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천생연분입니다.2022.02.27.
너무 놀란 미자에게 다가간 강준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할머님. 서강준이라고 합니다. 세희 씨와…….”
“강준 씨, 나머진 내가 말할게요.”
강준의 말을 조심히 자른 세희는 미자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잠시의 침묵 후, 세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나 강준 씨랑 결혼하려구요.”
“너 시방 할미한테 결혼하겠다 한 거여? 밖에 저 훤칠한 총각이랑?”
아직 전후 사정을 모르기에 미자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강준이 왜, 그리고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하지만 미자에게 세희는 차마 웃어줄 수 없었다. 그 대신 주름진 미자의 손을 가만히, 그리고 꼭 잡았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진심이 맞잡은 손을 통해서 전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할머니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어요. 강준 씨는 이모 사위였어요.”
예상대로 미자는 바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도 알죠? 내가 태령 언니 대신 결혼식 올린 거. 태령 언니 남편이 바로 강준 씨예요.”
그제야 이해를 했는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미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근데 왜 니가 영희 사위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여?”
“강준 씨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요. 태령 언니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혼 후에 외국으로 떠났어요. ”
“……!”
“강준 씨랑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지낸 건 나예요. 강준 씨 부모님도 결혼 허락해주셨고, 나 오늘 할머니 허락받으러 내려온 거예요.”
“안 된다, 세희야! 너마저 영희한테 그러면 어쩌자는 거여. 무슨 낯으로 내가 영희를 봐.”
간절히 바랐건만,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모한테 잘못한 건 할머니랑 엄마지, 내가 아니에요. 근데 왜 내가 두 분 잘못까지 책임져야 해요?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왜…….”
책임져야 하냐구.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미자에게 아픈 못처럼 박힐 거라는 걸.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도 이젠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한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여자로서. 붉어진 눈으로 미자를 바라보며 세희는 물었다.
“할머니가 귀에 못 박히도록 말했죠. 영희는 불쌍한 애라고. 오죽 힘들면 그러겠냐고. 그럼 나는 할머니?”
난 안 불쌍해? 난 안 힘들어? 난 평생 불행해야 해? 미자에게 수도 없이 묻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하고 늘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켰던 말이었다.
“이모도 핏줄이고 가족이랬죠? 근데 핏줄이고 가족이면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근데 왜 나만 이모를 가족으로 여겨야 해요?”
난생처음 듣게 된 손녀의 가슴 아픈 속내에 미자는 끄억끄억 울기 시작했다.
“세희야, 할미가 잘못했다. 다 할미 잘못이니까…….”
“아니. 이제 할머니도 엄마도 상관없어요. 이모랑 나랑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 끝나는 악연이거든.”
동생 대신 엄마에게 버림받고, 동생에게 남편을 빼앗길 뻔하고. 엄마를 향한 원망과 동생을 향한 증오를 감당해낸 건 세희였다. 할머니의 손녀로, 엄마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이모한테 마지막 기회를 줬어요. 근데도 이모는 그 기회를 차버리고 돈 주고 남자들을 사서 날 해치려고 했어요.”
“여, 영희가 참말 그랬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미자의 표정에 세희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강준 씨랑 결혼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겠죠. 이제 더는 안 참아. 할 만큼 했고 참을 만큼 참았으니까.”
프레를 위해서 세희는 못되고 독해지고 있었다. 아버지란 작자는 협박하고 이용하고, 이모는 정신 병원에 가두고, 할머니 가슴에는 못을 박으면서까지. 이보다 더한 막장이 있기는 할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자이고 가장 바쁜 남자가 할머니한테 예쁨받는 손녀사위 되겠다고 시골 내려와서 이러고 있어요. 오로지 나를 위해서. 그런 남자 아니면 난 누구랑 결혼해야 하는 건데?”
차분한 말투와 달리 머리에선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라고 안 버틴 줄 아냐고, 나라고 처음부터 좋다고 한 줄 아냐고. 내 가슴을 내 손으로 피가 흐르도록 할퀴면서 독하게 버티고 거부했다구. 그런데도 이 남자가 날 포기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버텨. 이렇게 부족하고 못난 날 사랑해주겠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할머닌 아직도 나보단 이모예요? 손녀보단 딸이야? 아니잖아.”
