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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당신과 결혼할래요. (91/110)

91. 당신과 결혼할래요.2022.02.13.

1656455764512.jpg“저, 정신 병원?”

영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희가 말없이 차갑게 바라보자 영국이 다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1656455764512.jpg“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사람을 병원에 집어넣는 건 좀. 그것도 내 아내를 내 손으로 어떻게 그래.”

16564557645133.jpg“아직도 이모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다니, 부회장님이 아내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그 말에 영국이 펄쩍 뛰었다.

1656455764512.jpg“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뜻이지!”

16564557645133.jpg“불특정 다수에게 빈번히 나타나는 이모의 비정상적인 언행과 폭력적인 행동만으로 입원 이유는 충분하다고 봐요. 특히 절 향한 과한 분노와 피해망상은 심각한 수준이구요. 그래도 이유가 부족하면…….”

말끝을 흐리며 시간을 끌수록 영국에게서 짙은 긴장감이 번졌다. 그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걸 느낀 세희는 영국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16564557645133.jpg“남편인 부회장님이 알아서 이유를 만들면 되겠죠.”

1656455764512.jpg“이유야 만들 수 있지. 그런데 영희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면 부회장으로서의 내 체면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좀 되는데…….”

다시 한번 영국에게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결론을 내자면 제 손으로 더러운 짓은 하기 싫다는 의미일 것이다. 늘 그렇듯 할 짓 다 해놓고 뒤로 물러나는 방치가 주특기인, 책임감이라곤 쥐뿔도 없는 남자니까. 염치도 없고 낯짝도 두꺼워라.

16564557645133.jpg“아내의 잘못을 통감하고 정신 병원에 입원시킨 아내를 버리지 않는 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부회장님의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더 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나름 치열하게 계산을 하는 영국을 보며 세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16564557645133.jpg“물론 제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를 거절하셔도 돼요. 하지만 제가 이모의 만행과 범죄를 세상에 공개하면 과연 이모 혼자 추락할까요, 아니면 부회장님도 같이 추락할까요?”

1656455764512.jpg“……!”

16564557645133.jpg“그런 부회장님을 회장님께선 가만히 두고 보실까요? 부회장님 부부에게 당한 게 많은 부회장님 동생분도?”

담담한 어투로 세희가 연이어 퍼붓는 질문에 영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16564557645133.jpg“그래도 1%의 희망은 버리지 마세요. 제가 모르는 비자금을 이모가 또 숨겨놨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돈으로 그럭저럭 살 수도 있죠. 물론 지금도 부회장님 모르게 비자금을 조성한 이모가 부회장직을 잃은 남편과 그 돈을 공유할진 모르겠지만.”

1656455764512.jpg“네 말대로 하마!”

영국의 다급한 대답에 세희는 쓴웃음이 나오려 했다. 엄마도 그렇고, 이모도 그렇고. 저 혼자서 살겠다고 저렇게 버둥거리는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세희는 지금까지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강준을 바라보았다. 둘의 대화엔 관심 없다는 듯, 강준은 테이블 밑에서 세희의 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강준이 눈을 들었다. 세희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다정했다. 오로지 나만을 담고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남자의 눈이었다.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건조했던 세희의 마음에 물기가 차오른다. 이젠 당신이 마무리해 줘요. 세희가 눈으로 속삭이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강준이 영국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16564557673166.jpg“이번 달 말에 이노그룹 회장님과 저희 할아버지가 회동할 겁니다. 그 자리에 저도 참석할 예정이니 그 전에 부회장님이 확실히 행동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그에 맞는 협상안을 제시할 테니.”

시작은 세희가 협박하고, 그 마지막은 강준이 쐐기를 박는 중이었다.

16564557673166.jpg“전혀 모르는 눈치 같으니 하나 더 알려드리죠. 그 자리에 부회장님 대신 차남인 유 전무님이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1656455764512.jpg“나 대신…… 영민이가?”

눈꺼풀을 씰룩거리며 테이블 위에 불끈 쥐고 있는 영국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든 말든, 강준은 깍지 끼고 있는 세희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만 일어나자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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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에 들어가자마자 영국의 얼굴이 굳었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고 살림을 야무지게 도맡아 하는 전주댁이 겁먹은 얼굴로 구석에 서 있었다.

1656455764512.jpg“대체 무슨 일이야.”

전주댁의 얼굴을 본 영국은 절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전주댁의 왼쪽 뺨이 부어올라 있었다. 전주댁에게도 손댔다는 건 아내의 분노 게이지가 최고치라는 뜻이었다.

