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리틀 주세희를 낳을 때까지.2022.03.03.
이른 새벽, 잠을 설친 미자는 마루로 나왔다. 평소라면 일어나자마자 물을 마신 후 누룽지로 끼니를 때우고 밭으로 바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새벽이 걷히고 아침이 다가오는 걸 마루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았다. 울음을 참던 얼굴로 손녀가 했던 말들이 잊히질 않아서.
‘할머니가 귀에 못 박히도록 말했죠. 영희는 불쌍한 애라고. 오죽 힘들면 그러겠냐고. 그럼 나는 할머니?’
손녀의 젖은 눈동자가 미자에게 묻고 있었다. 난 안 불쌍해? 난 안 힘들어? 난 평생 불행해야 해? 그제야 미자는 깨달았다. 손녀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든 것도,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 끝난다는 그 악연도, 손녀가 영희의 사위를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 놓고선 손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흐윽! 내가 죄인이여. 내 강아지 불쌍해서 어찌누.”
얄팍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미자는 통곡했다. 쌍둥이 중 몸이 약한 첫째를 보육원에 버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미안함에 영희의 악독한 행위를 눈감지 않았더라면. 이놈의 몸뚱이가 원인불명의 발작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모두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지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아픔과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감당한 건 세희만의 몫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손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이 초라하고 비참했다.
“미안하다, 세희야. 미안해, 이 할미가.”
울음을 멈춘 미자는 주머니에서 구깃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았다.
‘할머닌 아직도 나보단 이모예요? 손녀보단 딸이야?’
손녀의 그 질문에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처음엔 당연히 손녀보다는 딸인 영희였다. 버렸다는 미안함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녀보단 영희가 그저 안쓰러웠으니까. 그래서 그 어린 것에게 따스한 눈길 한 번,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었다. 비좁은 방 한구석을 내어주고, 밥만 챙겨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혼자서 무럭무럭 자란 손녀가 이젠 자신을 끔찍하게 보살피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미자는 슬리퍼를 신고 옆집으로 향했다.
“만호 있냐?”
미자의 부름에 부엌에서 뛰쳐나온 만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님이 뭔 일로 밭에 안 나갔당가?”
미자는 세희가 마련해준 핸드폰을 만호에게 내밀며 말했다.
“세희한테 전화 한번 걸어봐라.”
***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 신호가 걸릴 때마다 입을 맞추는 대신, 강준은 곤히 잠든 세희를 보고 또 보았다. 임신 초기에는 그렇게 잘 못 자더니, 배가 살짝 나온 만큼 몸이 더 힘든 걸까. 부쩍 잠이 많아진 세희였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간지럽기도 하고 뜨끈하게 데워지기도 하고. 앙증맞게 부푼 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들썩거리기도 하고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세희는 좀처럼 일어날 줄을 몰랐다.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강준은 손등으로 세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두려울 만큼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눈앞의 여자가 내 여자가 맞는지. 이 작고 가녀린 여자가 내 아이를 품고 있는 게 맞는지. 이 여자가 날 사랑하는 게 맞는지. 눈을 감았다 뜨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건 아닌지. 다행스럽게도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벌써 도착했어요?”
강준은 아직도 잠에 취한 내 여자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러게요, 벌써 도착해버렸네.”
잠을 깨려는 듯 느리게 깜빡거리는 풍성한 긴 속눈썹을, 작게 하품하는 도톰한 입술을, 강준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작은 것 하나까지도 예쁜 건지. 마음 같아선 남은 5분의 여유 동안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출근 전까지 어지간히도 키스에 집착한 탓에 세희가 오늘은 키스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아침에 할머니한테 전화 왔었어요. 이모를 만나고 싶대요.”
“……병원에 있는 건 아시고?”
“아직이요. 전화로 설명하기엔 복잡해서.”
차분히 대답하는 목소리와 달리 세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제 미자의 속을 아프게 하는 말을 참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세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강준은 차분히 말했다.
“힘드셔도 할머님이 한 번 올라오시긴 해야 해요. 서울 구경도 하시고, 손녀 사는 집도 와보시고, 우리 가족도 만나보시고. 그래야 결혼 날짜를 정하지.”
“…….”
“그래서 말인데, 내가 뭘 해주면 돼요?”
