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환장하게 예쁠 것 같거든.2022.02.17.
차마 말해줄 수 없기에 참아야 했던, 그래서 강준을 애타게 하고 기다리게 했던 그 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허무하도록 쉽게 세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당신과 결혼할래요.”
돌고 돌아 긴 시간 끝에 드디어 낸 용기였다. 그 용기에 상을 내리듯 강준은 대답 대신 뜨거운 입술을 겹쳐왔다. 이리 쉬운 것을. 이 말이 뭐라고 난 참아야 했고 그를 힘들게 해야 했던 걸까. 키스가 끝난 후, 강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기분인가 보네.”
무슨 소리냐는 듯 세희가 바라보자 강준이 부드럽게 눈을 맞추었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기분.”
그게 지금 강준의 진심이었다. 뭘 해도 절대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은 덤이고.
“결혼식은 몇 월로 잡을까요?”
느긋한 척 물었지만, 지금 강준의 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주세희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강준은 기다릴 줄 아는 남자였다. 그만한 참을성과 인내심도 가지고 있고. 하지만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타이밍을 잘 알았고,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먼저 어른들에게 최대한 빠른 시일에 결혼할 거라고 알려야 한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프레를 핑계로 혼인 신고부터 하자고 해야 하나.
“난 최대한 빨리했으면 하는데. 다음 달이면 더 좋고. 아, 결혼식보다 혼인 신고 먼저……?”
가만히 듣고 있던 세희가 손을 뻗어 강준의 뺨을 감싸고선 싱긋 웃었다.
“강준 씨, 나 이제 도망 안 가요.”
어르듯이 달래듯이, 말투가 부드럽다. 지금 강준이 왜 그러는지 아는 것처럼.
“강준 씨가 날 사랑하는 한, 절대 안 떠나요. 프레의 엄마로서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가 강준에게 사랑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 조급하게 말고 정석대로 가요. 강준 씨와 하는 진짜 결혼식이잖아요.”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란 이름으로. 세희가 보인 차분함에 강준은 그만 쓰게 웃어버렸다. 주세희 말대로, 이 여자 앞에만 서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래도 뭐 좋지만. 졌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강준은 말했다.
“세희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난 그저 따를 테니.”
“우선 결혼식 날짜는 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허락 받으면 결혼 준비는 어머님이랑 같이 하고 싶구요. 그래도 되죠?”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이미 강준은 다른 생각 중이었다. 주세희가 아니라 서 회장과 연숙을 설득해서 결혼 날짜를 빨리 잡으면 되겠다고.
“그리고 할아버님과 어머님께는 제가 직접 결혼 허락받을게요.”
“내가 이미 허락받았다고 말한 걸로 아는데.”
“강준 씨가 협박해서 받아냈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주세희란 이름으로 내가 직접 허락받고 싶어요.”
세희의 눈동자에 어린 고집스러움에 강준은 이번에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프레는?”
“프레도 어른들께 허락받고 나서 내가 말할게요.”
“그럼 세희 씨 할머니껜 내가 허락받아야겠네.”
“아니요!”
세희의 격한 대답에 강준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할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재벌가에 잘생긴 남자예요. 근데 강준 씨는…….”
세희는 다음 말을 눈빛으로 대신했다. 재벌가 중에서도 톱, 외모도 톱, 결론은 할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서강준 당신이라고. 결혼 전에 임신한 것까지 알면, 할머니가 얼마나 펄펄 뛸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된다. 이유 불문, 그 모든 걸 할머니는 강준의 탓으로 돌릴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마 할머니 허락받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래도 내가 꼭 허락받아낼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할머니 허락만 받으면 결혼식도 빨리 할 수 있을 거예요.”
세희의 말에 강준은 대답 대신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강준 씨?”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든 강준이 조금은 불퉁하게 물었다.
“그럼 난 뭐 하라고.”
“강준 씬 그냥 가만히 있어주면 돼요.”
“…….”
“지금까지 항상 난 가만히 있고 강준 씨가 다 해줬잖아요. 그러니까 결혼만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싶어요. 강준 씨가 신경 쓰지 않도록.”
차마 싫다고는 말 못 하겠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만 씰룩거리는 강준의 모습에 세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강준의 품으로 세희가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결혼식만 빼고 나머진 앞으로 강준 씨가 마음대로 다 해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강준은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이모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려는 내 마지막 계획이 성공하면, 강준 씨가 나랑 프레를 지켜줘요. 나 그래도 되죠?”
