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두 사람의 천군만마.2022.01.27.
연숙은 다른 재벌가 사모님들과 달리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사교모임을 많이 하지만 한 번 입었던 옷과 액세서리도 여러 번 입고 착용했다. 그런데도 워낙 친정과 시댁이 짱짱한 덕에 그런 연숙을 감히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검소하고 소박한 재벌가 사모님이라며 국민들에겐 사랑까지 받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한신 그룹의 고결한 이미지에 자신이 한몫했다고 자부할 만큼. 그만큼 늘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성격의 연숙이지만, 오늘만큼은 꽤 심각한 표정이다.
“흠, 왕따 놀이는 취미 없는데.”
누구와 척을 진 적도 없고 미워한 적도 없는 58년 인생 처음으로, 연숙은 지금 못된 짓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잘나도 너무 잘난 아들이 처음으로 한 부탁이기도 하지만, 때릴 데 없는 그 애에게 조 여사가 손찌검했다는 말에 분노했으니까.
“우선 인맥 좀 이용해 봐?”
연숙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척척 움직여줄 행동 대장들에게 전화를 몇 통 돌렸다. 새로운 친목 모임 몇 개를 만들까 하는데 자격 조건은 단 하나. 조 여사가 활동하는 친목 모임 멤버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늦은 오후, 연숙은 비서를 대동하고 로얄 백화점에 들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VIP 쇼룸에 매니저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져온 상품을 본 연숙은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 아줌만 나잇값 못하게 무슨 취향이 이렇게 화려해?”
퍼스널 쇼퍼가 다음 주 조 여사의 자택에 챙겨 갈 가방과 액세서리들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심플한 디자인과 깔끔한 색을 선호하는 자신과는 취향이 너무 달랐다. 이것들을 사봤자 어디 쓸데도 없는데. 하지만 지금 연숙에겐 조 여사가 픽할 게 분명한 아이템들을 죄다 싹쓸이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었다.
“이것들 전부 계산해줘요. 당분간 가양 병원 조 이사장이 픽하려는 것들은 죄다 내 앞으로 달고. 무슨 뜻인지 알죠?”
매니저들에게 일일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고 팁까지 준 연숙은 1층으로 향했다. 친한 지인의 아들 부부가 득남했다는 소식에 아기 선물이나 사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기 용품 매장에 먼저 와 있는 여자 손님을 본 연숙의 눈이 동그래졌다. 머리를 풀어서 못 알아볼 뻔했지만 딱 봐도 그 애였다.
“가서 아는 척하면 그 녀석이 날 잡아먹을 텐데.”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서려던 연숙의 눈에 세희가 손에 들고 있는 아기 신발이 보였다. 물론 자신처럼 선물하러 온 걸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상상은 자꾸만 기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혹시 그 녀석이 그렇게 안날 나서 이혼을 서두르고 결혼하려는 이유가 어쩌면.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연숙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노패션 주세희 사장 맞죠?”
무심코 돌아선 세희는 연숙을 발견하곤 놀란 눈치였다. 당황한 기색으로 아기 신발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 등 뒤로 가져갔다. 그게 더 수상한 연숙이었다. 의심하기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말라보이고. 의심을 안 하기에는 아기 신발을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이 신경 쓰이고. 시치미를 뚝 떼고 다가간 연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놀라진 말아요. 그냥 반가워서 아는 척한 거니까. 나 누군지 알죠?”
“네. 안녕하세요, 사모님.”
놀란 얼굴과 다르게 다소곳이 눈을 내리깐 세희의 음색은 여전히 듣기 좋을 만큼 단정했다. 다시 봐도 참 분위기가 맑고 예쁜 아이였다.
“난 친한 지인 아들 부부 선물 사러 왔는데. 주 사장은?”
“아, 저도요.”
세희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젠 그만 사라져줘야 하나 연숙이 고민하는 사이, 손목시계를 확인한 세희가 조심히 연숙을 보았다.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을 반기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말간 눈을 보니 왜 이렇게 예쁜지. 문득 연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를 생각보다 참 많이 예뻐했다는 걸.
“30분 정도 여유가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럼 당연히 되지! 왜 안 되겠어요?”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연숙이 세희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 8층 카페에 딱 하나 있는 룸이 다행히 비어 있었다. 세희가 내민 명함을 연숙이 웃으면서 받았다.