1656455764512.jpg“전화 한 통 받으시더니 갑자기 저러셔요. 사모님 저러신 지 벌써 30분째예요, 부회장님.”

파르르 떨리는 전주댁의 눈동자가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저 이만 퇴근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이만 가보라는 듯 영국이 손을 내젓자 전주댁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후다닥 사라졌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영국은 영희를 노려보았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까지 내던진 영희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다.

16564557673191.jpg“아아아악!”

더는 참기 힘든 영국이 붉어진 얼굴로 호통을 쳤다.

1656455764512.jpg“당장 멈추지 못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표독스러운 눈빛이 매섭게 날아들자 영국은 흠칫, 했다.

16564557673191.jpg“당장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 더러운 것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왔던 걸 다 잃게 됐는데! 무능력한 남편 만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가뜩이나 단맛 빠진 껌 같은 아내가 한 말이 영국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1656455764512.jpg“말 가려서 못 해? 입양아 주제에 나 만나서 사모님 소리 들었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엎드려 살아야지, 뭐가 어쩌고 어째?”

16564557673191.jpg“나 아니었으면 당신이 그 멍청한 머리로 부회장직 달았을 것 같아? 엎드려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유영국 당신이라고!”

씩씩거리며 살벌하게 다가온 영희는 영국의 턱 밑까지 치고 들어 바락바락 따져댔다.

16564557673191.jpg“이게 다 당신 탓이야! 당신만 아니었으면 그 영악한 것이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어떡할 거야! 응? 그것이 내 모든 걸 망쳤다고!”

1656455764512.jpg“이게 진짜 돌았나! 임신 못 해서 쌍둥이 동생을 끌어들인 게 누군데 이제 와 내 탓이야!”

영국의 말에 히스테릭하게 한참을 웃던 영희가 돌연 웃음을 멈추고 영국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발작하듯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16564557673191.jpg“내가 분명 임신했다고 했잖아! 거기서 멈췄으면 됐잖아! 그럼 그 끔찍한 것이 태어났을 리도 없잖아! 네가 그 년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희망만 주지 않았어도 그 애가 그것을 안 낳았을 거잖아! 그러니까 다 네 탓이야, 이 발정 난 짐승 새끼 같은 놈아!”

아내가 휘두르는 날카로운 손톱이 영국의 뺨을 할퀴었다. 화들짝 놀란 영국은 그대로 줄행랑을 쳐서 서재로 향했다. 닫힌 문을 영희가 손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1656455764512.jpg“분명 제정신이 아니야.”

작게 중얼거리는 영국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세희에게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집에 오기까지 영국은 고민 중이었다. 늘 똑똑하고 교활한 아내에게 또 다른 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늘 태연하던 아내가 오늘 처음 보인 모습은 소름 돋을 만큼 끔찍했다. 지금 아내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 영국이었다. *** 예전엔 둘의 신혼집이었고 지금은 임시거처인 이 집으로 같이 퇴근한 지 3일째. 차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세희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겉으론 멀쩡한 척 굴지만, 집에 들어설 때마다 세희가 긴장하는 걸 강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끔찍했던 만큼 아무리 자신이 곁에 있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악몽이겠지. 하지만 세희가 그 기억에 휘둘리도록 두고 볼 강준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강준은 세희를 불렀다.

16564557673166.jpg“주세희.”

왜 그러냐는 듯 올려다보는 세희를 품으로 끌어당긴 강준은 기습 키스를 했다. 처음엔 품에서 바둥거리던 세희도 이내 포기한 듯 강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강준의 힘에 밀린 세희가 뒷걸음질로 나왔다. 집요하게 주세희의 입술과 숨결을 빨아들이면서도 강준은 느긋하게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은 주세희의 등줄기를 훑으며, 왼손으로는 능숙하게 현관문의 도어록 비번을 입력했다. 찰칵 하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스가 더 깊어졌다. 한참 후 거친 숨을 내쉬며 강준이 먼저 입술을 뗐다. 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수줍은 듯 긴 속눈썹을 내리뜨며 세희가 작게 투덜거렸다.

16564557645133.jpg“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면 어떡해요?”

16564557673166.jpg“하루 내내 이렇게 하고 싶은 거 얼마나 참았는데. 내 영역에서도 맘대로 못하면 어디서 맘대로 하라고.”

16564557645133.jpg“하지만 집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였다구요.”

