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이벤트 서프라이즈.2022.03.17.
강준도 알고 있었다. 굳이 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들어갈 필요까진 없다는 걸. 세희는 40분 안에 나온다고 했고 차에서 7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차의 시동을 끌 때까지도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주차장과 맞닿은 식당 창문 안으로 주세희를 보기 전까지는. 멀리서 봐도 느껴지는 긴 속눈썹과 단아한 옆얼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 찰랑거리는 탐스러운 머리칼. 두 손을 다리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자세까지. 유태령이든 주세희든, 임신을 했든 안 했든, 지독히도 변함이 없다. 사람 눈을 홀리고 심장을 자극하는 여자라는 건.
“이러니 내가 미치지.”
나직하게 중얼거림을 뱉어내며 차에서 내린 강준은 성큼성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세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강준은 멈추어 섰다. 식당에 들어온 건 자유지만 회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테이블은 곧 업무의 연장선, 정확히는 주세희만의 영역이니까. 그 선을 넘어가는 건 침범이고 주세희가 싫어하겠지. 일적인 면에선 칼 같은 여자니까. 사실 강준도 세희를 부추길 마음은 없었기에 의자에 앉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런데 부드럽고 또렷한 음성이 강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결혼할 사람이에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트니 세희가 자신을 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세희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밖에서는 여전했다. 이목을 신경 쓰고, 자신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그러던 주세희가 직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젠 침범이 아닌 초대. 주세희의 영역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간 강준이 테이블 앞에 멈추어 섰다.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열 쌍의 시선이 일제히 강준에게 쏠렸다. 하지만 강준이 풍기는 강렬한 포스에 누구 하나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가 너무도 익숙한 강준은 당연하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세희 씨가 해외 사업부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직원들은 자신들끼리 열심히 눈빛 교환을 한다. 그러든 말든 직원들을 무심히 스윽 훑은 강준이 김 팀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해외 사업부 김연우 팀장님?”
제 이름이 호명되자 화들짝 놀란 김 팀장이 자신을 어떻게 아냐는 듯 강준을 보았다.
“유능한 인재 스카우트해왔다고 세희 씨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미인인 데다 능력도 뛰어나시다고.”
“아,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는 김 팀장에게 강준이 지갑 안에서 십만 원권 수표를 꺼내 뭉치로 내밀었다.
“회식비는 법인 카드로 결제할 테고, 직원들 대리비는 제가 챙겨드리고 싶군요.”
“아, 괜찮습니다! 설마 저희가 대리비도 없을까 봐요.”
“제 예비 신부가 아끼는 인재들이 무사히 집으로 귀가하길 바라는 마음에 드리는 거니 부담 갖지 마시죠.”
“아…….”
“그리고 팀장님은 괜찮겠지만 직원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강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직원들이 일제히 김 팀장에게 눈빛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림잡아 한 사람당 20만 원은 갈 텐데, 우린 대리비 받고 싶다고! 그제야 김 팀장은 곤란한 눈빛으로 세희를 보았다. 받아도 돼요, 라는 듯 세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김 팀장이 수표를 받았다. 기혼인데도 가까이에서 본 강준의 얼굴에 김 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 반겨놓고선, 눈이 마주치자 웃어주고선, 결혼할 남자라고 소개까지 해놓고선. 세희는 차에 오르고 나서야 뒤늦게 타박을 했다.
“차에서 기다리지 왜 들어왔어요?”
“나도 차에서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지.”
적어도 주세희 널 보기 전까지는.
“하도 예쁘게 앉아 있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몸을 기울여 세희의 뺨에 기습 입맞춤을 한 강준이 깊숙이 눈을 맞춰 왔다.
“얼른 우리 둘만 있고 싶어서.”
보시다시피 이렇게 목적을 이루었고. 강준의 능청에 기가 막힌 듯 긴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세희도 결국은 웃어버렸다.
“좀 자요, 몇 시간 가야 하니까.”
안전벨트까지 친히 매어주며 강준이 한 말에 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요 우리?”
“응, 어디 가요 우리.”
말을 따라 하자 눈을 흘기는 세희에게 강준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벤트 서프라이즈.”
