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예쁨받는 손녀 사위.2022.02.24.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연숙의 품 안에서 세희는 울음을 그쳤다. 강준 앞에서도 이렇게 울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두 분의 따뜻한 배려에 독하게 다잡았던 감정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버렸다. 너무 흉한 꼴을 보인 것 같아 민망하고 부끄럽고. 그 마음마저 읽은 걸까. 연숙이 해맑은 목소리로 침묵을 가볍게 깼다.
“세희야, 너 그냥 며느리 하지 말고 내 딸 할래?”
그제야 세희는 조심히 얼굴을 들었다.
“세희 너만 보면 딸 키우는 맛이 뭔지 알겠어. 이렇게 모성애를 자극하니 부모들이 아들은 내놓은 자식처럼 키우고 딸은 품 안에서 곱게 키우나 봐. 이 나이에 다시 딸 하나 낳긴 힘드니 세희 네가 내 딸 하자. 응?”
강준에게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세희는 없지 않아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도 어머니 딸이 되고 싶지만…….”
세희는 가방 안에서 준비해왔던 입체 초음파 사진을 꺼내 두 분에게 내밀었다.
“제가 지금 강준 씨 아이를 임신 중이라서요. 5개월 좀 안 됐고 태명은 프레예요. 강준 씨가 제게 준 선물이라서 그렇게 지었어요.”
두 사람은 세희가 건넨 사진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한참 후에야 연숙이 물었다.
“우리 프레. 아들이니, 딸이니?”
“아직 몰라요. 강준 씨 출장 때문에 병원 내원을 다음 주로 미뤄서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아니다, 우리 하나도 안 궁금해! 그냥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내가 할머니가 되는 날이 오다니. 아버님도 그렇죠?”
“그러게 말이다. 강준이를 마지막으로 우리 한신의 대가 끊기나 걱정했는데.”
세희가 울음을 그치니 이젠 연숙과 서 회장이 눈물을 글썽였다.
“이게 다 우리 세희 덕이잖아요. 세희 아니었으면 그 괘씸한 놈이 결혼 생각이나 했겠어요? 결혼 강요하면 수술하러 간다고 협박했던 대로 할까 봐,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우리가 속 태웠는데.”
“암, 그렇고말고.”
손수건으로 축축한 눈가를 닦은 서 회장이 세희에게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아가. 내가 참 고마워. 넌 우리 한신가의 은인이다.”
“아버님, 말로만 하지 마시구요.”
연숙의 눈짓에 서 회장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가 저번에 한 말 기억하느냐? 증손주 보게 해주면 내 전용기 너 주겠다고 했던. 전용기는 임신 축하 선물이고, 우리 손주 며느리한테도 선물을 줘야지.”
사실 오늘의 만남 이전에 강준이 본가에 들러 두 사람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주세희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대로 못 박아놔야 한다고. 그래서 서 회장과 연숙이 하루 동안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낸 방법이 이거였다. 결혼 전에 물질적으로 뭘 잔뜩 안겨주면, 결혼 안 하겠다고 무를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아가야, 한신에 알짜배기 회사들이 참 많다. 경영권이나 지분 중에 원하는 걸 줄 테니 맘에 드는 회사 하나만 골라보아라. 우리 프레 것도 하나 고르고.”
놀랐는지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응이라 서 회장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하나만 준다고 너무 서운해는 말아라. 결혼식 올리고 프레 태어나고 나면 차근차근 이것저것 더 줄 테니. 영만이 밖에 있냐.”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가 세희에게 서류 봉투 두 개를 건넸다. 받기도 뭐하지만 그렇다고 안 받기도 뭐하고. 얼떨결에 세희가 그걸 받자 연숙은 더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이 봉투는 아버님이 준비하신 건데 한신 그룹 계열사 정보가 다 들어 있어. 신중히 확인하고 이왕이면 미래가 밝은 회사로 골라야 하지 않겠어? 네가 그 회사 대표가 될지도 모르는데.”
세희야, 미안하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너 아니면 우린 손주는커녕 아들이 독신으로 늙어 죽는 걸 봐야 할지 모르는데. 그래서 우린 절대 널 놓칠 수 없단다.
“그리고 요건 엄마가 준비한 거야. 엄마가 경영은 문외한이라 부동산이랑 땅만 잔뜩 있거든. 너 마음에 드는 건물로 한두 개 골라보렴. 아니면, 엄마도 주식을 줄까?”