16564557673166.jpg“전용 엘리베이터이니 거기서부터 내 영역이지.”

얄미울 만큼 태연하게 대답하는 강준 때문에 세희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16564557673166.jpg“앞으로 계속 그럴 테니 그냥 일상으로 받아들여요. 엘리베이터는 키스를 시작하는 데라고. 이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악몽 따위 떠올리지 말라고, 주세희. 그걸 증명하듯 세희에게서 더는 불안함이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끔찍한 그 악몽도 물리칠 만큼 내 키스가 강력하겠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으며 세희를 스쳐 지나간 강준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다시 돌아섰다.

16564557673166.jpg“오늘도 같이 씻을까요?”

대답 대신 날아온 건 세희의 핸드백이었다. 그걸 또 날렵하게 받아내는 강준의 웃음소리가 현관 복도를 커다랗게 울렸다. *** 샤워를 끝낸 두 사람은 따뜻한 허브차를 한 잔씩 들고 테라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16564557645133.jpg“그 사람한테 연락 왔어요. 이번 주 안에 이모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구요.”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세희의 표정은 전혀 홀가분한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요한 침묵. 원래 주세희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침묵하는 세희의 눈빛이 복잡했다. 덩달아 강준의 생각도 깊어진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내가 불안해할 걸 뻔히 알면서, 숨길 생각조차 안 하는 이 여자 때문에. 이런 여잘 지독히도 사랑하는 나는 저 얼굴에 번진 복잡함을 또 어떻게 걷어내야 할지.

16564557673166.jpg“왜 그런 눈으로 날 볼까.”

피식거리며 강준이 한 말에도 세희는 웃지 않았다. 더 깊어진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가만히 손을 뻗어 강준의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가깝게 눈을 맞추고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인다.

16564557645133.jpg“서강준 당신이 좋아.”

그날 아침, 세희는 강준의 품에 안겨 편안한 표정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살아온 과정, 조 여사와의 지독한 악연, 그리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까지. 나 혼자 하긴 버거울 것 같으니 당신이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진심만은 쏙 빠져 있었다. 빙빙 둘러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모른척했다. 자신에게 오기 위한 길로 접어든 주세희가 차분히 한 걸음씩 걷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지금 세희의 느닷없는 고백에 당황한 강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을 오해했는지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16564557645133.jpg“내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이게 진짜 나예요. 조심성 많고 의심 많고 겁도 많고, 답답할 만큼 신중하고. 단단한 껍질 안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런 나에게 당신이 지쳐서 포기하길 바랐어요.”

이런 면에서 주세희는 참 둔하다. 그런 주세희라서 사랑한 건데 왜 지쳐서 포기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지.

16564557645133.jpg“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만 참으면 프레에게는 내 꼬리표를 물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날 포기하지 않았어. 내가 뭐라고.”

네가 나에게 뭐기는, 그냥 사랑이지. 앞으로도 쭉, 평생 그럴 테고. 그런데 갑자기 붉어진 눈으로 세희가 원망스럽게 눈을 흘겼다.

16564557645133.jpg“가만히 보면 당신 하나도 안 똑똑해.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바보예요.”

이건 좀 억울한데.

16564557673166.jpg“그럼 주세희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바보 좀 구제해주든지.”

그 한마디에 울음 같은 웃음이 세희의 얼굴 위로 번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며 세희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16564557645133.jpg“나 참 많이 늦었죠?”

16564557673166.jpg“더 늦게 와도 돼요. 얼마든지 기다려줄 테니.”

이젠 내가 싫어. 작게 말을 덧붙인 세희는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16564557645133.jpg“나 이제 현명하게 안 살 거야. 어차피 참아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당신이 없는 삶을 참아내느니, 욕먹고 손가락질당하는 삶을 차라리 참아낼래.”

주세희의 커다란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아 가슴 아픈 강준이었다. 지금 주세희는 단단한 껍질 안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세희가 낸 용기이자 몸부림이었다. 그런 주세희가 안쓰러운데도 뜨거워진 가슴으로 밀려드는 건 행복감이었다. 강준은 대답 대신 커다란 손으로 가녀린 목덜미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아슬한 간극을 두고 서로의 시선이 엉키자 세희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16564557645133.jpg“나 당신과 결혼할래요.”

완벽하게 자신을 받아들인 여자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깊숙이 바라보며, 강준은 젖어 있는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이 말 한마디 듣겠다고, 얼마나 많이 참고 오래 기다렸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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