“이름만 바뀌었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네. 그치?”
“먼저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절 많이 예뻐해 주셨는데 그렇게 떠나서 굉장히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사모님을 꼭 뵙고 싶었구요.”
“자기랑 나랑 텔레파시 통했나 보다. 나도 세희가 보고 싶었는데!”
벌떡 일어난 연숙은 어느새 세희의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내밀며 싱긋 웃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만나면 되겠다. 근데 번호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 네.”
세희는 자리에 앉은 지 1분도 안 되어 연숙에게 핸드폰 번호를 자진 납세했다. 뭔가 얼떨떨한 기분의 세희와 달리 연숙은 마냥 신이 나 있었다. 그런 연숙을 바라보며 세희는 고민했다. 고마운 이분에게 어떻게 첫마디를 꺼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당연히 정중한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제가 사모님 가족을 기만했어요.”
“그걸 왜 세희가 사과해? 말 그대로 세희 의지가 아니었고, 솔직히 우릴 기만한 건 조 이사장인데.”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저도 엄연히 공범이니까요.”
“그럼 세희는 우리한테 괘씸한 공범이자 고마운 은인이겠네?”
세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자 연숙이 싱긋 웃었다.
“세희가 아니었으면 가족들 속이 타든 말든, 내 아들은 지금도 비혼주의 외치고 있을걸?”
사실 지금까지도 세희는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이분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긴 할까. 하지만 예전처럼 다정히 바라봐주는 연숙의 눈빛에 용기가 솟았다.
“사모님, 제 진짜 이름은 주세희예요. 아버지는 이노그룹 부회장 유영국이고…….”
“세희야,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네 마음 아프게 다시 말 안 해줘도 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히 물었다.
“제가 주세희란 이름으로 강준 씨를 당당하게 사랑해도 될까요?”
“네가 어디가 뭐 어때서 그런 걸 물어봐? 당연히 되지.”
“제가 강준 씨에게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니까요. 주세희란 이름은…… 한신에 폐를 끼칠 수도 있구요.”
세희가 한 말을 곱씹듯 잠시 말이 없던 연숙이 세희의 손을 잡고 다독거렸다.
“세희 너 나름대로 생각할 게 많았나 보구나. 우리한텐 별거 아니고 신경 쓸 일도 아니지만 너한테는 아닐 테니까, 그렇지? 우리 아들을 사랑하니 피해 주는 건 더더욱 싫을 테고.”
제 마음을 알아주는 연숙 때문일까. 세희는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한신 그룹에 관해선 무슨 일이 터져도 강준이와 아버님이 알아서 잘하실 거야. 워낙 그쪽으론 유전자가 출중한 서씨 집안 남자들이거든. 그래서 난 걱정 안 해. 그럼 우리 아들 이야길 해볼까?”
연숙의 부드러운 음성에 홀린 듯 세희는 눈을 들었다. 강준이 자신을 볼 때처럼, 연숙도 다정한 눈빛으로 따뜻하게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우리 아들이 심각하게 잘나긴 했지? 근데 잘난 만큼 결핍도 심각한 애야. 사적인 감정 결핍, 그리고 지독한 개인주의. 가족도 포기한 내 아들 결핍을 채워준 게 바로 세희고.”
“…….”
“그럼 내 아들은 세희에게 부족한 출신이나 배경, 재력을 가득 채워주면 되겠지? 서로 부족한 점을 이해해주고 채워주는 게 사랑이고 부부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 될까?”
이래서 인생 경험 많은 어른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나 보다. 마냥 이해하고 배려해주려는 강준보다 연숙이 조목조목 알려준 합리화가 세희의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버님과 난 네가 다시 한신의 며느리가 될 날만 기다리고 있어.”
“……회장님도요?”
“못 믿겠어? 그럼 지금 당장 전화해서 아버님 부를까? 바빠도 통화는 가능하실 거야.”
“회장님은 나중에요!”
화들짝 놀란 세희는 핸드폰을 집는 연숙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서 회장도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동시에 둘을 상대하면 심장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그런 세희가 귀여웠는지 싱긋 웃은 연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강준이 그 녀석이랑 말해봤자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설득일 게 뻔하니. 자고로 수다는 여자끼리 떠는 거 알지?”
