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높은 곳에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2022.03.20.
세희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기사화될 만한 게 있던가. 경제란의 한 부분에 작게 실리긴 했지만 그건 몇 달 전의 일이다. 세희가 말해달라는 듯 눈빛으로 채근하자 강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보자는 정 실장. 가장 작은 언론사 먼저 접선한 후 큰 언론사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연락이 이제야 왔고 기사 내용이 뭘지 세희 씨도 짐작할 것 같고.”
“짐작하기 싫은데 짐작이 되는 게 참 싫네요.”
옅은 한숨을 내쉰 세희의 생각이 깊어진다. 제보자가 조 여사의 심복인 정 실장이라면 기사 내용이 뭘지 뻔하다. 조 여사는 동생 모녀의 철저한 피해자이고 자신은 가해자에 악녀겠지. 정신병원까지 들어갔으니 끝까지 가보겠다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조 여사는 정신병원에 있고 영국과 자신을 제외한 면회는 허용되지 않는데. 정 실장의 추진력은 인정하지만 혼자 뭔가를 꾸밀 머리는 되지 않는다.
“정 실장이 혼자 꾸민 일이에요?”
“나도 알아보라고 했어요. 며칠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만 기사는 내일 올라갈 거고.”
내일. 세희가 우려했던 현실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우리 프레에게만은 내 꼬리표가 달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내가 이 남자를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고 두렵지도 않다. 거대한 태풍이 다가온다 해도 이 남자가 있으면 끄떡없을 것 같은 믿음 때문에.
“강준 씨도 막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나한테 말해주는 거구요.”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을 생각이에요.”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 세희는 고개를 들어 강준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요. 우리 프레에게 꼬리표가 평생 붙을 수 있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꾸욱 참았다. 이 남자를 믿어야 하고 또 믿기에. 그 마음을 안다는 듯 강준이 세희의 손을 꼭 잡았다.
“세희 씨 과거, 그리고 우리의 일. 평생 묻힐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 그 여자가 평생 정신병원에 있다 해도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고.”
“…….”
“특히 이쪽 세계가 좀 그래. 내가 공인 아닌 공인이라 뭐 하나 불거지면 파헤쳐질지 모르죠. 그래서 세희 씨도 프레와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날 거절한 거겠지.”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에 세희는 조금 원망스럽게 강준을 보았다. 강준의 말대로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콩알만 한 불안함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다가도 생각나고 자다가도 생각나고, 이유 없이 생각나고. 그런데 왜 당신은 늘 내가 숨기고자 하는 이 마음을, 추악한 치부를, 투명한 물속처럼 들여다보는 걸까. 그런 당신이 미운데 좋아. 원망스러운데 고맙고 또 사랑해. 수많은 감정이 범람하는 세희의 눈을 더 깊숙이 바라보며 강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나한테 티도 못 내고 평생 불안해하며 살 주세희고.”
모른 척 눈 감아 줄 수도 있는 콩알만 한 불안함마저 강준이 기어이 끄집어내자 세희는 눈을 감아버렸다. 알고 있었다. 조 여사가 정신병원에 있다고 완벽하게 일이 해결된 건 아니란 걸.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많았고 누군가 작정하고 파고들면 강준과의 일이 공개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걸. 하지만 이건 강준을 욕심내고 프레에게 아빠를 주는 대가로 생각하며 기꺼이 감당하려 했다.
“난 내 아이의 엄마이자 내 여자가 완벽하게 행복하길 원해요. 그 행복을 위해 세희 씨가 아주 잠깐 힘들고 아픈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강준의 올곧은 눈동자가 날 믿고 모든 걸 맡겨 달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당당함과 자신감을 갖춘 남자였다. 이런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지 않을까. 기대지 않고선 못 버티게 하는 당신을.
“언제 매 맞을지 평생 불안해하느니, 미리 맞으라 이거예요?”
세희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제야 강준도 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방접종 맞는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좀 아프고 힘들어도 평생 편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줄게요.”
“근데 강준 씨, 나만 아프고 힘든 거 맞죠?”
