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멋진 저 남자가 내 남자.2022.03.13.
세희가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그런데도 팔로 턱을 괸 강준이 옆에서 세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안 잤어요?”
“잤어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세희는 주먹으로 단단한 가슴을 콩 쳤다. 그래봤자 아프지도 않겠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강준이 순순히 실토했다.
“3시간 정도 잤어요.”
“근데 벌써 눈 떴다구요?”
“누구 덕분에 푹 자서 3시간이면 충분해요.”
옅은 어둠 속에서도 열감을 품은 강준의 눈빛은 짙고 끈적했다. 긴 밤 내내, 그리고 짧은 새벽 동안, 온몸의 에너지를 발산하고서도 부족하다는 것처럼. 그 눈빛 덕분에 자신이 강준에게 했던 대담한 짓들이 선연히 떠올랐다. 미쳤어, 감히 어떻게 그런 대담한 짓을……. 뒤늦게 민망해진 세희는 살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5시 좀 안 됐어요.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 더 자요.”
임신 후 아침 운동을 건너뛰고 있어서 기상 시간이 6시 반이었다. 세희도 시간 여유가 있는 건 알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 안 오는데.”
“재워 줄까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품으로 파고드는 세희에게 강준이 물었다.
“그럼 뭐 할래요? 아직 새벽이니…….”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가까이 내리는 강준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파도가 휘몰아친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세희는 얼른 손으로 강준의 입술을 막았다.
“원래 이렇게 늘 엉큼했어요?”
“나 원래 금욕적인 남잡니다. 주세희 만나고 이렇게 된 거지. 그러니 책임져요.”
금욕적이기만 했을까. 차갑고 냉정하고 쌀쌀맞기까지 했는데. 그때의 강준과 지금의 강준을 비교하면 전혀 딴 사람이었다. 고맙고 감동이지만 겁이 날 만큼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참 멀리도 돌아왔지만 결국은 이 남자를 마음껏 사랑하며 곁에 머물기로 했다. 이젠 이 남자의 곁이 아닌 다른 자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평생 책임질 테니까 우리 지금은 대화해요.”
“……대화? 이 새벽에?”
“싫어요?”
“대화는 좋죠. 근데 난 말로 하는 대화보단 몸으로 하는……!”
눈을 흘긴 세희가 맨가슴을 찰싹 때리는 바람에 강준은 말을 멈추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프레는 좀 자게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프레를 언급하자 그제야 강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말해봐요. 우리 예비 신부님께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
“그냥 이런저런 잡담이요.”
속삭이듯 말하며 세희는 싱긋 웃었고, 강준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아무것도 못 하게 해놓고선, 웃는 건 또 왜 이렇게 예쁘게 웃는지. 작정하고 유혹하면 도발적이라서 사람 미치게 하고. 이렇게 순진하게 굴 때면 사람 애를 태워서 환장하게 하고. 아내가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어도 고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강준이었다. 체력이 넘쳐나면 뭐 하냐고, 마음대로 안지를 못하는데. 그런 강준의 고민을 알 리 없는 세희는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육아용품은 어머니가 죄다 사주시겠다고 같이 쇼핑하자고 했는데, 그래도 돼요?”
“세희 씬 누구랑 쇼핑하고 싶은데.”
“당연히 어머니죠.”
“그럼 그렇게 해요.”
하늘의 별도 따다 주고 싶은 심정인데 그깟 게 뭐라고 못 들어줄까.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로 인해 달아오른 몸도 뜨겁지만 심장이 더 뜨거운 강준이었다.
“그리고 할아버님이랑 어머니가 우리 결혼식은 성대하게 올렸으면 좋겠대요.”
“세희 씨 원하는 대로 해요. 난 뭐든 좋고 두 분도 충분히 이해해주실 분들이니.”
“그래서 저도 생각 많이 해봤는데 결혼식 성대하게 할래요. 대한민국이 떠들썩하도록.”
“정말 괜찮겠어요? 얼굴 제대로 팔릴 텐데.”
