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오냐, 아가.2022.02.20.
미자가 툭 던진 질문에 강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동차 회사에서 일합니다.”
“돈은 많이 벌고?”
“친구 중에선 제가 제일 잘 법니다.”
“애인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만들 생각 없구요. 연애는 생략하고 바로 결혼할까 생각 중이라.”
강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자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요즘 젊은이들은 변덕이 들끓어서 여럿 만나봐야 안 억울하다던디?”
“제 인생에 여자는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바로 할머님 손녀분이요. 강준이 빤히 쳐다보자, 휙 고개를 튼 미자가 다시 마루로 향했다. 무언가를 던지길래 얼떨결에 받아 보니 밀짚모자와 수건이었다.
“따라와.”
미자는 마당을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강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고추밭에 도착한 미자는 말없이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강준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미자의 그 무시가 시험임을 안다. 그래서 강준은 처음엔 미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미자가 어떤 모양과 색의 고추를 따는지, 크기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고추를 비틀어 따는지. 몇 분간 지켜보니 감이 잡힌 강준은 밭에서 나뒹구는 파란 바구니를 들고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잔꾀 한 번 부리지 않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허리를 쭈그리고 열심히 땄던 것 같다.
“안 가르쳐줘도 잘 따는구먼. 제법이여.”
어느새 소리 없이 스윽 다가온 미자가 강준의 뒤에 서 있었다. 이후 몇 개의 밭을 더 돌았고, 마지막은 초록색 풀이 파릇파릇 돋은 밭이었다. 잔꾀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일하는 강준이 좀 편해진 걸까. 아니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고추밭에선 조용하던 미자의 입이 트였다.
“이 밭에 있는 것들은 다 쌈 채소여. 우리 손녀가 쌈 싸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니 내가 농약 안 하고 키워야지, 별수 있어?”
강준은 문득 식당에서 유독 나물을 좋아하던 주세희를 떠올렸다.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먹던 모습이 깜찍한 토끼 같았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내 새끼한테 만날 풀떼기만 그렇게 먹였어. 그래도 괴기 한 번 먹고 싶다고 안 하던 애야. 그래서 그나, 겉으론 독한 척 다하믄서 속은 아주 물러터졌어, 그것이.”
한숨이 진득하게 배인 넋두리에 강준도 공감했다. 워낙 야무지신 주세희지만, 그 안의 주세희는 얼마나 여리고 착한지 알기에.
“요즘 세상엔 여자도 야무져야 혀. 특히 서울이 얼마나 험한 곳이여? 나 죽기 전에 결혼이라도 빨리 하면 좋을 텐디. 답답할 만큼 생각이 많아서 남자나 제대로 물어올까 몰러, 그것이.”
옥자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강준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생각이 많다는 건 그만큼 신중하고 조심성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손녀분이 고르고 골라서 훌륭한 손녀사위 데려올 테니 마음 편히 기다려주세요.”
세희가 결혼하겠다고 대답해준 그 밤, 강준은 새벽 내내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침을 맞는 순간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바로 결혼식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 코앞인데,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결혼식도 앞당기고 예쁨받는 손녀사위도 되고. 결혼 허락이야 주세희가 받아낸다고 해도, 예쁨받는 손녀사위는 주세희가 대신 못 해준다. 그러니 몸소 움직일 수밖에. 하루는 계획을 짜는 데 소요했고 다음 하루는 바쁜 일정 속에서 이틀을 빼기 위해 달렸다. 그렇게 기어이 화순에 내려온 강준이었다. 물론 주세희에겐 급하게 출장을 떠난다고 둘러댔지만. 주세희가 서울에서 자신의 가족을 만나는 동안 강준은 미자를 설득하고 싶었다. 미자의 옆집 이웃 만호는 이미 강준에게 설득당해 아군이 된 상태.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알바생들도 함께 내려왔고. 이제 남은 건 미자와 이틀간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손녀사위로서 합격 통지를 받는 것.
“총각은 쌈 싸 먹는 거 좋아혀?”
“없어서 못 먹습니다.”
툭툭 무심한 손길로 쌈 채소를 뜯으며 미자가 다시 말했다.
“새참도 못 줬는데 저녁이라도 들고 가든가.”
“제가 좀 많이 먹는데, 그래도 될까요?”
그제야 미자가 고개를 틀어 강준을 한참 바라본다.
“쌈이야 뭐 널렸고. 밥은 많이 먹어봤자 솥 하나 가득하믄 부족하진 않것제. 아니여?”
