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주세희가 절대 잊지 않는 것.2022.02.03.
“진경 씨가 알아서 잘 말해줘요.”
느긋한 자세로 앉아 강준이 한 말에 진경은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러니까 방금 서강준 씨 말은…… 저보고 알아서, 그것도 잘 말해주라는 거죠?”
“주세희에 대한 것만.”
“아, 네. 그러니까 저 말고 세희에 대한 것만요.”
이 남자의 말뜻은 즉, 알아서 추려서 도움 될 정보만 간략하게 알려달라는 거였다. 아, 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분명하다. 늘 위에서 군림하며 지시 내리는 사람 아니랄까 봐, 사석에서도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걸 보니. 그래도 그렇지, 선의로 한 말을 어떻게 그렇게 상사처럼 받아들이고 지시하냐고. 생긴 건 끝내주는데, 성격은 좀 별로네.
“혹시 세희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으세요?”
“없어요.”
우리 세희를 사랑하긴 하세요? 라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진경은 상냥하게 다시 물었다.
“그럼 듣고 싶은 건요?”
“그게 그 말 아닌가.”
날카로운 강준의 지적에 진경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듣고 보니 그게 그 말이긴 한데,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 이거다. 맘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뭐든 말해주겠다고 먼저 말한 건 자신이었다. 게다가 오빠 놈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버렸고, 세희가 백화점에서 사준 C브랜드 가방 두 개도 이 남자의 블랙 카드로 결제한 거다. 결론은 무슨 말이든 알아서 잘해야 한다는 의민데,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진경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제가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라서 그런데, 그냥 콕 집어서 물어봐 주면 안 될까요?” 다행스럽게도 진경의 말을 강준은 선선히 받아들였다.
“진경 씬 내가 세희와 결혼하길 바랍니까? 아니면, 세희를 위해 포기하길 바랍니까?”
“당연히 결혼하길 바라죠!”
“그럼 세희와 결혼하길 원하는 내게, 친구로서 해줄 조언은 없어요?”
조언이라. 그제야 진경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어 입을 열었다.
“세희가 자존심도 무지 세고 의심도 무지 많아요. 돌다리도 수십 번 두드리고 건널 만큼 조심성도 많고 도움받는 것도 질색하고. 왜냐면 어릴 때부터 자기방어적인 성격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말을 하면서도 문득 진경은 그런 걱정이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재벌 3세인 이 남자가 과연 주세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조차도 가끔씩 세희의 신중함이 답답할 때가 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세희와 결혼하려면 인내심과 참을성이 엄청나야 한다는 거예요. 걔가 답답할 만큼 신중하고 생각이 많아서 뭐든 오래 걸리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세희가 살아온 방식이니까.”
“보시다시피 인내심과 참을성은 넘쳐납니다.”
인내와 참을성과는 담쌓은 남자의 오만한 대답에 진경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날릴 뻔했다. 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는 것 같지만, 우선 그렇다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그럼 세희 과거에 대해서도 아세요? 부모님이랑 이모 등등요.”
“다 압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 눈살 찌푸리는 일을 강준은 너무도 무심하고 담담히 대답했다.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그건 마음에 드는 진경이었다.
“그럼 세희한테 큰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도 아세요?”
“그건 모르겠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희가 결혼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가 트라우마일 것 같아요. 세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엄마랑 닮았다는 말인데, 강준 씨랑 결혼하면 세희는 엄마보다 더한 사람이 되는 거라서요.”
잠시 망설이던 진경은 일어나서 강준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쌍둥이 언니의 남편을 빼앗으려 한 것도 모자라 애까지 낳은 더러운…… XX. 동네 사람들이 세희의 엄마를 표현했던 말을 그대로.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긴커녕 강준은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공감도 없고, 거부감도 없고. 저렇게 감정이 메말라서 사랑은 어떻게 하나 몰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앉은 진경은 말을 이었다.
“세희 이모가 동네에 소문을 안 좋게 퍼뜨려서 세희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이사 가고 싶어도 돈은 없고. 어딜 가든 더러운 년 딸이라고 쑥덕거리고 더럽다고 피하고. 그걸 10년 넘게 묵묵히 견뎌낸 게 세희예요. 그래서 세희가 이목을 신경 쓰고 눈에 띄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구요.”
“…….”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러겠죠. 왜 재벌 3세가 청혼하는데 배부르게 거절하냐고. 애 생각은 안 하고 이기적으로 구냐고.”