“저기 어머니, 제가 좀 부담이 돼서 그러는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연숙이 엄한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세희야, 나는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더 많이 받았어. 그나마 너 부담될까 봐 줄이고 줄인 건데. 너 부담 느낀다고 오랜 한신가의 전통을 무시할 순 없잖니? 엄마 말 맞지?”
실전에 강한 세희였지만, 스케일이 엄청난 이 두 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신가의 전통도 그렇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예뻐해주는 분들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까.
“그럼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받을게요.”
세희가 생긋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나서야,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가족처럼 따스하게 대해주시는 두 분 때문에 세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모든 걸 손에서 놔도 될 것 같은. 나와 프레, 그리고 강준만을 위한 삶을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이 편안해져서일까,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하던 입덧이 사라진 순간, 세희의 젓가락질이 바빠졌다. 식사하는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이 섞인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 집에서 맞은 주말 아침이지만 세희는 오전을 업무 보는 데 할애했다. 주말을 다 쉬고 꼬박꼬박 칼퇴근하는 것과 맞바꾼 일상이지만 불만은 없었다. 가볍게 점심을 해결한 후, 화순으로 출발하기 전 세희는 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연락이 없더니, 이젠 전화도 안 받는다.
“많이 바쁘나?”
갑작스럽게 출장이 잡힌 만큼 긴박한 일일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드는 세희였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강준의 집에서 지내게 된 후로 날마다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고 품에 안겼다. 그런데 고작 하루 안 봤다고 이렇게 그립고 불안할 줄은 몰랐다.
“고작 하루 안 봤다고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주제에.”
그러면서 어떻게 평생 안 볼 생각을 했을까. 자조적으로 피식 웃은 세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엔 미자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실은 채였다. *** 강준은 어제 처음으로 채식주의자처럼 식사를 한 끼 해결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시골 풍경 때문인지 밥맛이 좋았고, 미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쌈장도 맛있었다. 하룻밤 재워주면 내일도 밭일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미자는 기꺼이 방을 하나 내주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고 푸른 빛이 내려앉은 새벽에 강준은 눈을 떴다. 운동과 달리 노동은 근육을 뭉치게 한다. 고강도의 트레이닝도 거뜬히 버텨내던 근육 대신 어제 오후 내내 구부리고 있던 허리가 쑤셔왔다. 그러니 달려서라도 몸을 풀어줄 수밖에. 시골 마을을 조깅하듯이 돌고 미자 집에 들어선 강준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대충 씻고 나온 강준에게 미자가 툭, 말을 던졌다.
“밥 먹어.”
밝아오는 아침을 미자와 함께 맞으면서 강준은 누룽지를 먹었다. 아침을 먹고 마당을 정리한 후 미자가 강준에게 옷가지를 내밀었다.
“만호한테 빌려온 거야. 비싼 옷 버리면 안 되잖어.”
강준은 구깃한 체크 무늬 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싫은 내색 없이 받았다.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돌아서는 강준의 너른 등을 바라보는 미자의 눈빛이 흐뭇했다. 말수도 적고, 묵직하고,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아 보인다. 돈도 잘 번다 했고, 한 여자만 본다고 했겠다? 한 여자만 본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살 만큼 살게 되면 눈치란 게 생긴다. 해사한 외모와 다르게 총각에게선 묵직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무엇보다 미자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짐승만도 못한 그놈을 처음 딱 봤을 때의 인상을. 능글맞고 말도 많았지만, 돈 좀 있다고 어찌나 깔끔 떨고 싫은 티를 팍팍 내던지. 소금을 뿌리고 싶은 걸 겨우 참은 미자와 달리 순진한 딸년은 서울 놈에게 푹 빠져버렸다.
“근데 저 총각은 참 괜찮아 뵌디. 우리 강아지도 맘에 들라나?”
*** 아침부터 두 사람은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대화 한마디 없이 밭일을 했고 점심 시간이 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미자와 삶은 감자와 옥수수로 가볍게 점심을 해결하고 또 밭으로 향했다. 구부정한 허리와 절뚝거리는 다리로 미자는 쉬지도 않고 일했다. 강준도 군소리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땀에 젖은 강준을 본 미자가 짤막하게 말을 던졌다.
“등목할텨?”
“해주시면요.”