결혼식은 사실 강준이 더 조심스러웠다. 세희를 오랫동안 괴롭힌 트라우마를 알고 세희의 성격을 알기에. 그걸 극복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너무 무리하게 감당하려다가 세희가 오히려 힘들어할까 봐. 어떻게 내 품 안으로 날아든 새인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요. 그리고 누구든 들쑤시고 건들려면 건들라고 해요. 든든한 남편이랑 시댁이 있는데 뭘 걱정해요? 힘들다 싶으면 마음껏 기대고 숨을 거예요. 나 이제 그럴 자격 충분하잖아요. 아니에요?”
옅은 어둠 속에서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이 비장했다. 그 눈빛에 강준은 가슴이 아려왔다. 제 욕심으로 인해 이 작고 가녀린 여자가 평생 안 하던 일을 하고 버거운 용기를 내려 하고 있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험한 세상 밖으로 나온 주세희를 강준은 과잉보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오기까지는 오로지 주세희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게 미안하고 안쓰럽고 고마워서. 심장으로 밀려드는 감당 못 할 뜨거움에 강준은 세희를 와락 품에 안았다.
“내가 고맙다고 말한 적 있나?”
“…….”
“고마워요. 날 선택하고 내 곁에 머물러줘서.”
“…….”
“내가 평생 잘할게요. 그 선택 후회할 일 없도록.”
그제야 세희도 강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수줍게 속삭였다.
“나도 고마워요. 날 사랑해주고 끝까지 기다리고 포기 안 해줘서.”
더는 못 참을 것 같았다. 키스라도 안 하면 미칠 것만 같아 강준이 얼굴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
무언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세희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맞다, 재우 씨랑 경진 씨한테도 나 정식으로 소개해줘요. 그리고…….”
달아오른 강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세희의 표정은 진지했다. 결국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강준은 세희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이 또한 나름의 즐거움이고 행복이라서. 새의 지저귐 같은 세희의 수다는 아침이 밝아오도록 멈추지 않았다. 행복하고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밖에서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큰 키에 체격이 커다란 남자가 들어오자 침대에서 일어난 조 여사는 흐느끼듯 안겼다.
“인범아!”
정 실장이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수족이자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동아줄. 정 실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품에 안긴 조 여사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연락하고 싶었는데 핸드폰까지 뺏겼어. 그나마 차고 있던 목걸이랑 귀걸이는 안 가져가서 그거 간호사한테 주고 너 잠깐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한 거야.”
물론 간호사가 으름장을 놓긴 했다. 남편이 동의했고 증거 자료가 있고 정신 감정까지 받았으니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그 개자식이 날 배신하고 그 영악한 것 편에 서서 날 여기 집어넣었어. 날 생각하는 척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고 위내시경까지 하라 할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영국을 떠올리니 또다시 분노감에 사로잡힌 조 여사의 눈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이혼하고 나한테 오라고 했잖아요.”
묵직하게 잠긴 목소리에 어린 원망에 조 여사는 안도했다. 아직도 이놈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이자 내가 이놈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사실 두 사람은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다. 입양된 후에도 조 여사는 봉사를 목적으로 보육원을 찾았고 어린 인범을 눈여겨보았다. 머리가 썩 좋진 않지만 신체 조건이 우월한 데다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보육원에 들를 때면 누나처럼 보살폈고 성인이 되어 조폭 생활을 하던 인범을 후원해서 복싱 선수가 되게 했다. 믿음직한 수족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 남몰래 오래 공들인 만큼 인범은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어 주었다.
“이혼을 요구하면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나만 지옥 같은 그 결혼 생활을 참아내면 네가 안전한데.”
“유 부회장이 날 죽이겠다고 협박한 거, 왜 말 안 해줬어요?”
물론 조 여사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정 실장의 눈이 살벌해졌다.
“그럼 네 성격에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라구!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흐윽.”
조 여사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겨우 쥐어짜며 정 실장의 품에 다시 안겼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작은 몸을 꼭 안으며 정 실장이 말했다.
“말해줘요, 누님.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될지.”
눈물 젖은 얼굴을 든 조 여사는 정 실장에게 애처롭게 말했다.
“널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모아 놓은 것들을 다 너한테 주고 싶어서야. 그 개자식이 찾아내기 전에 네가 다 찾아서 가지렴. 넌 그럴 자격 충분하니까.”
“누님도 내 옆에 없는데 그깟 돈이 뭔 소용이라고요!”