그제야 세희도 강준을 보았다. 늘 나만을 바라보는 올곧은 눈을, 뭐든지 해줄 거라고 말하는 남자를. 이 남자가 있기에 불안하지 않고 외롭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인생의 태양 같은 존재. 나도 당신에게 태양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은 건 욕심일까. 깊어지는 세희의 눈빛을 오해한 강준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번에도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면 나 서운할 것 같은데.”
강준과 이렇게 되기까지 참 많이 돌고 돌았지만 깨달은 진실이 있었다. 강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민폐가 아니라 이 남자에게 확신을 주는 거라는 걸. 내가 당신을 믿고 사랑한다는. 그래서 이제 세희는 미안해하지 않고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크든 작든, 그게 뭐든지.
“강준 씨가 최대한 편하게 할머니 모셔와 줄 수 있어요?”
최대한 편히 모셔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강준의 말을 세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속은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남자니까. ***
“태아가 이제 주 수에 맞게 잘 크고 있네요.”
잘 먹고 잘 자고 배도 살짝 부풀었고. 그게 모두 프레가 잘 크고 있다고 몸에서 보내는 신호였나 보다. 강준과 세희를 번갈아 본 의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흐음, 어디 한번 보자. 예쁘고 잘생긴 부모님을 만난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의사가 한 말의 의미를 알기에 세희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는 기분 좋은 기대감이고 설렘이었다. 웃음기 어린 의사의 시선이 여전히 담담한 표정의 강준에게 향했다.
“아기가 아빨 닮아서 아주 잘생겼겠어요.”
그 순간 세희는 직감했다. 우리 프레가 아들이구나. 두 사람은 의사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후 진료실을 나와 대기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님이랑 어머니껜 이번 주말에 식사하면서 말해요, 우리. 전화로 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요.”
무성의한 대답에 여전히 무심한 표정. 그런 강준에게 세희는 조금은 서운한 듯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강준 씨 말대로 아들이니까 좋아해야지.”
“그러게요, 기쁠 줄 알았는데.”
중얼거리듯 대답한 강준은 그제야 세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리틀 주세희를 기대했나 봐요.”
“……딸이요?”
“엄말 닮아서 환장하게 예쁠 것 같거든.”
뒤늦게 강준의 얼굴에서 서운함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서, 프레가 아들이라서 싫어요?”
“싫을 리가, 그냥 좀 아쉽다는 거지.”
좀이라는 말과 달리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남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삼대째, 한신가는 아들 한 명밖에 낳지 못했다는데 그럼 나도 그럴까. 고민을 끝낸 세희는 강준의 손을 꼭 잡았다.
“한신의 로열패밀리라는 타이틀도 깨게 생겼는데, 이참에 한신가의 전통도 한번 내가 깨보죠, 뭐.”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는 강준에게 세희는 싱긋, 웃어보였다.
“리틀 주세희를 낳을 때까지, 둘이든 셋이든 힘닿는 데까지 낳아보자구요.”
비록 자신은 외롭게 컸지만, 프레만은 그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뭐든 누리지 못하고 자란 자신과는 다르게 뭐든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북적이는 집, 가정.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선물.
“나 혼자선 안 되는 건데. 강준 씨가 같이 노력해줄 거죠?”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세희를 강준은 꽉 끌어안았다. 요즘 새로 생긴 강준의 습관이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 물론 그보다 더 훌륭한 대답은 없겠지만.
***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도 조 여사는 반쯤 미쳐 있었다. 병실의 문이 열리는 건 식사 시간뿐.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내 안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이고, 오늘은 몇 월 며칠이고. 모든 것들에 서서히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이곳은 정신이상자를 수감하는 병원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그런 병원이었다. 급기야 벽에 머리를 박고 자해를 하자 체격이 건장한 남자 간호사 둘이 들어왔다. 강제로 침대에 눕혀지고 손목이 묶이고 팔뚝에 주사기가 꽂힌 순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정신이 다시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머리는 몽롱하고 시야는 흐리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자 또렷해진 시야로 누군가 들어왔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백발을 뒤로 쪽진 헤어. ……그 여자다. 나를 낳아주고 동생 대신 몸이 약하단 이유로 보육원에 날 버린. 달라진 게 있다면 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눈이 지금은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나 앉어, 손 묶고 있던 줄은 풀어달라 했으니께.”
침대에 앉은 조 여사는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미자를 노려보았다.
