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야한 어흥이님의 귀환.2022.02.10.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세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강준의 손은 뜨거웠다.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손의 악력이, 문득문득 시선을 틀어 세희를 확인하는 초조한 눈빛이, 세희에게 입술 대신 속삭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됐을까 봐 두려웠다고. 침묵과도 같은 그 속삭임에 세희는 깨달았다. 자신이 철옹성 같은 이 남자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음을. 그게 이상하게도 기뻤다. 강준을 빤히 바라보며 세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면 너그러워진다던데, 나는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때마침 걸린 적색 신호에 강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세희를 보았다. 오롯이 자신으로 가득 찬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뜨거운 감정이 울컥 터져 나왔다. 몸을 기울인 세희는 강준의 날렵한 뺨을 감싼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조금 놀란 표정의 강준에게 세희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게 다 서강준 당신 때문이라구요.”
날 나약하게 만들어서 자꾸 기대게 만들고, 생전 안 해본 이기적인 행동도 하게 하고, 이런 낯부끄러운 짓까지 서슴없이 하게 된 건. 민망할 정도로 세희를 빤히 바라보던 강준은 다시 초록 신호가 되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액셀을 밟는 소리가 처음으로 거칠게 들려왔다. *** 4개월 만에 돌아온 집에 감흥 따윈 없었다. 그리웠고 보고 싶었던 건 집이 아니라 서강준 이 남자니까. 타악-. 문이 닫히자마자 돌아선 세희가 강준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포갰다. 적극적인 행동에 강준은 기다렸다는 듯 세희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더운 숨이 얽히고 타닥타닥, 기분 좋은 불꽃이 혈관에서 터지면서 온몸에서 갈증이 났다. 부족해, 좀 더. 애가 달은 세희가 몸을 더 밀착시키자 강준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입술을 뗐다. 왜 멈추냐는 듯 빤히 올려다보는 세희의 눈빛에 강준이 씨익 웃었다.
“우선 좀 씻읍시다. 보시다시피 내 꼴이 이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하던 남자가 흐트러져 있었다. 느슨히 끌어내린 넥타이,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 슈트 곳곳에 묻은 검붉은 자국.
“벗으면 되잖아요.”
서슴없이 넥타이로 향하는 세희의 손을 잡고선 강준이 엄한 표정으로 경계했다.
“오늘 왜 이리 적극적이실까.”
엄한 표정과 달리 열감이 어린 검은 눈동자가 데일 듯 뜨겁다. 천천히 손을 뻗어 강준의 가슴 위에 올린 세희는 천천히 지금 마음을 고백했다.
“얼른 강준 씨가 안아줬으면 하니까요.”
“정말 괜찮겠어요?”
강준이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미처 생각 못 했던 게 떠오르는 세희였다. 미안한 듯 다시 세희가 바라보자 귀신같이 눈치챈 강준이 물었다.
“설마 이제 와서 안 된다 하려고?”
“프레 때문에…….”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요. 내가 다 확인했거든.”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세희의 귓가에 강준이 진지하게 속삭여왔다. 4개월 안정기. 주 수치고 몸무게는 덜 나가지만 잘 크고 있는 아이와 건강한 산모. 그리고 남편이 조심해야 할 것들. 병원에 갔을 때 의사에게 물어본 후 확답받았고 관련 지식은 서적을 통해 습득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강준 씨 말은, 의사 선생님한테 그걸 물어봤다는 거죠?”
민망함에 새빨개진 세희의 속도 모르고.
“내가 워낙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이라.”
태연히 대답하는 강준을 세희는 기가 막힌 듯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이 남자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성격이 틀려도 이렇게 틀릴 수가 있을까. 담당 의사를 바꿔야 하나 고민까지 되는 세희지만 결국은 웃어버렸다. 뭐 어때. 지금 내 눈앞의 서강준은 무사한데. 또다시 악몽 같은 그 순간이 떠올랐다. 강준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는 그 시간은 세희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망치처럼 심장을 때려댔다. 그 아픔을 감당하며 세희는 간절히 바랐다. 이 남자가 제발 무사하기를. 무사하기만 하면 이 남잘 더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간절한 바람대로 강준은 무사했고 이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강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그건 나중에. 지금 당장 강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단 한 번도 변한적 없는 다정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희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랑해요, 강준 씨.”
강준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세희는 못 박듯이 다시 한번 말했다.