그건 곧 도착할 때까지 말 안 해주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 세희는 생각했다. 차도 좋지만 이 남자가 정말 운전을 잘한다고. 부드럽고 섬세한 운전 솜씨에 정말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둠이 내려앉는 차창 밖의 밤 풍경이 낯설었다. 슥슥 스쳐 지나가는 고층건물이 아니라 으슥한 산이 보이고 밭이 보이고. 고개를 틀자 여전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강준이 보였다.
“잘 잤어요?”
잘 잔 정도가 아니라 푹 잘 잤다. 그것도 3시간이나.
“서울 벗어난 거예요?”
아직도 시크릿을 유지하고 싶은지 강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말해줘도 되잖아요.”
“강원도 정선이에요.”
강준의 말에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기억들이 스쳤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던 밀밭, 새하얀 웨딩드레스, 향기로웠던 들꽃, 달콤한 사랑 고백, 눈물 날만큼 뜨겁고 애틋했던 두 번째 밤, 그 밤 자신을 찾아온 인생 최고의 선물까지.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으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설마…… 아니죠?”
“설마가 사람 잡지.”
그 말을 증명하듯이 강준의 차가 잘 다듬어진 길을 달렸다. 참 익숙하면서 낯선 풍경에 세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였던 것 같은데. 잘 다듬어진 길 끝에 있는 울타리가 쳐진 집도 2층이 아닌 3층이었다.
“여기 우리가 왔던 그 별장 아니에요? 길도 달라진 것 같고 집도 달라졌어요.”
“길은 다듬었고 집은 리모델링 좀 했어요.”
“누구 맘대로요?”
“음, 주인 마음대로?”
설마 아니겠지. 마른침을 꼴깍 삼킨 세희가 빤히 바라보자 피식 웃은 강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샀거든. 이 집이랑 주변 땅 죄다.”
세희가 말문이 막히는 순간, 차는 집 울타리 밖에 멈추어 섰다. 태연하게 차에서 내린 강준이 조수석 쪽 문을 열어주며 손을 내밀었다. 우선은 차에서 내려야 할 것 같아 세희는 강준의 손을 잡았다. 두 발을 온전히 땅에 딛자 은은한 등이 켜진 집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기존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집은 부분적으로 보수한 대신 외부 환경을 많이 다듬었다. 구경하느라 서 있는 세희의 허리를 강준이 뒤에서 안아왔다.
“내가 주는 첫 번째 결혼 선물. 서류에 사인만 하면 돼요.”
너무 놀라 고개를 튼 세희의 입술에 강준은 쪼옥 입을 맞추었다.
“진작 주고 싶었는데.”
“……!”
“누가 말도 안 하고 내빼는 바람에 찾아내고 결혼 허락까지 받느라. 좀 늦었네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먹먹하고 뜨겁고 벅차고. 왜 늘 이 남잔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분을 안겨주는 걸까. 천천히 돌아선 세희에게 강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마음에 든다면서, 아니었나?”
대답 대신 세희는 천천히 손을 뻗어 강준의 목을 감았다. 울 것 같은 먹먹한 눈빛으로 바라봐서일까. 눈을 가늘게 뜬 강준이 깊숙하게도 들여다본다. 세희는 부러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더 가까이 맞추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닿은 것처럼, 내 마음도 당신에게 닿았으면 해서.
“마음에 들어요. 잘 다듬어진 길도, 이 집도, 주위 풍경도.”
당신이 해준 것들 모두 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 그런데 말이에요, 서강준 씨. 천천히 발끝을 들어 올린 세희는 입술을 가까이 한 채 속살거리듯 말했다.
“근데 난 서강준 씨 당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시선이 엉키는 순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의 시그널이 오갔다. 키스해줄래요. 수줍음 가득한 세희의 눈빛에 강준은 대답 대신 키스해왔다. 기꺼이. 서로의 숨결이 깊숙이 얽혀드는 순간,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험, 험험.”
“거참, 거기 커플! 대낮 같은 이 밤에 조심 좀 합시다?”
화들짝 놀라 돌아선 세희의 시야에 재우와 경진이 보였다. 두 남자의 조금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진경도. *** 이 모든 게 강준이 세희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이고 서프라이즈였다. 이 집도, 재우와 경진도, 진경도. 신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결혼 선물, 예비 신랑의 베프에게 하는 정식 소개, 그리고 신부와 친구들이 하는 브라이덜 샤워까지.