그렇다면 세희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그까짓 아픔쯤이야.
“뭐, 한신도 이미지 타격을 입고 주가가 급락할 수도 있긴 한데.”
세희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피식 웃은 강준이 말을 이었다.
“그건 아주 잠깐일 테고.”
그 미소가 너무도 여유로워 이제 세희는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전화 받은 지 고작 몇 분 만에 세운 계획이 뭘지. 이래서 머리는 타고나야 하나 보다.
“계획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
“안 돼요. 구상 중이라, 아직 말해주긴 뭐하거든.”
겨우 구상 중이면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믿고 맡겨주라고 큰소리쳤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그야 자신만만하면 안 될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강준은 뭐 무서울 게 있냐는 표정이었다. 늘 원하는 대로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남자니까. 새삼 느끼지만 나와는 너무도 다른 당신이 때때로 낯설고 어색해. 그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강준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또 무슨 걱정을 그렇게 잔뜩 끌어모아서 하실까.”
“그냥 뭔가 아득하고 무서워요. 당신과 내가 너무 달라서. 내가 그런 당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들.”
가슴 안의 낯선 걱정들을 세희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서강준이니까.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내가 언제 어깨를 나란히 하자고 했나.” 중얼거리듯 말하며 세희를 품에 안은 강준이 말을 이었다.
“날 밟고 올라서요.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라고, 주세희.”
그러게, 난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걸까. 강준의 품에서 세희가 안정을 찾을 때쯤,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하게 분위기 잡더니만, 애정표현 하려고 자리 피해 주라 한 거냐? 솔로 서러워서 못 살겠네.”
돌아보니 어이없는 표정의 재우가 서 있었다.
“애꿎은 손님들 집 안에 가두지 말고 두 사람이 그냥 들어가는 게 어때?”
얼굴이 달아오른 세희와 달리 강준은 정말 뻔뻔하게 속삭여왔다. 들어갈래요. 아니요. 자그맣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은 세희는 강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때마침 경진과 진경도 와인을 가지고 집에서 나왔다. 테이블에 다시 옹기종기 앉은 네 사람.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희 씨, 혹시 와인도 못 마셔요?”
“와인도 안 돼, 착즙 포도 주스 있으니 그거 마셔요.”
세희 대신 차갑게 거절한 강준이 잔에 주스를 따랐다. 쨍그랑-.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제대로 된 축하가 이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세희 씨!”
“행복해야 해, 세희야!”
세희의 가슴 안에 콩알만 한 불안함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즐겁고 행복한 세희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별들이 무수히 박힌 밤하늘 아래, 고즈넉한 강원도의 밤이 흘러가는 것처럼.
*** 강원도에서 돌아온 강준은 세희에게 재택근무를 권유했다. 처음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생각해 보니 곱지 않은 시선을 감당하는 게 버거울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건 단련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니까. 오랜만에 늦잠을 잤고 아침을 먹자마자 강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잤어요?]
“네.”
[기사는 봤고?]
“스트레스받으니까 보지 말라면서요.”
[착하네.]
“내가 애 취급하지 말랬죠.”
세희가 톡 쏘아붙이자 듣기 좋은 나직한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강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가. 그것만으로도 불안함에 들썩거리던 가슴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끝까지 보지 말고.]
“노력은 해볼게요.”
말과 달리 사실 자신 없었다. 강준이 잘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과는 다른 결의 궁금증이라고 할까.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일찍 들어갈 테니까.]
통화를 끝낸 세희는 일부러 핸드폰을 멀리 던져 놓았다.
“차라리 일을 하자.”