진경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지금까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세희가 되어 말을 하니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근데 서강준 씨랑 결혼하면 세희는 자기 엄마보다 더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대한민국 국민들 이목은 죄다 세희와 아이에게 쏠리는 것도 모자라 세희 과거까지 파헤쳐지겠죠. 왜냐면 남편이 서강준이니까.”
“…….”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이 겨우 떼어낸 꼬리표가 아이에게 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지금까지 무감각하게 듣고 있던 강준은 이제야 깊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결론은 서강준 씨와의 결혼은 신중한 세희에게 감수할 위험도 많고 트라우마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예요.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건 오로지 혼자만의 싸움인데.”
세희를 이해하고 나니 진경은 뒤늦게 혼동이 왔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 건지. 세희의 결혼을 말리는 게 아니라 충동질하는 게 맞는 건지. 무엇보다 감정 결핍처럼 보이는 눈앞의 차가운 남자에게 말이다. 괜히 가슴이 울컥한 진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강준 씬 세희를 얼마나 사랑하나요?”
“나 자신보다는 사랑해요. 오랜 신념을 깨고 안 하던 미친 짓까지 할 만큼.”
강준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고저 없는 나직한 음성과 서늘하고 깊은 눈빛,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그런데도 세희를 향한 짙은 사랑이 느껴진다. 그때 테라스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일어난 강준이 세희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진경의 눈에 서강준의 놀라운 변화가 포착되었다. 시종일관 무심했던 남자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면서 차가운 눈에 온기가 번진다. 세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밀어처럼 속삭이는 나직한 음성조차 다정했다.
“밖에 11분이나 서 있었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진경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대체 시간은 언제부터 체크하고 있었던 거야.
“조금 서 있었다고 저 무슨 일 안 나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수줍은 미소를 짓는 세희는 완벽하게 무장해제된 얼굴이었다. 타인은 질색하고 경계하는 주세희가 말이다. 그제야 진경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로지 진우만이 세상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어이 오빠님, 인상 좀 펴라? 이 좋은 날 왜 죽을상이야, 웃으라고.”
눈치 없는 동생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살거리든 말든, 진우는 원망스럽게 세희와 강준을 바라보았다. 테라스에서 주세희가 보인 눈물에 심장은 툭 떨어졌고, 임신했다는 말에 오랫동안 고이 품었던 남자의 순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드디어 알게 된 남자의 정체도 충격이었다. 절대 넘사벽인 한신가의 후계자라니. 그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세희는 잔인한 부탁을 해왔다.
‘만약 내가 강준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 오빠가 내 손 잡고 버진로드 걸어줄 수 있어?’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며 물기 어린 음성으로 해오는 세희의 부탁을, 진우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참에 멜로 드라마 남자 주연이나 맡아봐? 처절할 만큼 서글프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둠에 잠긴 비상구. 1시간째 몸을 숨긴 채 작은 창문을 내다보던 남자는 빌라 입구 앞에 멈춘 외제 차를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다행히도 오늘은 남자가 집까지 따라갈 것 같진 않았다. 거래를 제안한 상대방이 이번 주를 넘기면 안 된다고 못 박아서 초조하던 참이었는데.
“그 여자 왔으니까 준비해.”
“근데 형, 실패해도 돈 주는 거죠?”
“이 새끼야! 실패하면 국물도 없지, 무슨.”
“헐, 그럼 나 안 해요. 우리 지금 하려는 거 진짜 범죄잖아요, 감방 갈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성공해야지. 2억도 아니고 무려 20억인데.”
오늘의 범행을 계획한 주범은 조 여사의 지시하에 정 실장이 물색해서 세희의 윗집에 들여앉힌 남자였다. 귀티 나는 외모 말곤 볼 거 없는, 여자나 등쳐먹고 사는 사고뭉치 개망나니.
“영상만 확보해서 그걸로 협박하면 절대 신고 못 해. 신고해도 합의 하에 그런 거라고 둘러대면 돼. 개무시를 참아내면서 내가 CCTV 있는 데서 얼마나 친근한 척 굴었는데. 혹시 몰라 약도 준비했잖아.”
“그래도 뭔가 쎄한데.”
“야, 원래 행실도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했어. 그런 여자 말을 누가 믿냐? 정 징징대면 돈 좀 쥐여주면 되고.”