강준 또한 짤막하게 대답한 후, 수돗가에 엎드렸다. 절뚝거리며 다가온 미자가 거친 손으로 강준의 등에 물을 적셨다. 그런 후에 바가지로 물을 퍼서 등에 쏟았다. 등목이 끝나자 강준은 호스로 머리칼까지 흠뻑 적셨다. 그 사이 미자는 또 마당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손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대충 턴 강준은 다시 미자를 거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자가 무거운 걸 들려고 할 때면 얼른 다가가서 손에서 그걸 가져갔다.
“저 있을 때라도 무거운 건 들지 마세요. 그러다 삐긋하면 어쩌시려고.”
강준의 도움을 미자는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어제와 변함없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씨가 말랐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함은 없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평상에 앉아 잠시의 여유를 즐겼다. 태어나 처음 겪어본 시골 마을은 참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간간이 들려오는 경운기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전부였다.
“내일은 서울 올라가는 거여?”
“이제 가야죠.”
이틀이나 못 본 나의 주세희를 보러.
“저녁밥은 또 쌈 싸 먹을까.”
미자의 불퉁한 물음에 강준은 피식 웃었다. 이틀은 좀 곤란한데. 그 마음을 읽은 걸까, 미자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괴기도 구워줄게.”
“고기에 쌈이라, 좋죠.”
강준이 씨익 웃자, 미자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휙 고개를 틀었다. 사내놈이 웃는 게 저렇게 예뻐서야.
“옆집 할배도 같이 먹어, 그 놈이 괴기는 기가 막히게 잘 굽거든.”
그런데 미자가 일어나자 강준도 같이 일어났다. 왜 일어나냐는 듯 바라보자 강준이 말했다.
“쌈 채소 제가 씻어 놓을게요.”
고개를 끄덕인 미자가 간 후 강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씻어야 하나.”
하지만 이내 바구니 가득 다양한 종류의 쌈을 푸짐하게 담았다. 수돗가에서 흐르는 물에 쌈 채소를 씻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머니, 쌈 이 정도면…….”
당연히 미자라고 생각하며 강준이 무심코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강준 씨가 왜 여기 있어요?”
화이트 컬러의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사과 머리를 한 주세희가 서 있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주세희다. 하지만 이번엔 기쁘게 반겨줄 수 없었다. 주세희를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이 날아가는 순간이었으니까. 천천히 다가온 세희가 강준의 앞에 섰다. 두세 걸음 남겨두고 멈추더니 황망한 눈으로 강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후줄근한 체크 셔츠에 먼지가 잔뜩 묻은 검은 바지, 그리고 장화까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슴 위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 강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긴급하게 가야 하는 출장이 우리 할머니 집이었어요?”
“여기보다 더 긴급한 데가 어디 있다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강준이 괘씸했는지 세희가 앙큼하게 눈을 치떴다. 그 눈빛을 보니 이제 본격적인 취조 시작이었다.
“허락은 내가 받는다고 했잖아요. 설마 나 못 믿어서 내려온 거예요?”
긴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밭은 숨을 쌕쌕 내쉬는 걸 보니 꽤 화가 많이 난 듯했다. 그래서 강준은 순순히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괜히 서프라이즈한다고 숨겼다가 날벼락 떨어지기 전에.
“결혼 허락은 세희 씨가 받아요. 난 예쁨받는 손녀사위가 되고 싶어서 내려온 거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준의 대답에 세희는 당황한 듯했다.
“세희 씨만 우리 가족에게 예쁨받는 며느리 되란 법 없잖아요. 나도 엄연히 욕심 있는 남자예요.”
주세희를 사랑하는 만큼, 주세희의 유일한 가족인 미자에게 절대적인 신임과 사랑을 받는 사위가 되고 싶었다.
“할머니 손녀가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나서 잔뜩 사랑받고 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도 시켜줄 겸. 보시다시피 열심히 점수 따는 중이었고.”
“…….”
“그래도 화 안 풀렸어요? 내가 세희 씨한테 비밀로 하고 내려와서?”
그런데도 세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그 미묘한 침묵이 신경 쓰여 강준은 조심히 이름을 불렀다.
“세희 씨.”
“…….”
“주세희.”
“…….”
“세희야.”
갑자기 다가온 세희가 강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더니 조금은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부르면 내가 화를 못 내잖아요.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면 얼마나 섹시한데.”
“…….”
“이틀간 못 봐서 나랑 프레가 당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전화도 안 받고. 그래서 화 난 거라구요.”
이런 요망한 마녀를 봤나. 강준은 세희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보드라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내가 더 보고 싶었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참았던 그리움을 달래는 그때였다.
“둘이 시방 뭐 하는 짓거리여?”
마당 입구에 미자와 만호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