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눈물 젖은 유혹.2022.02.06.
주세희에게 전화를 걸자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가 나왔다. 좀 더 기다려 봐, 움직여. 고민은 잠시뿐이었다. 여전히 불이 켜지지 않은 5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강준은 빌라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5분 후에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바로 움직여요.”
주세희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가드들이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주주 총회가 있던 날 뒷조사와 동시에 조 여사에게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정 실장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강준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세희가 조 여사를 단계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노패션 주주 총회 의장과 이사직에서 끌어내리고, 다음은 최대주주에서 몰아내고. 마지막은 가양병원 이사장직에서 내려오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걸. 궁지에 몰리면 쥐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무는 법이다. 그 쥐가 누구를 물지 뻔히 알기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지금 이 상황이 꿈이기를 세희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우악스러운 손과 몸을 짓누르고 있는 압박감은 현실이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연 순간, 비상구에서 남자 둘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비상구와 현관문의 거리는 욕이 나올 만큼 가까웠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반항조차 하지 않고. 세희는 집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왔다. 반항하는 몸부림의 대가가 폭력으로 돌아올 걸 알아서였다. 혼자의 몸이었다면 죽을 각오로 덤벼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배 속에 프레가 있다. 어떻게든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며 현관 센서가 들어왔다 다시 꺼졌다. 세희를 붙잡은 남자는 한 손으론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론 가는 팔을 비틀어 꺾었다.
“형, 너무 쉬운데요? 재미없게 이 여잔 반항조차 안 하네?”
남자가 뒤에서 키득거리자 귓가에 와닿는 악취 같은 숨결에 속이 뒤틀렸다. 앞에 있던 남자가 낚아챈 핸드백을 뒤져 핸드폰 꺼내 전원을 껐다.
“내가 뭐랬어. 닳고 닳은 여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지금 세희는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독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그 공포감을 최대한 숨겼다. 두려움에 덜덜 떨며 흘리는 눈물이 범죄자들의 본능을 얼마나 잔인하게 자극하는지 잘 알기에. 세희가 대담하게도 빤히 바라보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왜, 보니까 아는 얼굴이라 더 반가워?”
뒤에 있는 남자는 모르지만 앞에 있는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단호한 거절에도 늘 친근하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고 친절을 베풀던 윗집 남자.
“뭐, 실컷 반가워해도 돼. 오늘 밤 우리는 무척 깊은 사이가 될 거니까. 야, 우선 묶어.”
뒤에 있는 남자가 청테이프로 입을 막고 손목을 칭칭 감는 동안, 세희의 시선이 남자의 어깨너머 현관문으로 향했다. 남자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다시 문이 잠기는 띠리릭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 세희의 집 현관문은 열 때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면 되지만 닫을 땐 수동으로 직접 잠가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험한 일은 죄다 당하면서 생긴 안전 강박증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고 괴롭히는 연약한 계집애는 동네 남자들의 타깃이 되었으니까. 어린 여자애가 혼자 있는 집에 침입하려는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지금도 세희는 그럴 생각이었다. 너희들 따위에게 난 절대 짓밟히지 않아. 세희가 다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응시하자, 남자는 씨익 웃었다.
“그 새끼가 오늘은 안 따라온 게 너한텐 불행이고 나한테는 행운이지.”
발악하지도 않고 덜덜 떨지도 않고. 세희가 얌전하게 바라보자 남자가 씨익 웃었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해주는데 신고할 생각은 하지 마, 예쁜이.”
예쁜이라는 말에 절로 거부감이 들어 세희는 눈을 부릅떴다.
“왜, 예쁜이라고 하니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적당히 튕기고 나한테 이름 좀 알려주지 그랬어.”
잠기지 않은 현관문에 이어 남자가 모르는 건 또 있었다. 세희가 일부러 순종적으로 굴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공포에 짓눌린 지금 이 순간조차 세희가 절대 잊지 않은 게 있었다. 이 집에 불이 들어오고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얼굴을 보여줘야 돌아가는 강준을. 그건 곧 강준이 가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니, 당신이 갔을 리가 없어. 지금쯤 내게 오고 있을 거야. 이 집에 불은 켜지지 않았고, 당신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 습관을 내게 들인 건 서강준 당신이니까.
