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이제 밤이고 침대네요.2022.03.10.
하지만 그런 기대도, 걱정도 잠시뿐이었다. 강준이 집요하게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세희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별 의미 없는 다정한 애정표현이란 걸 알면서도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 머리도 잘 쓰지만 손까지 잘 쓰는 이 남자가 떠올라서.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그때였다.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세희의 고막을 울렸다.
“세희 좀 그만 괴롭혀!”
어느새 다가온 연숙이 강준의 손등을 때린 것이다. 살며시 미간을 구기면서도 어깨에 올린 팔은 그대로 둔 채 강준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결혼할 여자한테 애정 표현도 못 해요?”
“상대방이 좋아해야 애정표현이지. 세희 얼굴이 빨개져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거 안 보이니?”
그제야 강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세희의 얼굴에 와 닿았다. 얼굴에 닿는 따가운 시선에도 세희는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까지 봐버리면 강준이 알 것 같아서. 단순한 애정표현에도 반응한 걸 들키기 싫은,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정말 그러네요.”
“거봐, 엄마 말 맞잖니!”
강준의 대답에 세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강준이 세희를 보고 있었다. 왜 얼굴이 빨간지 잘 안다는 눈으로.
“세희 씨, 내가 잘못했으니까…….”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강준의 손이 이번엔 매끄러운 뺨을 가볍게 쓸며 말을 이었다.
“편히 숨 쉬어요.”
나밖에 모르는 짙은 눈동자, 애틋함이 어린 다정한 손길, 낮게 스며드는 듣기 좋은 음성까지. 도대체 숨을 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세희의 얼굴이 더 달아오른 걸 본 연숙이 이번엔 강준의 등을 찰싹 때렸다.
“세희 닳겠다, 닳겠어! 니 녀석 눈에 닳고 손에 닳고! 안 그래도 작고 가늘가늘한 앤데!”
강준을 매섭게 노려보던 연숙의 눈은 세희에게 향하자마자 부드러워졌다.
“엄마가 미안해, 세희야. 내가 아들을 낳은 건지, 짐승을 낳은 건지. 어른들이 있어도 이 정도인데 둘이 있으면 저 엉큼한 놈이 오죽할지 안 봐도 훤하다!”
연이은 연숙의 타박에도 강준은 뻔뻔할 만큼 태연하게 대꾸했다.
“짐승 같은 아들놈이 엉큼한 덕분에 손자 생겼다는 생각은 안 드시고요?”
“어머머, 얘가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
이젠 연숙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강준의 등을 연이어 찰싹 때렸다. 자신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당황하게 만든 강준이 백번 천번 잘못한 건 인정한다. 그래도 강준이 맞는 건 마음이 아파 조심히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사돈, 귀한 손녀사위 그만 때려요.”
자신보다 먼저 말한 미자를 세희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때릴 데도 없는디 자꾸 때리니께.”
키도 크고 체격도 크고 등판도 이렇게 넓은데, 때릴 데가 없다고? 동의 못 하겠다는 눈으로 연숙이 미자를 바라보았다.
“우리 세희 이뻐해주는 건 겁나 고마운디 나도 내 손녀사위가 겁나 이뻐서 그러요. 맞는 걸 보니 내 맴이 영 좋지 않아서.”
“아…… 네.”
“고맙소. 늙은이 말 들어줘서.”
그제야 미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서 회장과 대화를 이어갔다. 미자의 눈치를 보며 연숙이 강준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서강준, 너 대체 사돈어른께 무슨 수로 점수를 딴 거니?”
“점수는 모르겠고 밭에서 채소는 좀 땄습니다.”
강준의 대답에 세희는 작게 풋, 하고 웃었다. 저 비주얼로 밭에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땄을 강준이 상상이 되어서였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게 아쉽기까지 했다. 채소를 따든 수박을 따든, 그 모습도 화보 자체일 남자지만. 하지만 세희와 달리 강준이 미자가 있는 화순에 내려간 걸 모르는 연숙은 눈을 흘겼다.
“뭔 소리야, 대체. 여튼 강준이 너! 세희 홑몸도 아닌데 어지간히 좀 괴롭혀. 알겠니?”
그래도 기어이 타박을 한 번 더 준 후 돌아서려는 연숙의 뒤통수에 강준이 태연하게 물었다.
“손자 한 명으로 만족하시려고요?”
“……뭐?”
