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한 여자, 그리고 두 남자.2022.01.30.
“어머, 애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고운 미간을 구긴 연숙이 각 티슈를 뽑아 테이블 위의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강준은 연숙이 왜 유독 기분이 좋았는지 알게 되었다. 프레의 존재를 눈치챈 거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주세희는 제 입으로 분명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육안으로 눈치챘다기에는 살이 더 빠진 세희는 절대 임산부로 안 보인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연숙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왜,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하니?”
속을 꿰뚫는 연숙의 질문에 강준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세희랑 아기 용품 매장에서 마주쳤어. 선물하려고 온 사람치고는 아기 신발 바라보는 눈빛이 그렇게 애틋하면서 행복해 보일 수가 없더라. 게다가 안 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그렇게 잘 먹는 애가 입덧하는지 디저트도 안 먹고. 또 말하는 내내 배로 손을 감싸더라구. 바보천치도 아닌 이상, 조금만 관심 있으면 금방 알지.”
강준은 그만 쓰게 웃어버렸다. 연숙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천하의 바보천치였다. 몇 번의 만남에서 주세희는 임신 증상을 보였지만 정말 몰랐으니까. 주세희가 혼자 입덧으로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소화제와 위 관련 약까지 내밀었으니 말 끝났지. 저지르는 건 같이 저지르고, 임신 가능성을 까맣게 잊은 자신은 무정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주세희 옆에 평생 껌딱지처럼 붙어서 더 잘해줘야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희에겐 모른 척하세요. 지금 한참 예민하고 복잡할 때라.”
“꺄악! 세희 진짜 임신 맞지?”
잠깐, 이 무슨…….
“세상에! 우리 아들, 31년 만에 드디어 엄마에게 첫 효도를 하는구나! 며느리에다 첫손주라니!”
벌떡 일어난 연숙이 강준의 등을 장하다는 듯 토닥거리며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아까 한 말 취소다. 최대한 빨리 세희 설득해서 결혼식부터 올리자꾸나. 여자들이 얼마나 웨딩드레스 입는 걸 기대하는데, 설마 배 나와서 입게 할 생각은 아니지? 애 낳으면 몸 추슬러야 하고. 엄마도 세희 설득하는 데 적극 협조할게, 알았지?”
“저 떠보신 거였어요?”
“그럼 널 떠봐야지, 한참 예민한 세희를 떠보면 되겠니?”
그제야 연숙의 방문 목적을 깨달은 강준이었다. 실낱같은 의심이 든 연숙은 아들인 강준을 낚시질하려고 온 거였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자면, 강준은 낚인 거였다.
“아버님껜 당분간 비밀로 하마. 그래야 하는 거 맞지?”
들어오기 전보다 더 신이 난 연숙이 집무실을 나간 후, 강준은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 들어 자꾸만 휘둘리는 것 같아서. 주세희도 모자라 이젠 어머니에게까지 말이다. 아무리 잘난 서씨 집안 남자들도 결국 아내는 못 이기는 불변의 법칙처럼. 그래서 바라는데, 프레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으면 한다. 세 여자를 감당하기에는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좀 버거울 것 같아서. 그럼에도 피식피식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주세희를, 그리고 프레를 떠올리니 행복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참을 수가 없어서.
“얼른 배가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우리 아이를 품은 배가 봉긋 솟은 주세희는 또 다른 느낌으로 사랑스러울 것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아마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겠지. 그 무게감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왜 남자들이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는지 절실하게 와 닿는 순간이기도 했고.
***
“오늘 주인공이 왜 이렇게 긴장하실까?”
긴장한 얼굴로 확인한 걸 계속 확인하며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는 진경에게 세희가 웃으면서 물었다.
“귀하신 한신 그룹 후계자님이 내 집에 방문하는데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어설픈 재벌들만 만나봤지, 상위 1%는 처음 만나본단 말이야!”
지금까지 진경은 생일파티를 대부분 클럽에서 했다. 하지만 29번째 생일은 임신한 세희를 위해 집에서 조용히 치르기로 했다. 세희가 서강준을 데려온다는 말에 초대했던 지인들도 죄다 오지 말라고 했고. 긴장은 하고 있지만 사실 세희에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진경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주세희의 베프로서 따끔하게 서강준에게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최고의 돈과 권력으로 여자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잡고 고생시키냐고 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하고 또 힘들어하는 게 죄다 서강준 탓이라 생각하니까.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쭈, 너의 서강준 왔나 보다. 내가 나갈 테니까 넌 앉아 있어.”