‘완전 치사해. 그 세 가지를 한 번에 끝내버리는 게 어딨어요. 설마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죠?’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건데 세희에게 귀여운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럼에도 강준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금 자신의 품에 안긴 세희는 행복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 있었으니까. 야외 정원 가제보 아래 마련된 테이블. 진경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경진이 적극적으로 대시 중이었다. 그런데 초면이 아닌 게 분명한 두 사람의 티카티카가 참 재밌었다.
“이 오빠 봐. 클럽도 아닌데 왜 이렇게 치대?”
“와, 서운하네. 멋진 남자의 당당한 대시를 치댄다고 표현하다니!”
“대시를 입이 아니라 몸으로 하니까 그러죠! 테이블 아래 이 발 못 치워요? 어디다 늑대 발바닥을 비벼대요?”
“이거 다 너한테 배운 거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너의 그 섹시한 발짓 한 번에 홀랑 넘어가서 지금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우리.”
고양이 눈으로 톡톡 쏘아붙이는 진경의 말을 경진은 참 넉살 좋게 받아내고 있었다.
“인연은 무슨, 생판 모르는 사이에.”
진경이 콧방귀를 핑 뀌었지만 오랜 절친인 세희의 눈엔 보였다. 진경이 일부러 경진에게 튕기고 애태우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진경에게 들었던 것도 같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봤는데 너무 바람둥이라서 밀당 중이라고. 그 바람둥이가 아마도 경진인 듯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왜 생판 모르는 사이야? 자꾸 이렇게 기억 안 나는 척하면 오빠 서운하다? 우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아주 뜨…… 윽!”
“요망한 주둥이 닥치지 못해욧?”
화들짝 놀란 진경이 손에 들고 있던 물수건으로 경진의 입을 때린 것이다. 풉-. 세희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웃음소리는 터져 나온 후였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술이 빠졌네? 너 술 못 마시니까 내가 와인 가져올게!”
민망했는지 진경이 붉어진 얼굴로 일어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경진도 냉큼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미안해요, 세희 씨. 경진이가 세희 씨 친구한테 푹 빠져 있어서. 물론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재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테이블 위로 고급스러운 케이스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저와 경진이가 같이 준비한 결혼 선물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선물보단 뇌물에 가깝습니다. 예전의 좋지 않은 일들은 세희 씨가 싹 잊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저도 두 분 속였으니 할 말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뇌물이 아니라 결혼 선물로 받을게요.”
두 사람의 성의를 세희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심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했고, 받은 만큼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강준이 세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일어났다. 둘만 남게 되자 세희는 그제야 재우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재우 씨, 강준 씨랑 같은 중고등학교 나왔다고 했죠? 그때의 강준 씨가 어땠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세희의 질문에 재우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어린 서강준이 얼마나 재수 없을 만큼 완벽한 놈이었는지. 한참 재밌게 듣고 있는데 통화를 끝낸 강준이 다가왔다.
“재우야, 자리 좀 피해 줘.”
“어, 그래.”
둘만 남게 되자 강준은 세희의 의자를 돌려서 마주 보게 했다.
“세희 씨,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
“……?”
“그 여자 병원에 입원시킨 후부터 모든 걸 나에게 알아서 하라고 한 거. 날 전적으로 믿고 내가 쳐 준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기로 한 거.”
어둡고 진지한 강준의 눈빛이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강준은 그걸 혼자 해결하려는 중이고 세희의 허락을 받으려는 거였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야무지신 주세희가 해결 못 할 일은 없지.”
거짓말. 내가 해결 못 할 일이니까 당신이 하려는 거잖아.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에 강준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냥, 내가 그래 주고 싶어서.”
이 남자가 진지할 정도면 꽤 심각한 거겠구나. 그럼에도 세희는 두렵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서강준 당신이 내 편이니까. 당신이 해결 못 할 일은 없으니까. 세희는 강준의 품을 먼저 파고들며 차분히 말했다.
“강준 씨가 뭘 해도 나 믿어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요.”
“세희 씨가 좀 힘들 수도 있어요.”
내려다보는 강준의 눈빛에 희미한 걱정이 어렸다. 하지만 강준을 사랑하기에 믿고 그래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 혼자 하면 많이 힘들어 할 일이구요. 맞죠?”
세희가 내보인 믿음에 결심한 듯 강준이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내일 세희 씨에 대한 기사가 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