무슨 소리냐는 듯 연숙이 다시 돌아보았다.
“속 깊은 세희 씨가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이 여린 몸으로 둘째 셋째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딸을 낳을 때까지요.”
강준의 말에 이번엔 서 회장과 연숙이 동시에 똑같은 반문을 했다.
“딸?”
“딸?”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강준은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희 씨한텐 꼼짝을 못 해서. 한신가에서 딸이 태어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저 녀석이 며느리한테 꼼짝도 못 하긴 하지. 충분히 동의한다는 눈빛으로 서 회장과 연숙이 세희를 보았다. 그러자 강준도 세희를 바라보며 뻔뻔할 만큼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부부 사이가 좋아야 하겠지만. 그렇죠, 세희 씨?”
진짜 딸 갖고 싶어 한 게 누군데. 기가 막히면서도 새삼 서강준이란 남자에게 감탄만 나온다. 이걸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기회주의자라고 해야 할지. 강준은 어른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스킨십을 할 거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준의 뻔뻔함과 당당함이 싫긴커녕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매사 소심하고 걱정 많고 신중한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이 남자가 미칠 만큼 좋아서. 그래서 세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외롭게 자라고 강준 씨도 형제가 없었으니까요. 딸이면 좋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낳아보려구요. 육아가 정 힘들면 어머니한테 도움도 받구요, 그래도 되죠, 저?”
세희의 진심이기도 했다. 딸을 낳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프레가 부모처럼 외롭지 않게 형제자매가 있었으면 해서. 힘들더라도 아이들 때문에 왁자지껄한 가정을 강준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서.
“세상에! 당연히 되지, 안 될 리가 있겠니? 요즘 며느리들은 외모 관리한다고 애를 한 명만 낳겠다고 해서 다 걱정하던데. 아버님, 우리 집에 어쩌다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을까요?”
연숙은 한껏 감격한 표정이었다.
“허허,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며느리 복은 있나 보구나.”
인자한 표정으로 껄껄 웃은 서 회장이 미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면서 말했다.
“사돈, 고맙습니다. 이리 귀한 손녀를 잘 키워서 저희에게 주시다니.”
미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제 손을 잡고 있는 서 회장의 크고 단단한 손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왜 그러시지. 왠지 숙연해진 분위기에 강준과 세희마저도 숨을 죽이고 미자를 보았다. 한참 후, 고개를 든 미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그맣게 말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우리 세희를 이르케 이뻐해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흑흑.”
급기야 말을 잇지 못한 미자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렀다. 얼른 다가간 연숙이 손수건을 챙겨주면서 미자를 토닥거려 주었다.
“실컷 우셔요. 기쁨의 눈물은 마음껏 흘려도 되지 않겠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희도 눈가가 뜨거워져 강준의 품을 파고들었다. 괜찮다는 듯 기꺼이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강준의 품 안에서 세희도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연숙의 말대로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 저녁 식사까지 하고 나서야 미자를 태운 리무진이 화순으로 출발했다. 물론 뒷좌석과 트렁크 가득 연숙이 챙겨준 선물이 얼마나 고가인지 모른 채.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편하고 행복했던 시간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피곤해서. 띠리릭,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강준의 품 안이었고 현관 복도였다.
“힘들게 안고 들어오지 말고 깨우지 그랬어요. 애도 아니고.”
품 안에서 들려온 웅얼거림에 강준은 시선을 내렸다. 잠기운에 취해 몽롱한 눈동자도, 가느다랗게 흘리는 한숨 같은 음성도,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작은 몸도. 안쓰러워 죽을 것 같은데 또 사랑스럽다.
“그냥, 내가 이러고 싶어서.”
늘 명료한 답을 내리던 강준이 어쩔 줄 모르는 기분에 휩싸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 아이를 품고 있음에도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운 이 여자 때문에. 으스러지듯 안아서 존재감을 느끼고 싶으면서도 또 그러면 이 여자가 아플까 봐 걱정 돼서. 이젠 내 여자이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내 아내가 될 텐데. 난 왜 이리도 여전히 안달이 난 건지, 초조한 건지. 자신을 자신답지 못하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를 바라보며 강준이 말했다.
“같이 씻자고 하면 싫다고 하려나.”
“혼자 씻는 게 편해요.”
그 과정이 어떤지 떠올린 듯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내리까는 세희에게 강준은 묻고 싶었다. 그 순진무구한 반응에 내가 더 달아오르는 걸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냐고. 그래서 강준은 또 다른 표현으로 물었다.