그 한마디에 피곤한 기색이 짙던 세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 헤어질 생각을 했나 몰라. 생글생글 웃으며 현관문으로 향하는 진경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김진경, 재벌 3세라고 쫄지 말자. 서강준이 주세희를 사랑하는 만큼, 주세희의 베프인 난 그 남자한테 절대 갑이니까. 하지만 현관문을 연 순간, 진경의 그 당당함은 안개처럼 증발해버렸다.
“꺄악!”
화들짝 놀란 진경이 옆으로 피한 자리에 한 몸처럼 뒤엉킨 두 남자가 바닥으로 밀려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인가 싶어 진경은 있는 대로 눈을 부릅떴다. 한 놈은 생판 모르는 아주 잘난 얼굴이고, 한 놈은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 키와 덩치는 생판 모르는 놈이 압도적인 것 같은데, 낯이 익은 얼굴의 남자 밑에 깔려 있었다. 잠깐, 근데 저 낯익은 얼굴 설마…….
“김진우!?”
진경의 입에서 그 이름이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진우의 주먹이 밑에 깔린 남자의 잘난 얼굴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세희의 날카로운 소리가 현관 복도를 울렸다.
“오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내려오지 못해!”
“세희야, 내 말 좀 들어봐! 이 자식 완전 범죄자야, 널 스토킹하고 있었다고! 내가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초인종까지…… 으악! 세희야!”
이번엔 진우의 우렁찬 비명이 현관을 울렸다. 경고했음에도 진우가 남자의 몸에서 내려오지 않자, 세희가 신발장 안에서 꺼낸 우산으로 진우의 등을 후려친 것이다.
“당장 강준 씨 몸에서 내려와. 다음엔 오빠 등이 아니라 머리를 박살 내줄 테니까.”
장난기를 쫙 뺀 살벌한 세희의 한마디에 진우가 남자의 몸에서 잽싸게 일어났다. 얼른 강준에게 달려가면서도 세희는 진우를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진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세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내가 초대했어. 진경이한테 보여주려고 내가 부른 거라구.”
“세희 네가 이 남자를 왜, 아야! 넌 또 왜 때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진우의 등을 이번엔 진경이 손으로 찰싹 때린 것이다. 이 눈치 없는 망할 오빠놈 같으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나타나선 사고를 치는 거냐고! 평소에 주먹도 안 쓰더니 서강준한테 솜방망이 같은 주먹은 왜 또 휘두르고! 오빠가 아니라 아주 웬수였다. 그 사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 강준이 옷을 털며 매무새를 추슬렀다. 그 느릿한 동작과 손길에 깃든 우아함에 진경은 잠시 시선을 홀렸다. 저게 타고날 때부터 상위 1% 재벌의 클래스인가. 작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코입도 뭔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것 같고. 진경과는 또 다른 눈빛으로 강준의 얼굴을 세심히 살핀 세희가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또 입술 터졌어요.”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요. 그나저나 세희 씨 놀라진 않았어요?”
“네, 전 괜찮아요.”
옴마야, 목소리도 죽이는데 매너도 죽여주네. 누구랑 너무 비교되게.
“친구분도 괜찮으세요?”
강준의 서늘한 눈빛이 제게로 향하자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른 진경은 씩씩하게 외쳤다.
“전 강심장이라 괜찮습니다!”
그러고선 사고 친 대형견을 보듯이 진경의 앙칼진 눈이 진우에게 꽂히는 그때였다.
“진경아, 강준 씨 좀 부탁해.”
진경을 스쳐 지나간 세희가 진우를 싸늘한 음성으로 호출했다.
“진우 오빤 나 좀 보고.”
진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씨, 이게 아닌데. 축 늘어진 어깨로 세희를 따라가다 뒤를 돌아본 진우는 제 눈을 의심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설마, 세희랑 진경이 앞에서 내가 의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도록 자극한 거였어? 당했다는 생각에 분함을 느끼기도 전에 세희가 다시 진우를 불렀다.
“오빠.”
“어, 가고 있어!”
진우와 세희가 테라스로 나간 후, 진경은 강준과 덩그러니 남았다. 어색함에 강준을 바라보며 진경은 있는 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사람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전 세희 베프 김진경이라고 합니다. 방금…… 무례한 짓을 한 저 댕댕이만도 못한 오빠놈의 동생이기도 하구요.”