상대에게 받은 정보에 의하면 여자는 원래 그렇고 그런 여자였다. 재벌 하나 물어서 생활비 받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물었는지 빌라 앞까지 데려다주는 남자 클래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진에선 고급스럽게 생겼던데, 반대로 노는 스타일인가 보네요?”
그제야 동생이 키득거렸다. 사실 처음 저지르는 범죄도 아니라서 두 남자 모두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클럽이나 호텔 안에서 종종 저질렀던 일을 여자의 집에 강도처럼 들이닥쳐서 한다는 것 정도. 오히려 걱정보다는 흥분감을 고조시켰다.
“근데 형, 그 여자 진짜 사진이랑 똑같이 생긴 거 맞죠?”
“야, 실물이 더 쩔어. 걱정 마.”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살짝 닫은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엘리베이터 움직인다. 문 열리는 소리 들리는 순간 바로 튀어나가서 여자 입부터 막는 거다.”
두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1분 전이었다. *** 진경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어서인지 차에서 깜빡 졸았다. 세희가 눈을 떴을 땐, 이제 막 빌라 입구에 강준이 차를 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먼저 눈 떠주니 고맙네.”
“별게 다 고맙네요.”
그러게. 작게 말을 덧붙인 강준이 시동을 끄며 물었다.
“아깐 못 물어봤는데, 테라스에서 혹시 울었어요? 눈가가 젖어 있던데.”
“아, 그거요? 그냥 진우 오빠한테 눈물 연기 살짝 한 거예요.”
사실 진우 앞에서 흘린 눈물은 세희의 진심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우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독한 말로 밀어냈지만 진우를 친오빠처럼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마음에 진우를 잃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진짜 울었다고 하면 강준이 진우를 어떻게 할지 모르니 연기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김진우가 오랜 짝사랑 상대인 주세희를 포기하도록?”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강준은 그간 김진우와 엮였던 일들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온통 치졸한 남자의 질투심뿐이니까. 어찌 되었든 강준은 오늘의 결과에 만족했다. 김진우에게 한 대 맞아준 대가로 주세희가 제대로 김진우에게 선을 그었을 테니.
“그래서, 완벽히 포기하게 만들었고?”
“네.”
“주세희가 연기에도 소질 있는지 몰랐네.”
“서강준 씨 가짜 아내 연기도 해냈는데, 못 할 게 뭐 있어요?”
새침하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세희를 안고 싶은 걸 참으며 강준은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열어주자 조수석에서 내린 세희가 작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져서 잘 것 같아.”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얼른 올라가서 쉬어요.”
알겠다고 하면서 돌아설 줄 알았는데. 세희는 마주 선 채로 강준을 빤히 올려다본다.
“왜 강준 씬 먼저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안 해요?”
“그야 주세희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것 같으니까. 곱게 재울 자신 없으니까.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은데, 더 말해줘요?”
강준의 대답에 결국 세희도 웃어버렸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웃다가 세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이모한테 마지막 선전포고했고, 다음 주에 이모랑 결판낼 거예요.”
수줍은 듯 긴 속눈썹을 내리깐 세희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모랑 결판내고 나면, 강준 씨한테 중대발표 할지도 모른다구요.”
그러고선 강준의 뺨에 기습입맞춤을 날렸다.
차강준이 정신을 차렸을 땐, 세희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피식 웃은 강준은 오늘도 차에 몸을 기댄 채 지켜보았다. 내 아이를 품고 있는 내 여자가,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곧 저 집에 불이 들어오고 테라스 너머로 작은 얼굴이 아른거리겠지. 세희의 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강준은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분 안에 회사 도착할 예정이니 회의 준비시켜요.”
윤 실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강준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4분하고도 1분이 더 지난 것 같은데, 주세희 집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나, 불을 켤 여력도 없을 만큼 피곤해서 바로 침대에 쓰러졌나, 그것도 아니면 집에 불이 나갔나. 그렇다 해도 집에 들어간 주세희가 절대 잊지 않는 게 있다. 테라스 너머로 얼굴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자신을. 속내를 꽁꽁 숨기고 밀어낼 때도 결국은 얼굴을 보여준 마음 여린 주세희에게 그 습관을 만들어준 게 자신이니까. 그래서 강준은 기어이 확인해야 했다.
“윤 실장님, 다시 전화하죠.”
주세희 말대로 자신은 겁쟁이에 안전 강박증이 맞았다. 적어도 주세희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