꾹 감은 미자의 주름진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뚝뚝 흐른다. 그 눈물을 바라보며 세희는 간절하고 애틋하게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날 정말 사랑한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면, 이 결혼 허락해줘요.”
세희는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미자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배에 댔다.
“배 속에 있는 증손주를 위해서라도요.”
미자의 눈물이 멈추었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 잠긴 눈동자가 세희의 배로 향했다. *** 네 사람의 늦은 저녁이 시작되었다. 만호의 능숙한 손길 아래, 솥뚜껑 위의 두툼한 삼겹살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접시에 잘 익은 고기가 올라오면 대부분은 강준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세희와 미자가 같이 강준에게 고기를 챙겨주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밥과 쌈장만 넣고 오므리려는 세희의 쌈 위에 삼겹살을 올리며 강준이 말했다.
“주 수에 비해 태아가 작을 땐 단백질 섭취를 잘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세희가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조심히 뺐다.
“저 원래 솥뚜껑 삼겹살 좋아하는데 오늘은 안 땡겨요.”
“입덧 때문에 그래요?”
강준이 걱정스럽게 묻자 세희는 생긋 웃어보였다.
“어제부터 입덧은 가라앉았어요. 어제 강준 씨 가족이랑 식사할 때 갈비찜에 밥 두 그릇 뚝딱 했거든요. 입덧은 아닌 것 같고 음식을 좀 가리는 것 같아요. 아니면, 기름진 음식에 좀 예민하나?”
“근데 갈비찜은 괜찮았고?”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강준이 묻자 세희는 정색했다.
“날마다 갈비찜 포장해 올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러면 안 되나?”
맙소사, 정말 그럴 생각이었나 보다. 결국 세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날마다 먹으면 질리거든요?”
“그럼 일주일에 두 번. 어때요?”
“좋아요.”
이번엔 세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강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튼 강준은 미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볼 땐 언제고, 언제 그랬냐는 듯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없는 말수가 없는 미자는 방에서 나온 후 아예 입을 닫고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준은 조금의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과 입은 닫았지만, 손녀사위를 챙겨주느라 세희 못지않게 미자의 손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호가 넌지시 귀띔해준 말이 있었다.
‘우리 누님은 귀한 손님한테만 괴기를 구워줘. 나도 내가 구워만 줬제 얻어먹은 적이 없다니까? 아무래도 자네가 점수를 단단히 땄나벼.’
주세희가 결혼 허락을 받았고, 강준은 점수를 땄고. 손녀사위로서 예쁨받는 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정과 함께 차근차근 쌓아가면 될 일이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 전화를 받겠다고 세희가 방으로 들어간 후, 강준은 미자에게 다가갔다.
“할머님.”
강준의 부름에 움찔하면서도 미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희를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면서 평생 사랑하고 아껴주겠습니다. 그러니 손녀 걱정은 이제 안 하셔도 됩니다.”
“…….”
“일이 바빠서 자주는 못 내려옵니다. 하지만 두 달에 한 번은 꼭 내려와서 오늘처럼 할머니 일 도와드리고 저녁 얻어먹을 겁니다.”
“…….”
“손녀사위 예뻐해 주실 때까지 내려오겠다고 지금 선전포고하는 겁니다. 할머님이 절 진심으로 받아주셔야 세희도 행복할 테니까.”
그제야 주춤주춤 강준에게 돌아선 미자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우리 세희가 성격이 좀 남달라. 보통내기가 아니란 뜻이여. 그래도 평생 감당할 수 있것어?”
“고집도 세고 답답할 만큼 신중하고 뭐든 다 혼자 하려 하고. 주세희가 참 말 안 듣는 성격이긴 합니다.”
“뭐, 뭣이여?”
험담 아닌 험담에 미자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강준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세희의 그런 성격까지도 이미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만만치 않은 성격이기도 하구요.”
“……?”
“그래서 주세희와 제가 천생연분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님.”