“서강준이라고 합니다.”
이름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깍듯하면서도 오만한 자기소개였다. 근데 기분 나쁘긴커녕 남자와 참 잘 어울린다.
“누추한 집이지만 우선 들어오실래요?”
진경을 따라 강준이 여유롭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도착하자 엉거주춤 돌아선 진경에게 강준이 태연히 말했다.
“오빠분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이 남잔 분명 배려심에 한 말인데 왜 난 더 신경 써달라고 들리는 걸까. 진경은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혀 대답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오빠 대신해서 제가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원래 저렇게 다혈질이 아닌데. 대신 세희 베프로서 저한테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사죄의 의미로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릴게요.”
천천히 소파에 앉는 강준을 보며 진경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오빠놈 때문에 오늘 절대 갑 행세는 글렀다. 왜 사고는 저놈이 치고 수습은 내가 해야 하냐고.
“그럼…….”
천천히 소파에 앉은 강준이 긴 다리를 꼬고선 진경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분명 반듯하게 앉았는데도, 풍기는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오만했다.
“그럴까요, 김진경 씨.”
그럼에도 강준의 허스키한 저음은 듣기 좋았고, 씨익 올라가는 유려한 입꼬리는 매혹적이었다. 이래서 목석같은 주세희도 사랑에 빠진 거였어. 왠지 서강준이란 남자에게 낚인 기분으로 진경은 털썩 소파에 앉았다. *** 테라스로 끌려 나온 진우는 제 턱 밑에도 오지 않는 세희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정말 미치도록 억울한 마음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세희야, 난 진짜 그 남자가 스토컨 줄 알았어. 물어도 대답은 없고, 여기 올 일 없는 남자가 너 있는 거 알고 진경이 집 초인종을 누르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해?”
“의심되면 나한테 확인 전화 먼저 했어야지. 그리고 오빠가 깡패야? 왜 주먹부터 휘둘러?”
“나도 처음부터 주먹을 휘두른 게 아니라니까? 사람이 말로 해도 듣는 척을 안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열 받아서…….”
말을 멈춘 진우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분명 그 남자의 계략이었다. 화장실 벽까지 금 가게 할 만큼 센 주먹에 단 한마디로 자신을 눌러버릴 만큼 칼 같은 언변을 가진 남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자신을 상대하고 도발했다는 게. 사실 진우도 그 남자가 스토커라고는 생각 안 했다. 우연히 주차장에서 마주친 남자가 그저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주세희와 만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 집 가기만 하라고, 초인종만 눌러보라고, 경고를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남자는 기어이 진경의 집 앞에 도달했고 피식 비소를 날리며 진우에게 말했다.
‘주먹 쓸 담도 없으면서 입만 살아서는.’
그 도발에 넘어간 결과, 진우는 주세희 앞에 이렇게 죄인이 되어 서 있었다.
“오빠가 오해했다 치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게.”
너무도 쉽게 세희가 용서해주자 진우는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다. 그래, 세희야. 그깟 남자보단 오랜 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너도 아는구나.
“근데 다신 강준 씨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 나 그 사람이랑 다시 시작했고, 가능하면 결혼도 할 거야.”
결혼이란 단어에 이성이 툭 끊기며 진우의 눈이 뒤집어졌다.
“주세희 너 미쳤어? 그 남자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다른 남자는 다 돼도 그 남잔 안 되는 거 네가 잘 알잖아. 근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 잘못을 딸인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너무도 서글픈 세희의 질문에 진우는 말문이 탁, 막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손가락질하고 욕해도 괜찮아. 근데 나에게 가족 같은 오빠와 진경이만큼은 내 편이 되어주면 안 돼?”
“세희야, 오빤 그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세희를 부르던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맑고 차분한 세희의 커다란 눈동자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는 건 물기였다.
“강준 씬 처음부터 내 남자였어. 언니 이름만 빌렸을 뿐, 결혼식도 내가 했고 아내 역할도 내가 했고, 함께 살고 정을 쌓고, 그 사람이랑 사랑한 것도 나라구. 근데 왜 내가 언니 남잘 뺏은 거야?”
“……!”
“나도 이젠 행복해지고 싶어. 내 삶을, 내 가정을, 욕심내고 싶다구.”
커다란 눈에서 툭,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세희가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저 남자랑, 그리고 내 아이랑 같이.”
그리고 세희의 마지막 말에 진우의 심장도 툭,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