“세희 해치라고 남자들까지 보냈다매. 참말로 영희 네가 그런겨?”
“누굴 탓 해. 제 엄마의 더러운 피를 물려받아서 똑같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하니 벌 받는 건 당연한 거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애였잖아. 그건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아니야?”
조 여사가 코웃음을 치며 한 말에 미자가 꽥 소리 질렀다.
“주둥이 닥쳐, 이것아! 니가 일부러 정희한테 니 남편 접근시킨 거 내가 모를 줄 알어? 그래서 정희가 애 배면 그 애까지 뺏어갈라고 했잖어! 정희한테 먼저 몹쓸 짓을 한 건 너라고 이것아!”
난생처음 보는 미자의 분노에 조 여사는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미자는 눈꼬리를 파들거리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만 아니었으면 니 동생 그리 불쌍하게 안 갔어! 내 손녀 그리 짠허게 키우지도 않았고 우리 모녀 풍족하게는 못 살아도 잘 살았을 거여! 정희 그것도 좋은 놈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말이여!”
주름진 미자의 눈꼬리 끝에 급기야 눈물이 어렸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딸 정희가 생각나서, 안쓰럽게 자란 세희가 생각나서.
“그래도 널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세희한테 널 이해하랬다! 그 어린 것한테 따땃한 말 한마디 못 해주고 안아주지도 못하고 키웠어! 근디 이젠 괴롭힌 것도 모자라 해하려고까지 해?”
“그게 왜 내 탓이야? 지 엄마나 그 딸년이나 남의 남자 탐내는 건 똑같은데! 그럼 죽어 마땅하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악다구니를 쓰는 영희를 바라보는 미자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니라 짐승 새끼를 낳았구나. 너무 뒤늦게 얻은 깨달음이었다. 미자는 병실 안을 눈으로 훑었다.
“깨끗하고 넓고 좋구먼. 밥도 잘 나온다던디.”
조 여사는 기가 막혀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 미친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염장 지르러 온 것도 아니고.
“여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라. 다신 내 새끼 괴롭힐 생각 허지도 말고.”
미련 없다는 듯 일어나 돌아서는 미자의 등을 본 순간, 조 여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세희를 설득할 유일한 사람이 미자라는 걸.
“엄마!”
구역질이 나려는 걸 참으며 난생처음 불러온 말이었다. 미자가 걸음을 멈추자 조 여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 나한테 지은 죄 있잖아. 그거 지금 갚아. 세희 그거 설득해서 나 여기서 빼주라고 하라고! 그럼 나 당신 용서할게! 당신 딸 할게!”
하지만 천천히 돌아선 미자의 표정이 고집스럽다.
“아니, 이젠 나 니 엄마 안 할란다.”
그 말에 조 여사는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그래서, 날 또 버리고 외면하겠다고? 내가 약하고 힘없을 때? 딸이 엄마를 진짜 필요로 할 때?”
“니한테 지은 죄는 지옥 가서 달게 받으마.”
“아니, 지금 책임져! 날 여기서 빼내라고!”
다시 돌아서는 미자에게 조 여사가 달려들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건장한 남자 간호사 두 명이 빠르게 들어와 조 여사를 붙잡았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 놔, 이거 안 놔! 엄마, 엄마아아!”
하지만 미자는 조 여사의 악 받친 그 부름에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나 당신 절대 용서 안 해! 그 더러운 것이랑 같이 당신도 내가……?”
또각또각. 닫히지 않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산뜻한 하이힐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곧이어 가느다란 실루엣이 문을 통과해서 병실 안으로 넘어왔다. 허리에서 찰랑거리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 여전히 차분한 눈빛과 날씬한 몸매와 곧은 자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고가의 명품을 휘두른 세련된 옷차림. 꾀죄죄한 환자복을 입고 있는 자신과 달리 우아한 귀부인처럼 나타난 건, 주세희였다. 눈이 뒤집혀 달려들려는 조 여사의 팔을 우악스러운 손이 뒤에서 비틀어 잡았다.
“기분이 어때요, 이모?”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는 조 여사의 눈을 바라보며 생긋 웃은 세희가 한걸음 다가왔다.
“너, 너!”
얼굴을 가까이하고 조 여사의 귓가에 세희는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에게 배신당하고, 남편에게 외면당하고, 이젠 엄마에게까지 버림받은 기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