 못 막았으니, 거래는 없던 일로 하죠.”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지고 밑바닥으로 추락해야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유 부회장님.”
영국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가차 없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세희는 가만히 서 있었다. 강준이 가만히 바라보자 싱긋 웃으며 다가온 세희가 품에 안겨왔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맞닿은 심장으로 세희의 진심이 전해졌다. 당신의 위에 서서 내려다본 세상은. 당신을 통해서 새롭게 살게 된 세상은. 참 편하고 행복하다고, 무서울 것 하나 없다고. *** 일주일이란 시간은 참 빨리도 흘렀다. 재택근무가 무료하고 답답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낮에는 연숙과 진경, 그리고 김 비서가 수시로 드나들고 강준은 칼퇴근을 꼬박꼬박했다. 자극적이었던 기사들을 하도 많이 봐서인지 이제 봐도 덤덤했다. 무엇보다 급락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이노패션 주가가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거래량으로 따지면 연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신가 때문이었다. 폭망할 거라고 주식을 팔아 치우는 이들과 한신그룹을 등에 업고 있는 주세희를 믿고 주식을 사들이는 이들이 팽팽히 맞물려서. 저녁 6시 40분. 단 일 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강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씻고 나올게요.”
강준이 씻는 동안 세희는 온갖 상상을 다 하는 중이었다. 약속을 칼 같이 지키는 남자가 말한 일주일이 흘렀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 건지 궁금해 죽겠는데, 강준은 별다른 말도 없고 신호조차 주지 않는다. 꾹 참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샤워를 끝낸 강준이 옆에 앉더니 세희를 품에 안고 TV를 틀었다. 지금 이 시국에 TV를 보자는 건가?
“일주일 지났어요, 강준 씨.”
조금은 따지는 듯한 눈빛으로 세희가 바라보자 강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성격 급하시긴. 약속 지키려고 TV 튼 거예요.”
얼떨결에 강준의 시선을 따라간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리샤 언니?”
TV 화면 속, 정확히는 생방송임이 분명한 단상 앞에 서 있는 세련된 미인은 다름 아닌 알리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