“내가 뭘 할 거냐면, 우리의 예쁜 추억을 영상으로 남길 생각이야. 어떤 분이 그걸 이번 주 안에 받길 간절하게 원하시거든.”
아직까진 세희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것처럼 얌전히 굴자 여유가 생긴 남자는 늦장을 부리며 말이 많아졌으니까.
“그 영상이 공개되는 게 싫으면 신고하지 마. 뭐 신고해도 딱히 소용은 없을 거야. 영상 속에 찍힌 너와 난 다정한 연인 사이처럼 보일 거거든. 합의 하에 이루어진 관계. 오케이?”
세희의 눈앞에 작은 약병을 흔들어 보인 남자는 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네가 반항 안 하고 얌전히 협조하면 이 약은 굳이 안 먹이고. 나도 정신줄 놓은 여잔 취향이 아니라.”
조금은 놀란 듯, 두려운 듯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세희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깜빡거렸다. 마치 정말요, 라고 묻는 것처럼. 하지만 공포를 참아내려고 세게 깨문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지고 있었다. 흘러가는 일 분 일 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제발 강준 씨, 빨리 와줘요. 한결 더 짙어진 음흉한 눈길이 벌레처럼 와닿는 순간, 남자가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와, 피부 결도 죽이네.”
거부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뜬 세희의 시야에 천천히 돌아가는 손잡이가 보였다. ……강준 씨? 인기척에 돌아선 남자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XX, 문 제대로 안 잠갔어?”
“잠갔어요! 형도 봤잖아요!”
남자의 동생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현관문은 열렸고 강준은 위압적인 체격으로 로비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두 남자와 달리 정작 강준은 침착하고 태연했다. 잠깐 켜진 센서의 빛을 통해 드러난 상황을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훑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길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느긋하게 흘러나온 음성이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세희에게 와닿았다. 늘 그렇듯 강준은 또 나타나 준 것이다. 강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지만 세희는 악착같이 서 있었다.
“아씨, 형 어떡해요?”
“어떡하긴. 저 새끼 먼저 해치워야지!”
두 남자가 가방 안에서 꺼내 든 건 칼이었다. 여차하면 세희를 칼로 겁박할 생각이었지만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하니 굳이 꺼내지 않고 있었던 거다. 옅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칼을 보자 참았던 공포심이 터져버렸다. 두 남자는 흉기를 들고 있고 강준은 빈손인 데다 2대 1이다. 달아오른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세희 씨, 눈 감아요.”
아니, 안 감을래. 당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눈을 감아. 세희가 싫다고 고개를 격렬하게 내젓자 강준은 다시 한번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쁜 건 보지 말아야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다정한 강준의 눈동자가 짙게 와닿았다. 그 눈이 속삭이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 날 믿으라고. 눈을 감으라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며 천천히 눈을 감기 전 세희는 보았다. 남자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보다 더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운 강준의 눈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시야를 완벽히 차단하는 순간, 강준의 나직한 음성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절대 눈 뜨지 마, 주세희.”
*** 현관문을 연 순간, 옆에 놓여 있던 소화기를 이미 눈여겨본 강준이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남자의 움직임은 둔탁했고 슬로우 모션처럼 시야를 파고든다. 강한 힘으로 집어던진 소화기가 남자의 안면을 제대로 강타했다.
“악!”
비틀거리는 남자를 강준은 발로 걷어찼다. 두 놈이 한꺼번에 달려든 덕분에 앞에 놈이 쓰러지자, 뒤에 놈도 뒤엉켜서 쓰러졌다. 거실로 들어가지 않고 일부러 좁은 현관 복도에 버티고 선 이유였다. 5년 연속 국내 챔피언이었던 킥복싱 관장도 버거워하던 강준에게 두 남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겹쳐서 쓰러진 두 남자의 몸 위로 강준의 무자비한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그리고 정확히 3분 후. 열린 현관문으로 가드들이 들이닥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저희가 뒤처리하겠습니다.”
살짝 흐트러진 호흡만 제외하면 강준은 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벽에 기대어 있는 세희는 기특하게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눈을 감으라고 한 건 자신의 이런 잔인한 면을 세희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세희를 조심히 안은 강준은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내려놓았다. 손과 입을 막고 있는 청테이프를 조심히 떼어내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세희가 조심히 물었다.