그러겠네요. 선선히 대답하면서도 강준의 손은 오늘 자신의 배 속으로 들어갈 쌈 채소를 수확하느라 분주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흉내 내는 게 우습긴 하지만, 주세희를 위해서라면. 사자도 가끔은 풀을 씹는다니까. 강준의 이번 계획은 심플했다. 주세희가 서울에서 자신의 가족을 공략할 때, 자신은 여기서 주세희의 할머니를 공략하는 것.
*** 조 여사가 눈을 뜬 곳은 온통 새하얀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딱 봐도 VIP 병실. 아직도 수면 마취가 덜 깼는지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다. 다시 눈을 감은 조 여사는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여기 왜 누워 있는지. 그리고 떠올랐다.
“위내시경을 받았지.”
대외적으로 자신은 가양 병원 이사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진실은 마지막 방법까지 실패한 후 어쩔 수 없이 물러난 거였다. 지금껏 살면서 갑질만 해봤지, 누군가에게 이렇게 처절히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 천박한 것에게. 극심한 스트레스에 손에 잡히는 대로 박살 냈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을 게워내다 보니 하루에 몇 번이나 탈진했다. 위로는커녕 미쳤냐고 호통치던 한심한 남편놈이 그 모습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듯했다. 언제 성질냈냐는 듯 예전처럼 바짝 기었다. 위가 좋지 않은 조 여사를 걱정하면서 수면 위내시경을 제안했다. 우선 건강 체크부터 한 후에 찬찬히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남편이 아직 부회장인데 뭘 그렇게 세상 다 산 것처럼 구냐고 살살 달랬다. 그래, 내가 그 천한 것한테 이렇게 당할 수야 없지. 서로의 약점을 쥐여주고 맺은 암묵적인 계약이 떠올랐다. 분하긴 하지만 그 계약 덕에 지금도 자신은 막대한 재력이 있었다. 그러니 기회야 다시 노리면 되는 거다.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시궁창에 처박고 내 발아래 다시 바짝 기게 만들고 말리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년 같으니라고.”
그 영악한 것을 떠올리니 몽롱했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우선 정 실장에게 연락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다. 슬리퍼를 신고 침상에서 일어난 조 여사는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도 문손잡이가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고장 난 문처럼. 아니, 밖에서 단단히 잠긴 문처럼. 뒤늦게 섬뜩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쾌적하게 느껴졌던 병실 공기마저도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이것들아, 문 열어! 문 열라고!”
바락바락 비명을 지르며 문손잡이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절대 열리지 않는 문을 노려보던 조 여사가 희번덕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치미는 노기에 뭐든 박살 내고 싶지만 병실 안엔 그럴 만한 집기조차 없었다. 침상, 가습기, 소파. 그리고 조 여사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 천장 벽에 붙은 CCTV 한 대. 설마,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간이 콩알만 한 그놈이 그럴 리가……. 아니다, 맞다. 그놈이 그런 거다. 유영국 그 개자식이, 날 감쪽같이 속이고 배신하고, 주세희 편에 서서. 조 여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게 이래선 안 되지. 누구 때문에 당신이 부회장이 됐는데. 그 년이 나 못지않게 증오하는 게 당신인데.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조 여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현실을, 이 공간을. 하지만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 정신 병원이었다. ***
[아아아아악!]
집무실에 앉아서 세희는 핸드폰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정신 병원에 감금된 조 여사가 수면 마취에서 깨어난 후의 눈빛을, 표정을, 행동을, 목소리를. 이 모든 게 영국이 해준 일들이었다. 조 여사를 속여 개인 정신 병원에 넣은 것도 모자라 실시간으로 확인까지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게 다 이모 업보예요.”
작게 중얼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끄는 세희의 표정은 무감했다. 조 여사를 입원시킨 곳은 개인 정신 병원이지만 요양 병원처럼 잘 꾸며진 곳이었다. 넓고 쾌적한 병실에 균형 잡힌 식사. 외딴곳에 위치해서 간호사 대동 하에 실외 정원도 산책할 수 있다. 그게 조 여사를 향한 세희의 마지막 배려였다. 빚지는 건 죽어도 싫은 성격인 만큼, 강준을 만나게 해준 것에 대한 마지막 성의 표현이랄까. 세희는 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가 어두워서 몇 번을 해야 겨우 받던 전화인데, 이번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로 전화를 한 번에 받아요?”