강준의 너른 가슴에 뺨을 댄 채 말을 하는 세희는 무척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제 강준 씨가 쳐준 울타리 안에서, 당신과 프레 보면서 편히 쉬고 행복하고 싶어. 나도 이제 지쳤거든요. 어쩌면 이미 배터리 방전이 오래전에 됐고 겨우 버티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게 지금 세희의 진심이었다.
“이게 다 서강준 당신 때문이야.”
중얼거리듯 말하며 세희는 강준의 목에 팔을 감고 꼭 끌어안았다. 이미 지쳤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는 레이스를 달려야만 했다. 멈추는 순간 조 여사가 자신을 잡아먹을 테니까. 늘 혼자서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숨통을 조이고 삶을 건조하게 만들고. 하지만 이 남자를 만나서 삶이 흔들리고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랑을 하게 되고 말도 안 되는 미래를 꿈꾸게 되고, 남에게 내 업보마저 떠넘기며 의존하고 싶게 만들고. 하지만 그런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강준 이 남자로 인해. 서강준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 했을 마법 같은 기적이었다.
“당신이 날 너무 사랑해줘서 내가 버릇이 나빠졌잖아. 그러니까 결혼해서 평생 책임져요.”
이번에도 강준은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뜨겁고도 열렬한 강준의 키스를 세희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프레와 함께 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린 남자를 다신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았다. 한참 후 떨어진 입술이 세희의 귓가로 옮겨와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후는 침대에서.”
그 야릇한 경고에 세희가 눈을 떴다. 하지만 강준은 이미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었다. 침대에 조심히 앉힌 세희 앞에 강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드럽게 올려다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왜 그렇게 보나 싶어 가만히 눈을 맞추자 강준이 세희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블라우스에 닿았을 뿐인데 벌써 예민해진 살결 밑으로 열감이 번진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 감각을 버텨내는 세희에게 강준이 천천히 말했다.
“오늘부터 세희 씨 옷이 뜯길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와서? 그 말에 세희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강준의 말대로 그와 밤을 보내고 나면 옷이 성하지 못했다. 특히 단추 있는 옷들은.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남자가 유일하게 짐승처럼 구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강준이 세희는 오히려 좋았다. 서강준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게 나뿐인 것 같아서. 그 속도 모르고,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는 손길이 애간장이 녹을 만큼 느리다. 그런 강준에게서 세희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손이 예쁜 남자가 진지하게 단추를 풀고 있으니 그 모습조차 섹시했다. 물론 이 남잔 절대 모르겠지만. 그런데 블라우스 단추를 풀던 강준이 가늘게 눈을 떴다. 왜 그러나 싶어 시선을 내리자 느슨해진 블라우스 안으로 살짝 부풀어 오른 배가 보였다. 괜히 민망해진 세희는 손으로 배를 감쌌다.
“프레가 부쩍 컸나 봐요. 배가 나온 거 저도 어제 알았어요.”
“…….”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배가 남산만 해져서 저 펭귄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강준은 대답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괜히 불안한 마음에 세희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배는 이제 조금 나왔을 뿐인데, 벌써 여자로서의 매력이 반감된 걸까.
“많이 보기 흉해요?”
강준은 대답 대신 봉긋 솟은 배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프레야, 얼른 커야지.”
그 감촉과 속삭임에 놀란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는 주세희 펭귄이 빨리 보고 싶단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강준이 세희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마가 닿고, 숨결이 엉키고, 입술이 마주 닿고.
“환장하게 예쁠 것 같거든.”
입술이 집어삼켜지기 전, 강준이 세희에게 한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 미자는 집 뒤 너른 텃밭에 다양한 농작물을 부지런히 심고 길렀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 힘에 부치고 체력이 달린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텃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모든 게 입맛이 소박한 손녀 때문이었다. 돈 좀 많이 벌었으면 자랑만 하지 말고 입맛을 바꿔서 고기 좀 많이 먹든가. 왜 지금도 풀떼기를 그리 좋아하는지 원. 어렸을 적 고기를 못 먹어본 게 습관이 들어 커서도 그러나, 괜히 마음이 무거운 미자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미안함을 말로 표현할 줄 모른다. 손수 키운 농작물로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는 게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찬밥을 물에 말아 김치로 대충 점심을 먹은 미자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옆집 동생 만호가 헐레벌떡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여?”