천생연분이란 말에 당황한 듯 눈을 끔뻑거리는 미자에게 강준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허리를 숙이고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시고 손녀사위로 받아주시죠, 저.”
미자조차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강준 특유의 화법이었다. 명령이자 부탁이고 협박이자 간청 같은.
“어, 얼굴 들이밀지 말어! 심장 터질 것 같응께!”
“대답을 안 해주셨는데요.”
강준이 좀 더 허리를 기울이려는 순간, 화들짝 놀란 미자가 꽥 소리 질렀다.
“눈치는 밥 말아먹은겨? 받아줬응께 안 쫓아내고 괴기 먹여 준 거 아니여!”
그제야 반듯이 허리를 세우며 강준이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서 고기 많이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할머님.”
강준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미자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휙 돌아서 버렸다. 뭔 사내놈이 웃는 것도 저리 해사하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미자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사람은 늦은 저녁에 서울로 출발했다. 달리는 차창 밖에 시선을 둔 채 세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머니 많이 속상했겠죠? 손녀라고 하나 있는 게 결혼하겠다고 독한 말만 해대고. 그래서 이 밤에 서울로 쫓아낸 것 같아.”
운전대를 잡은 채 강준은 세희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시무룩한 옆얼굴을 보니 미자보다도 세희가 더 속상한 것 같았다.
“할머님께도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도 손녀딸 밥은 먹여 보내고 싶어서 저녁 식사 후에 가라고 한 거고.”
“……무슨 시간이요.”
“세희 씨가 독한 말은 했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미안해서 손녀딸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누구랑 비슷하게 워낙 감정 표현이 서투신 분이니.”
조곤조곤한 대화였지만 워낙 시골 마을이 조용한 탓에 방문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듣고 있는 강준도 혼자서 마음고생 했을 세희가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럼 미자는 오죽할까. 대답 없는 세희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강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할머님께 시간을 줘요. 다음에 내려가면 다시 웃으면서 반겨줄 테니까. 정 걱정되면 다음 달에 나랑 같이 또 내려오고.”
“또 내려오게요?”
“두 달에 한 번은 내려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말에 세희가 동그란 눈으로 강준을 보았다.
“그런 약속은 언제 했어요?”
“세희 씨 통화할 때.”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던 세희는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사위보다도 못한 손녀가 되어버렸네요. 나 진짜 못된 악녀 맞나 봐요.”
“뭐 어때요. 난 그런 주세희가 매력적인데.”
“악녀 아니었을 땐 매력적이지 않았구요?”
“그전에도 매력적이었고.”
“……그게 뭐야.”
힘없이 픽 웃는 세희에게 강준도 웃으면서 말했다.
“뭐기는. 그냥 주세희가 하는 건 다 좋아 죽겠다는 거지.”
“당신 나한테 콩깍지 단단히 씌었나 봐요?”
“평생 그 콩깍지 씌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요. 뒷수습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강준 씰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땠을까요? 상상이 안 돼요.”
때마침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추었다. 빠르게 몸을 기울인 강준은 대답 대신 세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그래, 주세희. 너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좀 자요, 도착하면 깨울 테니.”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은 세희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내일 오후에 병원 가야 해요. 알죠?”
“모를 리가 있나.”
“강준 씨는 아들이면 좋겠어요, 딸이면 좋겠어요?”
“아들.”
“……왜요?”
“내 속을 시꺼멓게 태우는 여자는 주세희 하나로 충분하니까?”
“내가 뭐 어떻다구요?”
조금 발끈하듯 쏘아붙이는 세희가 귀여워서 강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곧이어 차 안은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쌔근쌔근 들려오는 세희의 숨소리를 들으며 운전하던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강준은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운 후 전화를 받았다.
“말하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독일로 간 알리샤에게 사람을 붙여놓았었다. 우물 안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제대로 할 때까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의 주세희가 속상할 일은 더 없을 테니까.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동생의 여자고 마지막엔 주세희의 편에 서준 여자니까. 그런데 시골 마을로 내려간 알리샤가 그곳에서 동양인 남자를 만났다는 말에 강준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 동양인 남자, 인상착의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