“그럼 피곤해 보이니까 씻겨줄게요.”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완전히 잠기운이 달아난 눈으로 세희가 쏘아붙이자 강준은 낮게 웃었다. 세희가 몽롱할 때 어영부영해보려던 유혹이 실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이젠 세희가 침실 욕실에서 씻고 강준이 거실 욕실에서 씻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가운을 입은 강준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번 주에 이노그룹 회장님과 만나기로 했어요.”
옆에 앉은 세희에게 강준은 지금 돌려서 묻고 있었다. 정말 유영국 부회장을 그대로 둘 거냐고.
“이노그룹과 협약을 맺으면 한신에도 득이 있나요?”
“최근 이노화학에서 3대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를 발표했는데 꽤 괜찮더라고. 특히 친환경 비즈니스에 전지 소재 중심의 e-Mobility는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내다보면 협약을 추가로 맺고 투자할 가치는 충분해요.”
세희가 묻는 의도는 하나였다. 이노그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유 회장은 무능한 장남을 버리고 차남을 후계자로 밀어주려는 중이다. 그런데 한신에서 협약의 조건으로 유 부회장을 밀어주면 이노그룹 경영 승계에 간섭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나 때문에 한신이 불리한 협약을 맺는 건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든 약속은 지켜야겠죠.”
세희가 잠시 말을 멈추자 강준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세희가 또 이번엔 어떻게 야무지게 대처할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장남이 원할 때까지 부회장직은 시켜주라고 해요. 단 모든 경영에서 손 떼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자리에도 차남 대동해서 나오라고 하구요.”
그 날 영국과의 식사 자리에서 차남이 나온다고 말했던 건 강준의 계략이었다. 그래야 동생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영국이 안날 나서 세희의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까. 새삼 세희는 느끼고 있었다. 강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편하고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 혼자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남자가 하는 일이면 뭐든 완벽할 테니까.
“유 부회장을 허수아비 부회장으로 만들겠다?”
“네. 굳이 부회장에게 경영을 맡겨야 한다는 법칙은 없잖아요. 자존심이란 게 있으면 버티다가 알아서 물러나겠죠.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면 그건 차차 또 방법을 강구해서 물러나게 만들면 되구요.”
세희는 자신이 한신과 이노의 관계에 치트키가 되길 바랐다. 사생아라고 해도 생물학적 친부가 이노그룹의 장남인 이상, 두 그룹을 이어줄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대신 그 자리에 차남을 대동하라고 함으로써 유 회장이 원하는 경영 승계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이고. 그렇게 차곡차곡 생각 정리를 하는데 옆얼굴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트니 강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예비 신부께서 치밀한 계략녀가 된 것 같은데.”
“치밀한 계략남인 예비 신랑님에게 배운 건데요?”
스승이 좋으니 제자도 훌륭할 수밖에. 뭐든 단계적으로, 당장 눈앞을 내다보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참고 기다리고. 그걸 세희에게 알려준 건 강준이었으니까.
“계략녀인 거 인정한다는 거네.”
“악녀에 요녀는 이상형이라면서요. 계략녀는 이상형이 아니에요?”
얄미울 만큼 단아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세희는 앙큼하고 도발적이었다. 적어도 강준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어떤 모습인들 이상형이 아닐까.”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한 강준은 세희를 번쩍 들어 자신의 몸 위에 올렸다. 얼떨결에 마주 본 자세로 앉은 세희에게 강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님은 잘 내려가셨고, 결혼 날짜도 정했고,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했고. 이제 밤이고 침대네요.”
“……?”
“내가 증명한다고 했을 텐데.”
강준은 타들어가는 눈으로 세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침대 위에 손을 늘어뜨렸다. 내가 주세희에게 가장 져주는 시간이 돌아왔으니 날 마음대로 해보라는 무언의 의사 표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세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던 세희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정말 얌전하게 누워서 다 져 줄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락 흘러내린 머리칼이 강준의 얼굴을 간질이고 속삭이듯 토해내는 달콤한 숨결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무엇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아찔해져 몸이 달아올랐다.
“뭐든지.”
허스키한 음성으로 얌전히 대답하는 강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세희가 입술을 포개어왔다. 하란다면 못 할 줄 알고요. 마지막 속삭임은 강준의 입안에서 녹아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