일하다 보면 생각 안 나겠지. 세희는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저녁 6시 20분, 정확히는 강준이 집에 도착하기 10분 전. 세희는 기어이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하고 말았다. 처음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만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 기사가 상위 랭크되어 있었다. 하나를 클릭하게 되니 관련 기사가 주르륵 떴고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으로 기사를 확인하고 나서야 강준이 왜 보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기사 제목들이 하나같이 자극적인 데다 일방적인 마녀사냥이었다. [XX그룹 후계자, 본처의 이복동생과…….] [XX자동차 대표 예비 신부의 진짜 정체, 이모의 측근 폭로로 확산.] [꽃뱀 모녀에게 똑같은 수법으로 당한 XX병원 이사장은 누구?] [이복동생에게 남편과 회사까지 뺏기고 해외로 쫓겨난 XX그룹 장녀.] 한신이라는 이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댓글을 보니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한신과 이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스토리 짜집기를 참 뭣 같이도 했네.”
그래도 한신은 무서웠을까. 기사 내용을 보면 이노그룹보다 한신이 더 철저한 피해자였다. 꽃뱀 같은 자신에 의해 말이다. 몸이 아픈 이복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형부를 유혹하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그걸 숨기고 아픈 할머니까지 팔아서 이모를 설득해서 가짜 신부를 자처하고. 이복 언니의 남편도 모자라 회사까지 가로챈 후 해외로 쫓아내고. 비밀이 들킬까 두려워 자신을 돌봐준 이모까지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급기야 마지막 기사 제목을 본 세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한민국 경제를 말아먹을 세기의 요녀.] 물론 한신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업 후계자가 꽃뱀이랑 결혼했다고 나라 경제가 흔들리다니. 우리 대한민국을 대체 뭘로 보고.
“그래도 이건 좀 막아주지.”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에 절로 투덜거림이 나왔다. 모든 기사가 강준의 승인하에 났고 일부러 자극적으로 내라는 지시까지 들었으니까. 도대체 뭘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 일을 벌이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세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현관 복도를 주시하고 있자 강준이 나타났다. 아침과 다름없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버선발로 달려나가던 평소와 달리 소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세희에게 강준이 다가왔다. 가늘게 뜬 눈으로 빤히 내려다보더니 감 잡았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굽혔다. 눈높이를 맞춘 강준이 부드럽게 바라보자 결국 세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무했어요. 세기의 요녀라는 타이틀은 막아주지.”
“보지 말라니까.”
강준의 말에 세희는 발끈하듯 쏘아붙였다.
“어떻게 안 봐요? 나에 대한 기사인데.”
“일주일만 후에 봐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상황 수습한 후에.”
“수습이 되긴 하구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희에게 강준이 피식 웃었다.
“나 못 믿어요?”
“믿어요. 하지만 상황이 너무…….”
“최악이라고?”
강준은 말갛게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에서 걱정을 읽어냈다. 원망이나 불신이 아닌 자신에게 피해를 줄까 봐 염려하고 미안해하는 세희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어여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게 내가 바라는 거예요. 최악일수록 상황이 역전되어 뒤집힐 때 효과도 좋을 테니.”
그래도 걱정이 잔재하는 세희의 눈빛에 강준은 한 가지만 더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주세희가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세희 씨, 날 걱정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스치듯이 본 것들이라도 머릿속에 입력이 된 순간, 강준이 언제 꺼내 쓸지 모르는 장기판 위의 말이 된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필요할 땐 언제든지 꺼내서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는. 회유든 협박이든, 그 말들을 입맛대로 굴릴 능력은 충분하니. 싱긋 웃은 강준은 손끝으로 세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난 아무것도 안 할 거고 다른 사람이 대신 해결하게 할 거거든.”
“다른 사람 누구요?”
“일주일 후에 다 알게 될 테니, 날 믿고 조금만 기다려줘요.”
조금은 답답한 듯 미간을 구기면서도 세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도 미안하고 고마우면, 일주일 후에 내 소원 하나 들어주든지.”
강준이 보인 여유에 세희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희가 내보인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강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올게요.”
욕실로 들어가기 전 강준은 핸드폰에서 사진 한 장을 확인했다. 멀리서 찍힌 사진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6시 40분이다. 그럼 거기는 새벽 3시 반쯤 되었을 테고. 강준은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난 후, 잠에 취한 목소리로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자 강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납니다, 서강준.”
상대방에겐 날벼락처럼 떨어질 그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