[같이 있는 총각이 전화 왔다고 핸드폰 가져다줬다.]
“……총각이요?”
[젊은이들이 우리 마을로 농활을 왔어. 그래서 만호가 가장 일 잘하는 총각을 할미한테 보내줬어. 실컷 부려먹어서 저녁 한 끼 차려주려는 중이여.]
할머니가 사는 마을은 크게 농사를 짓는 집이 없었다. 그런데 농활을 오다니.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세희는 우선 할 말 먼저 하기로 했다.
“할머니, 저 내일 화순 내려갈게요.”
[세희는 내일 여기 좀 내려와라.]
그런데 미자도 동시에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바쁜 손녀를 알기에 힘들까 봐 내려오라는 말은커녕 보고 싶다는 말도 안 하는 분이. 내일 내려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세희는 회사를 나왔다. 오늘 저녁, 드디어 서 회장과 연숙을 만난다. 강준이 출장 가 있는 동안 양쪽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 후 돌아온 강준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말해주고 싶었다. 주세희란 이름으로, 내가 결혼 허락을 받았다고. *** 한옥으로 지어진 식당.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고즈넉한 마당을 가로지른 세희는 미닫이문 앞에 멈추어 섰다.
“제가 열고 들어갈게요.”
직원이 사라진 후 세희는 심호흡을 내쉬었다. 이 문을 열면 서 회장과 연숙이 있을 걸 생각하니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이미 그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받아줄 거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심장은 떨리는지. 심호흡을 몇 번 길게 내쉰 후 미닫이문을 열자 먼저 도착한 서 회장과 연숙이 보였다. 세희를 보자마자 일어나서 다가온 연숙이 다정하게 손을 잡아끌었다. 차마 눈을 보지 못하고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 세희에게 서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 왔냐.”
감히 첫마디를 먼저 꺼내기 어려운 자신을 위한 배려란 걸 안다. 그걸 알기에 눈가가 붉어지고 자꾸만 고개를 밑으로 떨구는 세희였다. 강준도 그렇고 강준의 식구들도 그렇고. 왜 이렇게 내게 잘해주는 걸까. 내가 뭐라고,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안녕하세요, 회장님.”
단정하고 공손하게 첫마디를 하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한마디는 볼썽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회장님이라니, 할아버지라 불러야지.”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서 회장의 음성에 세희는 고개를 조심히 들었다. 변함없이 따스한 눈으로 서 회장이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당장 결혼 허락해주마.”
오늘 이 자리에서 할 말들을 수도 없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고르고 골랐는데, 서 회장의 웃음기 어린 그 한마디가 세희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렸다. 두 분에게 고맙고 죄송하고, 또 염치없고. 그래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세희를 연숙이 다정하게 보챘다.
“세희야, 얼른 한 번 불러주고 우리 맛있는 저녁 먹자. 너 좋아하는 소 갈비찜에 나물 무침이 한 상인데. 아버님, 애간장 녹으시겠어.”
따뜻한 음성과 눈빛처럼, 상 아래에서 꽉 잡은 연숙의 손도 따뜻했다. 장황하게 준비했던 핑계와 설명들이 소용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강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꽉 막힌 목에서 그 한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할아버님.”
그리고 서 회장이 친근하게 대답해주는 순간.
“오냐, 아가.”
그 한마디가 뭐라고. 세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 분에게 너무 죄송하고 면목이 없어서. 처음 받아보는 조건 없는 따스한 환대가 가슴이 아플 만큼 버거워서.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그리고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로 뺨을 적시며 연신 중얼거리는 세희를 바라보는 연숙의 눈가도 뜨거워졌다. 세희의 사정을 잘 아는 만큼, 혼자 겪고 감당했을 고통과 혼란도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안쓰럽고 또 안쓰러워서. 세희의 눈물에 당황한 건 서 회장이었다. 연숙이 시키는 대로 성격에도 안 맞는 너그러운 할아비 연기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인자한 미소에, 다정한 눈빛에, 부드러운 말투에. 근데 내 뭐가 이 아일 울린 건지 모르겠어서.
“아니, 나는…….”
별말 안 했는데. 라고 말하려던 서 회장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듯, 입술을 검지로 누른 연숙은 세희를 다독이듯 안아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기 새처럼 품을 파고드는 이 아이가 딸처럼 느껴지는 연숙이었다. 여전히 세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서 회장에게 연숙은 복화술을 하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원래 임신하면 예민해서 눈물이 많아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