“강준 씨, 손에 피…….”
“내 피 아니에요.”
그제야 세희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품에 안겨왔다. 얼마간 다독여준 후,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5분만 기다려줘요. 상황 정리하고 바로 들어올게요.”
거실로 다시 나가자 세희의 입과 손을 겁박했던 청테이프가 이번엔 두 놈의 손과 입을 막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강준의 발 아래 가드들이 두 놈을 엎드리게 했다. 칼을 들고 앞에서 먼저 덤벼든 놈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세희 윗집에 사는, 첫 만남부터 상당히 거슬렸던 놈. 강준의 침묵에 가드가 조심히 물었다.
“경찰을 부를까요?”
“경찰에 신고하는 건 고상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죠.”
그렇게 곱게 끝내서는 안 되지. 겁에 질린 두 남자는 입에 붙인 청테이프만 뜯어내면 아는 건 다 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준은 두 남자의 구질구질한 변명을 들어줄 만한 자비가 없었다.
“돈만 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주는 심부름 업체가 널리고 널렸는데.”
강준의 담담한 말에 두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며 윽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강준이 검지를 들어 입술을 눌렀다. 쉿, 조용히. 나의 주세희가 들으면 곤란하니까. 강준의 고요한 제스처에 가드들이 다시 두 남자를 빠르게 제압했다.
“추천해줄 만한 심부름 업체 있습니까?”
“마음에 드실 만한 곳이 있습니다. 언제 넘길까요?”
“지금 당장.”
지시를 내리고 일어난 강준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 쿵쾅거리던 심장은 가라앉았고 눈물은 메말랐다. 그런데도 좀 전에 느꼈던 공포심과 두려움은 여전히 세희의 안에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부지런히 돌아간다.
‘어떤 분이 그걸 이번 주 안에 받길 간절하게 원하시거든.’
남자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게 분명했고 그 누군가는 조 여사밖에 없었다. 피멍이 든 손목처럼 세희의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얌전히 기회를 줬는데도 기어이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때 다시 침실로 들어온 강준이 침대에 앉아 팔을 벌렸다.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던 세희는 기다렸다는 듯 너른 품을 파고들어 가슴에 귀를 댔다. 강준에게 안기고 나서야 진정이 된다. 이 남자의 짙은 체취와 강렬한 심장 박동 소리에. 세희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골랐다. 강준의 힘을 빌리지 않으려 했지만 이젠 안 되겠다. 자존심은 접어두고 타협이란 걸 할 때였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속삭이듯 흘린 가냘픈 한마디에 등을 어루만지던 손에 지그시 힘이 흘러들었다.
“잊고 싶은데 자꾸 떠올라.”
입을 막던 우악스러운 손과 팔을 비틀던 자비 없는 악력. 뒤에서 바짝 붙여오던 끔찍한 몸의 감촉과 귓가에 달라붙던 악취 같은 숨결이.
“내가 어떻게 해줄까.”
머리 위로 내려앉은 나직한 음성에 세희는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음성과 달리 검은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어쩌면 자신보다 강준이 더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희는 강준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강준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집에 불이 켜지지 않고 테라스 너머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핸드폰은 꺼져 있고.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끔찍한 상황을 보았을 때.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침착한 강준이었지만 자신보다 속이 시꺼멓게 탔을 것이다. 그러게 왜 나를 사랑해서. 미어지듯 아픈 가슴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내게 보여주는 사랑으로 인해, 이 남자를 향한 나의 사랑 때문에. 세희는 단단한 목을 끌어안고 강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좀 강준 씨 집에 데려가 줄래요.”
몸과 마음에 깊이 박혀버린 악몽 같은 순간을, 오래도록 곪아서 진물이 날 상처를, 이 남자가 깨끗하게 지워줬으면 좋겠다.
“오늘 밤은 아무 생각도 못 하게.”
강준의 품에서 벗어난 세희는 눈물 젖은 눈으로 강준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강준 씨가 안아주면 좋겠어요.”
가슴이 아플 만큼, 눈물 젖은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