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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낮져밤이 vs 낮져밤져. (97/110)

97. 낮져밤이 vs 낮져밤져.2022.03.06.

무감한 눈으로 조 여사를 바라보며 세희는 어제를 떠올렸다. 강준이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미자는 서울 집에 저녁 즈음 도착했다.

16564558985018.jpg‘숙녀분끼리 오늘 마음껏 수다 떨고 편히 자요. 난 오늘 호텔에서 잘 테니까.’

그런데 미자가 차에 타려는 강준에게 툭 말을 내던졌다.

16564558985023.jpg‘이거 싹 가꼬 가서 자네 식구들 줘. 내 새끼 잘 부탁한다고 나가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께.’

두 사람의 시선이 꽉 찬 트렁크로 향했다. 세희는 딱 봐도 미자가 바리바리 싸 온 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손수 만든 된장과 고추장, 직접 키운 채소들, 말린 나물들일 것이다. 그런데 강준이 웃으면서 미자에게 대답했다.

16564558985018.jpg‘이왕 서울까지 힘든 걸음 하셨으니 내일 만나서 직접 전해주세요. 그럼 어른들도 기뻐하실 겁니다.’

허리를 숙인 강준이 대답을 못 하는 미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이었다.

16564558985018.jpg‘상견례도 안 하시고 내려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저 얼른 세희와 결혼하고 싶은데. 손녀분이 얼마나 예쁨받는 며느리인지 확인도 하시구요.’

기어이 미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강준은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세희는 강준이 없는 집에서 미자에게 4년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정확히는 조 여사를 정신 병원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미자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을 아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병원에 있는 조 여사에게, 미자는 모녀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조 여사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왔는데도, 모질게 돌아섰다. 하지만 세희는 보았다. 등을 돌리자마자 울음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던 미자의 얼굴을. 당신이 뭔데 끝까지 할머닐 아프게 해. 분노를 가라앉히며 세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16564558985088.jpg“대답은 굳이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지금 이모만 봐도 답이 충분히 나와서.”

파들거리는 눈꼬리에 주름이 가득한 조 여사는 확 늙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헐렁한 환자복은 볼품없었다. 세희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16564558985088.jpg“마음 아프게 왜 이렇게 폭삭 늙었어요, 이모?”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당신이 망가지는 걸 좀 더 느긋하게 지켜보고 싶은데. 물론 충격이 크긴 했겠지. 처음엔 딸이, 그리고 남편이, 마지막엔 늘 제 편이던 엄마가 당신을 버렸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지금 이 순간, 내가 당신 앞에 있어.

16564558985096.jpg“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기어코 널 죽여버릴 거야!”

조 여사의 발악에 세희는 희미한 비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16564558985088.jpg“이모, 지금 상황에선 차라리 여기 있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아, 혹시 내가 건드리지 않은 돈 때문에 그래요? 그 돈, 어차피 나와도 쓰지도 못하고 자랑도 못 할 텐데?”

조 여사는 세희의 말을 당장 이해 못 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세희는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16564558985088.jpg“요즘 이상하단 생각 안 들었어요? 백화점에서 이모에게 보여주는 물건만 봐도 알 텐데. 직속 담당자는 연결이 잘 안 되고, 작년 재고 상품조차 사기 힘들고. 이모가 뭐만 사겠다고 하면 누가 다 채가고.”

16564558985096.jpg“……!”

16564558985088.jpg“그뿐일까요? 이모가 하는 모임은 죄다 없어지고, 어딜 가도 사람들이 이몰 피하는 것 같고. 최근에 지인들 만난 적이 있긴 해요?”

사실 세희도 그날 연숙과 식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세희를 끔찍하게 예뻐하던 연숙이 자신의 방식대로 조 여사에게 복수했다는 걸. 연숙의 복수는 평범하면서도 조 여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조 여사가 가장 신경 쓰는 게 패션이고 사교 모임이었으니까. 세희라면 절대 생각해내지 못할 복수방식이었다.

16564558985096.jpg“그게 모두 네 짓이었어?”

그제야 무언가 떠오르는 듯 조 여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벌벌 떨던 담당 쇼퍼는 바빠서 못 오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열 받아서 매장을 찾아가면 작년 재고나 보여주고 그것조차 팔 생각 없는 듯 무성의했다. 돈 없어서 물건 구경만 하는 거지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이끌던 사교모임에서도 일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더 기가 막힌 건 새로운 모임 몇 개가 생겼는데 가입 조건이 조 여사와 겹치는 모임에 들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모든 걸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서 당하는 무시로 여겼는데. 그래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독하게 다짐했는데. 내가 제자리로 원상 복귀하는 그 날, 니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가 싸그리 갚아줄 거라고. 그런데 그 모든 일의 배후가 영악한 저것이었다니!

16564558985088.jpg“저 몰래 시어머니께서 하신 일이에요. 강준 씨야 이모가 결혼 사기 친 것에 대해서 조용히 넘어가겠다고 했지만 어머닌 아니셨거든요.”