예상대로 감동과 분노에 사로잡힌 정 실장을 보며 조 여사는 쾌재를 불렀다. 조 여사는 정 실장에 대해 잘 알지만 안타깝게도 정 실장은 그녀에 대해 몰랐다. 얼마나 영악하고 교활한지, 그리고 뼛속까지 철저한 이기주의인지도. *** 김 비서에게 선전포고한 대로 세희는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타는 금요일인 오늘 저녁은 해외 사업부의 회식 날이었다.
“근데 사장님, 전에 사장님이랑 놀랄 만큼 많이 닮으셨어요. 두 분 다 미인이셔서 그러나 봐요.”
안 닮았으면 이상한 거겠지. 그 전 사장도 나고 지금 사장도 나니까. 하지만 세희는 당황하는 대신 사심 없이 말한 강 대리에게 차분하게 대답했다.
“유 사장님과는 많이 친했어요. 그래서 이노패션 때문에 유 사장님이 힘들어할 때 내 일처럼 도와줬고 도라 몰도 유 사장님 도움 많이 받았어요. 친자매 같은…… 사이였으니까.”
부서 회식을 할 때마다 기존 직원들의 입에서 한 번은 꼭 이 말이 나왔다. 그 전 사장님과 닮으셨어요. 대답을 피하는 대신 세희는 역으로 이용해서 대답하고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기존 직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의심. 무능력한 낙하산이 아닐까. 매각에서 벗어나 급성장하는 이 회사를 말아먹진 않을까 하는.
“너무 친하면 닮는다는 말이 맞나 봐요. 그럼 저도 사장님이랑 친해지고 미인 될래요!”
해외 사업부에서 가장 넉살 좋은 강 대리의 말에 옆에 있던 윤 과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강 대리, 친하게 지내서 미인이 되면 이 세상 다 선남선녀만 있게? 그냥 미인끼리 놀고 미남끼리 놀고 끼리끼리 노는 거라니까?”
“사장님, 저도 사장님 같은 미인이 되려면 의학의 힘을 빌려야 할까요?”
진지한 강 대리의 질문에 세희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모든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내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난 여기 있는 분들 모두가 예쁘고 멋지게 보여요. 자기 관리 철저히 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 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타인을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삶이 최고의 삶 아닐까요?”
강준으로 인해 세희가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타인의 잣대로 내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의 잣대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내가 편하면 되고 하고 싶은 거 하며 행복하면 되는 거니까.
“남의 시선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내 삶을 살라는 거죠? 완전 멋지고 예쁘고 멋진 사장님, 제 술 한 잔 받으셔요!”
“술은 나중에 받을게요. 올해는 금주해야 해서.”
세희의 거절에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희는 식당 입구를 보고 있었다. 차에서 기다리라니까 기어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강준을.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회식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마무리한 후 빠져줘야 할 시간.
“매출의 극대화를 위해선 해외 사업부에서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를 발굴해줘야 해요. 그러니 이노패션 제품에 확신을 갖고 글로벌 영업을 수행해줄 거라 믿고 난 이만 일어날게요. 김 팀장님은 눈치 보지 말고 법인 카드 마음껏 써요.”
앞뒤 꽉 막힌 꼰대 상사가 아니어서일까. 일어나는 세희를 부서원들이 모두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세희는 식당 가운데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강준에게 시선을 둔 채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또 같이 해요. 오늘은 내가 선약이 있어서.”
강준을 발견한 부서원들도 설마 하는 눈으로 세희와 강준을 번갈아 보았다.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는데 그나마 당찬 강 대리가 또 총대를 짊어지고 세희에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저기 서 있는 멋진 남자분이랑 아는 사이세요?”
강준과의 사이를 당장 숨겨야 할지 밝혀야 할지, 세희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회사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게 뻔하니까. 늘 신중한 성격인 만큼 모든 게 확정되고 진행이 된 후에 발설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강준의 눈빛은 오만하면서도 당당했다. 내 여자 내가 데리러 왔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늘 당당한 강준을 볼 때마다 세희도 용기가 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 번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질러보고 싶은 충동적인 순간. 그 충동으로 인해 예상 못 할 풍파를 겪을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그럼 또 감당하고 이겨내면 되지, 뭐. 세희는 강준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할 사람이에요.”
멋진 저 남자가 내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