“세상 참 별일이네. 젊은이들이 우리 마을로 농활을 왔습디다. 젤 힘센 총각 한 명 보내줄까 하는디, 어떠요?”
“아, 됐어. 텃밭에 풀 몇 개 심어놓은 게 뭐 힘들다고 사람을 부려.”
“텃밭이라고 하기엔 많이 크지 않소.”
“일 없다니까? 나 혼자 하는 게 편하고만.”
구부정한 허리를 두드리며 휙 지나가는 미자의 뒤를 만호가 얼른 따라왔다.
“아따 참,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보소!”
“뭔 말!”
버럭 하는 미자에게 만호가 귓속말을 속닥속닥 해왔다.
“이눔아, 안 들려! 그냥 말해도 못 알아듣것는디!”
귀가 어두워진 미자의 짜증에 머리를 긁적이며 만호가 말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은 겁나 잘생긴 참한 총각이 한 명 있다니까? 내 딱 보자마자 우리 세희 생각이 번뜩 나잖어!”
귀가 솔깃하다가도 미자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잘생긴 놈은 얼굴값 하는 거 몰러?”
“아따, 그 총각은 아니라니까! 내가 이 나이 묵고 설마 사람 볼 줄 모를까? 내 눈 못 믿소?”
“그 정도여?”
“그라믄! 손녀딸 있는 집들이 벌써 그 총각 데려가려고 난리도 아니라니까? 근데 그 총각이 다 마다하고 혼자 일하고 싶다 하더라고. 그래서 누님 집에 보낼까 하는데, 어쩔까.”
“흠흠, 우선 보내보든가.”
만호가 다시 간 후, 마루에 다시 털썩 앉은 미자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마음에 든다믄 우리 강아지도 한 번은 만나보것제?”
그때 마당 안을 굵고 낮은 음성이 고요히 울렸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마당 안으로 훤칠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편한 옷차림에 키가 훤칠한 총각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루에서 절뚝거리며 미자가 내려오려 하자, 총각이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무릎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조심하세요.”
허리를 두드리는 척, 총각의 얼굴을 슬그머니 본 미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만호 말대로 우직한 체격과 다르게 얼굴 생김새가 곱상을 넘어서서 해사했다.
“농사일은, 해본 적 있고?”
“해본 적 없지만, 머리도 좋고 힘도 세서 시키는 건 배로 잘할 겁니다.”
말투가 공손함에도 오만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때 마당 밖으로 젊은 남녀로 이루어진 무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장난치며 안기도 하고, 껑충 뛰어 목에 헤드록도 걸고, 뺨에 입 맞추며 낄낄거리고. 애인인지 뭔지 몰라도 결혼한 것도 아닌데 저러다니,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미자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저러니 요즘 젊은 애들은 안 된다는 소리가 어른들 입에서 나오나 봅니다.”
비슷한 또래임이 분명한 총각의 애늙은이 같은 말에 미자는 불쑥 물었다.
“그러는 총각은 몇 살인디?”
“31살입니다.”
2살 차이면 나쁘지 않은데, 암만 봐도 생김새가 너무 잘났다. 괜히 아까워서 미자는 성질이 버럭 나왔다.
“그 짝도 뭐 젊고만!”
“몸은 젊지만 제 머리는 젊지 않습니다.”
뭔 소리인가 싶어 미자가 바라보자 총각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저렇게 어울리는 게 싫어서 혼자 떨어져 나온 거라서요.”
그제야 미자는 이해가 되었다. 여자들 줄줄 따를 얼굴로 왜 혼자 일하고 싶다고 했는지.
“제가 좀 많이 고지식합니다. 그래서 연애랑 결혼도 한 여자랑만 할 생각이구요.”
너무 곱상해서 마음에 들지 않던 얼굴이 갑자기 선비처럼 고고해 보이는 미자였다.
“생긴 거랑 다르게 생각은 제대로 박혔구먼.”
“그런 것 같습니까?”
지그시 내려다보며 총각이 허리를 기울이자 미자는 흠칫, 했다. 아이고야. 침침한 눈에도 코앞에 있는 해사한 얼굴에 노인네 심장 남아나지 않겠다. 우선 우리 손녀랑 한번 만나게 해 봐? 슬그머니 피어오른 욕심에 미자는 시선을 일부러 딴 데 두며 불쑥 물었다.
“총각은 서울에서 뭔 일하누?”
그래서 미자는 미처 못 봤다. 해사한 남학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