“유태령이 아니라 주세희란 이름으로,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한신의 후계자는 여전히 내게 벅찬 남자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너무 좋아. 당신에게 주세희란 이름이 피해를 얼마나 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젠 욕심내보려고. 나의 남편으로, 프레의 아빠로, 서강준 당신을. 벅찬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준이 세희를 와락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여왔다.
“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내 여자야.”
세희를 번쩍 안은 강준은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침실이 아닌 욕실이었다. 세희를 조심히 내려놓은 강준이 샤워기 레버를 돌렸다. 쏟아져나오는 물줄기에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젖었다.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의 세희와 눈높이를 맞춘 강준이 붉은 입술을 휘며 나른하게 웃었다.
“세희 씨 먼저 씻겨줄까요, 나 먼저 씻을까요.”
늘 그렇듯 세희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처럼. 어차피 결과는 그게 그것이건만.
“그래도 같이 씻는 건 좀…….”
한껏 대담하게 굴어서 사람 미치게 해놓고선. 정작 다가온 순간에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리는 세희를 강준이 내려다보았다. 노골적으로 열기가 번진 짙은 눈동자로. 그 눈으로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했다.
“그럼 먼저 씻을래요?”
이 남잔 알까. 이런 눈으로 바라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걸. 그 눈이 내 몸 안에 꽁꽁 숨겨 놓은 활시위를 바짝 당긴다는 걸.
“맘에도 없는 소리면서.”
짧게 웃은 강준은 세희에게 입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알면 됐고.”
한껏 업그레이드된 야한 어흥이님의 귀환이었다.
*** 오래 참고 많이 기다렸지. 그래서 강준은 최대한 길고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고 집요하게 주세희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충격적인 일 때문인지, 아니면 입덧 때문에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주세희의 체력은 더 좋지 않았다. 욕실에서 안고 나와 의자에 앉힌 후 젖은 머리칼을 말려주는데 품 안으로 세희가 툭, 쓰러지듯 안겨 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강준은 가만히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무겁게 내려와 열감으로 부어오른 눈가를 덮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사람 환장할 만큼 가냘픈 숨을 쌕쌕 내쉬었다.
“하긴, 내가 좀 집요하긴 했지.”
한 시간 가까이 욕실에 있었으니. 피식 웃은 강준은 세희를 조심히 안고선 침대에 누웠다. 주세희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게 4개월하고도 삼 주 만이었다. 잠이 든 세희의 귓가에 강준은 처음으로 지독한 집착을 속삭여주었다.
“이제 다신 안 놔줘.”
주세희를 안은 순간, 강준의 마지막 인내심은 바닥났다. 숨으면 찾아내고, 도망치면 다시 잡아 오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널 내 곁에 둘 거야. 서 씨 집안 남자들의 가장 지독한 사랑 유전자가 발현하는 순간이었다. ***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젯밤 일을, 정확히는 욕실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세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예전의 강준이 순식간에 쓸어서 집어삼키는 폭풍이라면, 어젯밤의 강준은 뭐랄까. 느긋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섬세했다. 뇌까지 달콤하게 녹아내릴 만큼.
“프레가 봤으면 안 되는데.”
수줍게 중얼거리는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면서 강준이 들어왔다. 침대맡에 앉는 강준을 세희는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남자의 입술과 손을 보면, 욕실에서의 일이 더 또렷해질 것 같아서.
“잘 잤어요?”
고개만 작게 끄덕거리는 세희의 시야로 트레이가 밀려들었다.
“잘 잤으면 이제 잘 먹어야지.”
마음이 편안해져서일까. 자몽 셔벗보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통호밀빵으로 시선이 갔다. 구역질이 나던 냄새가 지금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구수했다. 한 입 조심히 베어 문 빵은 냄새처럼 맛까지 훌륭했다. 강준의 말대로 잘 자고 잘 먹은 세희는 한껏 편해진 마음으로 강준을 보았다. 생각도 정리했고 결심도 했고. 이제 남은 건 용기를 내는 것뿐. 이렇게 되기까지 참 오래 걸렸고 강준은 참 많이도 기다렸다. 세희는 심호흡을 내쉰 후, 강준과 눈을 맞추었다.
“강준 씨,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요.”