세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시어머니란 호칭에 조 여사는 눈을 희번득하게 떴다.

16564558985088.jpg“그러니까 서로 윈윈하는 제안을 했을 때 받아들이고 조용히 살았어야죠. 왜 남자들까지 고용해서 몹쓸 짓을 시켜요?”

16564558985096.jpg“넌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니까! 죽이지 않고 살려둔 걸 고맙게 여겨야지!”

16564558985088.jpg“사실 이모한테 한 가지 고마운 일이 있긴 해요. 이모 덕분에 강준 씰 만났고 좋은 시댁 식구들까지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세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16564558985088.jpg“최고의 혼수를 이 배에 품고 한신가의 며느리가 당당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16564558985096.jpg“너 설마, 임신했어?”

16564558985088.jpg“이제 5개월 되어가요.”

16564558985096.jpg“……!”

16564558985088.jpg“이모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죠? 한신가의 아이를 가지고 며느리가 되고. 할아버님과 어머님이 원하는 한신 계열사가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지금 고민 중이구요.”

얄미울 만큼 차분한 세희의 대답에 조 여사는 분노가 터진 듯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16564558985096.jpg“아아아악! 내가 널 찢어 죽이고 말 거야! 이 악독한 년! 악마 같은 년!”

남자 간호사들마저 그 광기 어린 몸부림에 쩔쩔맬 정도였다. 급기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조 여사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았다. 몸부림이 잦아드는 조 여사를 남자 간호사가 침대로 데려가 손목을 묶었다. 침대로 다가간 세희는 조 여사를 내려다보았다. 일말의 자비심도 측은지심도 못 느끼는 건조한 눈으로. 정신이 몽롱해지는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는 조 여사에게 세희는 허리를 기울였다.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으며 조 여사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여주었다.

16564558985088.jpg“배 속에 있는 이모 조카, 아들이래요.”

아직 잠들기 전, 이 한마디는 조 여사가 들어줬으면 해서.

16564558985088.jpg“한신가의 두 번째 후계자가 될.”

마지막 발악을 하듯 조 여사는 손을 퍼덕거렸다. 네일이 거의 벗겨진 손톱에서 마지막 남은 큐빅이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너덜거렸다. 마치 조 여사의 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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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원을 나온 두 사람은 서 회장의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유독 말이 없는 미자를 바라보던 세희는 덤덤히 물었다.

16564558985088.jpg“내가 이모 병원에서 꺼내주면 좋겠어?”

16564558985023.jpg“…….”

16564558985088.jpg“할머니가 원하면 지금 당장은 안 되지만, 이모 상태 봐서 나중에 그래 줄 순 있어.”

미자의 마음을 모질게 할퀴어놓은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세희였다. 조 여사가 미자에게 얼마나 아픈 손가락인지 알기에. 남은 생을 미자가 편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하지만 세희의 예상을 뒤엎고 미자는 벌컥 했다.

16564558985023.jpg“천벌 받을 짓을 했는디 머 이쁘다 꺼내줘! 무선 사람들 모아 놓은 감방에 안 처넣은 걸 감사히 여겨야제!”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희의 손을 미자가 꼭 잡았다.

16564558985023.jpg“세희야, 이제 할미는 니가 전부다. 너만 잘 살믄 되는겨. 알것제?”

죽을 때까지 가슴에 아프게 품고 있으려 했던 딸을 미자가 드디어 놓은 것이다. 오로지 손녀를 위해서. *** 본가 뒤에 위치한 작은 별채에서 두 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식당은 미자가 불편해할까 봐, 또 집이 너무 크면 위축이 될까 봐, 연숙이 보인 섬세한 배려였다. 미자의 선물을 보고 연숙은 보는 이가 민망할 만큼 과한 리액션을 보였다. 자신도 미자에게 선물을 잔뜩 주겠다고 호들갑을 떤 후에야, 별채의 정원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어색해하던 미자도 서 회장과 연숙이 세희를 진심으로 예뻐한다는 걸 느끼곤 눈에 띄게 편안해 보였다. 이 식사를 주도하는 연숙의 해맑은 성격 덕분에 식사는 즐거웠고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남남이었던 두 가족이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는 건 세희에게 또 다른 낯선 행복이었다. 거기까지 분위기는 참 좋았다. 세희가 프레의 성별을 알리기 전까지는. 뒤늦게 강준은 서운해했지만, 어른들은 아들이라고 말하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16564558985023.jpg“와아, 아들이라구?.”

16564558985023.jpg“흐음, 아들이구나.”

서 회장도, 연숙도 뭔가 반응이 시원찮았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닌 느낌? 세희가 조심스럽게 빤히 바라보자 연숙이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16564558985023.jpg“세희야, 엄만 너무 기뻐.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고 했던 말은 진짜라니까?”

굳이 안 물어본 걸 굳이 대답하시는 이유가 뭘까. 이쯤 되니 세희는 알 수 있었다. 두 분이 말로 표현 안 했지만 내심 손녀를 바라고 있었다는 걸.