강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후, 그의 손을 잡아야 할 때였다. *** 고급 일식집 다다미방. 어제 드디어 세희에게서 강준과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는 연락이 왔다. 영국은 한신의 알짜배기 계열사를 알아보았고 원하는 요직까지 생각해두었다. 그때 다다미방의 문이 열렸다. 세희의 뒤로 머리 하나는 훌쩍 솟은 강준이 보이자 영국의 입가에 자동으로 미소가 장착되었다.
“서 사장,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는가?”
“세희 씨 덕에 잘 지냈습니다.”
깍듯하지만 묘하게 건방진 어투와 무심히 내려다보는 얼음 같은 눈동자는 타고난 오만함을 강렬하게 풍긴다. 여전히 훤칠하고 당당하고 재수 없을 만큼 잘난 놈이었다.
“식사는 됐고 따뜻한 차 한 잔씩 부탁합니다.”
강준은 영국에게 묻지도 않고 자리를 안내해준 매니저에게 말했다.
“서 사장, 여기 회가 아주…….”
그런데 강준에게 말이 가차없이 잘렸다.
“세희 씨가 날것을 먹으면 안 돼서. 식사는 나가서 저희 둘이 알아서 하도록 하죠.”
“아하, 그런가. 서 사장, 편한 대로 하시게나.”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세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말할게요, 강준 씨.”
“그래요, 그럼.”
고맙다는 듯 강준에게 웃어 보인 세희는 웃음기가 증발한 눈동자로 영국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준 씨 아이를 임신했어요.”
“이, 임신!?”
영국은 본능적으로 세희의 배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한신의 차기 후계자가 생겼다고? 놀랐던 감정은 순식간에 희열로 바뀐다. 현 한신 후계자의 장인도 모자라 차기 한신 후계자의 할아비까지 되다니. 이보다 더 튼튼히 입지를 다지는 방법은 없었다.
“축하한다, 세희야. 날 할아비로 만들어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런데 웃으면서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는 영국을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은 차디찼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저처럼, 이 아이도 부회장님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 아빠 노릇도, 그리고 할아버지 노릇도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확 달라진 세희의 분위기에 영국이 강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세희야, 그때 만나서 했던 말과 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난 분명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제가 부회장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 중 하나가 이모 관리였어요. 그런데 이모도 제대로 못 잡은 부회장님 말을 제가 왜 들어줘야 하죠?”
영국은 저번 자리에서 세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이모가 힘을 잃으면 아빠가 그때 이모를 꽉 잡아주시면 돼요. 이제 주도권 잡을 때 되셨잖아요.’
아니, 그 말이 그 말인 줄 내가 어떻게 아냐고.
“대체 영희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냐?”
“이모가 고용한 남자들이 제게 몹쓸 짓을 하고 촬영까지 하려고 했어요, 알고 계셨나요?”
당연히 몰랐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 이모가 독단적으로 한 일로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화가 치솟은 영국이 테이블을 타악 내리치는 순간, 고요하던 강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거침없이 날아드는 눈빛이 잘 벼른 칼날처럼 서슬이 어찌나 퍼런지 영국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오늘 연락드린 건 부회장님께 마지막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예요.”
세희는 긴 속눈썹 너머로 눈곱만큼의 정도 느껴지지 않는 영국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소문을 듣자니 이노 회장님이 무능력한 장남 대신 차남을 부회장에 앉히려고 한다던데. 그 자리에서 밀려나면 동생분이 부회장님을 가만둘 리 없을 테고.”
세희가 속속들이 이노의 사정을 다 알고 있자 영국은 꽤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제 요구사항 하나만 들어주면 부회장님이 원하실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도록 강준 씨가 도와줄 거예요. 그렇죠, 강준 씨?”
“세희 씨가 원한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강준을 보며 영국은 한숨처럼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냐.”
세희는 대답 대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서로의 약점을 쥔 채 공존할 생각까지 했었다. 아이를 가진 만큼 최악의 복수는 피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어그러뜨린 건 조 여사였다. 심증뿐이길 바랐건만. 끔찍한 일을 사주하고 촬영까지 지시한 게 조 여사라는 걸 강준이 그들에게 자백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세희는 깨달았다. 지금은 나겠지만 훗날엔 나 대신 내 아이를 해할 여자라는 걸. 내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이것뿐이라면, 난 기꺼이 독해질 거야. 그러니까 날 원망하지 말아요, 이모. 세희는 영국을 차분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신 바깥세상 구경 못 하도록, 이모를 정신 병원에 넣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