16564558985023.jpg“제 아빠를 쏙 닮아서 얼마나 똑똑하고 야무진 손자겠어요! 서 씨 집안 남자들 유전자가 얼마나 강한데. 그렇죠, 아버님?”

16564558985023.jpg“그럼! 제 아빠를 아주 쏘옥…… 닮았겠지.”

세희가 조심히 그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아무래도 두 분은 질린 것 같았다. 너무 완벽해서 자식이 자식 같지 않고 손자가 손자 같지 않은 서 씨 집안 남자 유전자에. 서 회장과 눈빛 교환을 한 연숙이 다시 말했다.

16564558985023.jpg“그래서, 아버님과 내 선물은 골랐니?”

16564558985088.jpg“아직이요.”

16564558985023.jpg“어머, 얘는! 너 그렇게 욕심 없어서 어쩌려고 그러니?”

연숙이 타깃을 미자에게 돌렸다.

16564558985023.jpg“세희 할머님, 저랑 아버님이 세희 임신 축하 선물을 주고 싶은데 아직도 안 고른 거 있죠? 이건 어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요? 선물 줄 게 지금 잔뜩인데.”

강준의 가족이 얼마나 세희를 예뻐하는지 두 눈으로 보았기에 미자도 편한 마음으로 연숙의 편을 들었다.

16564558985023.jpg“세희야, 이럴 땐 ‘고맙습니다’ 하고 두 손 무겁게 받아도 되는 거여.”

할머니, 그 선물이 할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선물이 아니에요. 차라리 양손으로 무겁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이면 기꺼이 받겠는데. 두 분 스케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크단 말이에요. 하지만 말해보아야 무슨 소용일까. 회사를 주겠다고 말한 걸 알면 미자도 놀랄 텐데. 그래서 세희는 두 분의 통 큰 선물은 시크릿으로 남기기로 했다.

16564558985088.jpg“알았어요, 할머니.”

세희가 모호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하자 어른들은 그제야 결혼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세희는 강준의 옆에 조심히 앉아 속닥거렸다.

16564558985088.jpg“강준 씨, 아들이라고 해서 두 분 실망하신 것 맞죠?”

16564558985018.jpg“실망은 무슨.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손자가 생겼는데 기뻐하는 거예요.”

16564558985088.jpg“아닌데…….”

의심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는 세희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 강준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16564558985018.jpg“물론 딸이었으면 더 기뻐하셨겠지만.”

16564558985088.jpg“……딸을 더 원하셨구나.”

16564558985018.jpg“세희 씨가 두 분 이해해줘요. 한신가에서 지금껏 딸이 태어난 적 없어서 서운한 걸 테니.”

딸이 태어난 적이 없다고? 못 믿겠다는 듯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준이 대답했다.

16564558985018.jpg“망할 서 씨 집안 유전자라는 그 말이 괜히 나온 줄 알아요? 서 씨 집안 남자들이 맘고생을 하도 시켜서 아내들이 한신가에 엿 먹으라고 절대 딸을 안 낳아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16564558985088.jpg“맙소사.”

서 씨 집안 남자들의 유전자가 성별 싸움에서도 안 밀린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세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16564558985088.jpg“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세희의 중얼거림에 강준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64558985018.jpg“뭘 걱정해요, 아내는 젊고 남편은 체력이 차고 넘치는데. 세희 씨 말대로 리틀 주세희 낳을 때까지 열심히 하늘 보고 별 따면 되지. 난 자신 있거든.”

그 말을 하필 여기서 하는 이유가 뭔데요! 달아오른 얼굴로 강준을 노려보던 세희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16564558985088.jpg“임신이 문제가 아니라 성별이 문제잖아요. 나도 딸을 못 낳으면 어떡해요?”

세희의 물음은 곧 또 다른 의미였다. 내가 서 씨 집안의 강력한 유전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라는.

16564558985018.jpg“그럴 리가. 주세희가 아니면 누가 한신가에 딸을 낳아준다고.”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세희의 귓가에 강준이 나직하게 속삭여주었다.

16564558985018.jpg“이유 불문, 장소 불문. 난 늘 주세희에게 지는데.”

16564558985088.jpg“……?”

16564558985018.jpg“특히 침대에서.”

16564558985088.jpg“강준 씨가 낮져밤이의 정석이란 생각은 안 하구요?”

세희가 절대 인정 못 하겠다는 듯 대꾸하자 강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6564558985018.jpg“이런, 못 믿는 눈치네.”

그럼 당신 같으면 믿겠어요? 열렬한 눈빛 항의에 피식 웃은 강준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달콤하게 속삭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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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4558985018.jpg“그럼 오늘 밤 증명해줄게요. 내가 얼마나 낮져밤져의 정석인지.”

그 은밀한 선전포고에 기가 막혀서 화도 안 나고, 너무 뻔뻔해서 할 말도 없고. 멍한 표정을 짓는 세희가 귀여웠는지, 강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세희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 야한 어흥이가 또 무슨 꿍꿍인지 걱정 반, 그런데도 왠지 설레는 기대 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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