다시 한번 연숙에게 고마워지는 세희였다. 시어머니가 아니라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나도 예뻐해 주고 포용해주는 분이니 배 속의 프레는 더 예뻐해 주시겠지. 프레를 떠올리자 본능적으로 세희는 배를 손으로 감쌌다.
“세희야, 차분히 생각할 거 생각하고 따질 거 다 따져도 되니까 대신 내 아들만 꼭 받아줘. 늙은이 둘 생각해서 올해만 넘기지 말고, 응?”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이느라 세희는 전혀 몰랐다. 어르고 달래듯이 말하는 연숙의 반짝거리는 눈이 배를 감싸고 있는 세희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 강준은 적잖이 실망했다. 결제 메시지이길 바랐건만.
[오늘 백화점에서 우연히 어머니 만났어요. 프레 이야기는 아직 안 했지만 자주 연락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해줄게요.]
그래도 주세희에게서 온 메시지라 금방 마음을 달래는 강준이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기다리던 결제 메시지가 왔다. 그제야 강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기특하네, 주세희.”
그 메시지가 뭐라고 눈을 못 떼고 바라보는 그때, 집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며 연숙이 들어왔다.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소파에 착석한 연숙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백화점에서 우연히 세희 만났어.”
강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연숙을 보았다. 늘 기분 좋아 보이는 어머니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소파에 앉은 어머니는 오늘 유독 더 기분이 좋아 보여서. 강준이 그러든 말든, 연숙은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엄만 적당히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세희가 먼저 차를 마시자고 하는 거 있지? 얘가 얼마나 예쁜 말만 하던지. 내가 엄청 보고 싶었다네? 아들한테도 못 들어본 말을 내가 며느리한테 들을 줄이야.”
“그래서, 저한테 보고 싶다는 말 듣고 싶어서 오셨어요?”
“다 큰 사내놈이 징그럽게 무슨! 난 내 아들한테 조언 좀 해주려고 왔거든?”
잔뜩 신이 나서 득의양양한 연숙의 표정에 강준은 우선 들어보기로 했다.
“세희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더라. 상처받을까 봐, 남한테 피해 입힐까 봐, 단단히 벽 쌓고 있는 게 느껴졌어. 안 그래도 마른 애가 살은 더 빠져서 대뜸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는데 속상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연숙이 세희를 어지간히도 예뻐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 강준이었다. 남의 기분은 늘 뒷전이던 연숙이 그 정도로 세심히 관찰하다니.
“네가 싫어서 밀어내는 거 아니니 포기하지 말란 뜻이야.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애라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그러는 거니까. 작은 것 하나까지 다 끌어내서 생각해보고 정리한 후에 올 눈치던데.”
“누가 포기해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인데.”
강준도 알고 있었다. 주세희는 이미 마음을 열었고 남은 건 시간 문제라는 걸. 자신에게 오기 위해 주세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도. 그것만으로도 세희를 기다려 줄 이유는 충분했고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물론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런데 이번엔 연숙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강준을 보고 있었다.
“만난 김에 엄마가 아버님과 내 뜻을 정확히 전달했더니 세희가 그제야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더라? 보나 마나 넌 세희에게 허락받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말 끝냈을 것 같은데.”
처음으로 정곡을 찔린 강준은 움찔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그 애가 생각이 더 많아지지. 이럴 때 보면 참 네 아빠를 닮았어. 여자 마음 헤아릴 줄을 몰라. 앞으로 내가 세희 만나서 잘 다독여 놓을 테니 걱정은 말렴. 너한테 맡겼다간 올해 넘기겠어.”
나이답지 않게 늘 천진난만하던 연숙이 처음으로 천군만마처럼 느껴지는 강준이었다. 진즉 어머니 도움을 받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조 이사장은 엄마가 적당히 손 써놨다. 사교계에 목매는 여자가 서서히 외면당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거야. 아, 세희도 보게 천천히……?”
“고마워요, 어머니.”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아들에게 처음으로 들은 고맙다는 말에 연숙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으며 강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들, 엄마에게 할 말 없어?”
“없어요.”
“정말?”
“네.”
담담히 대답한 후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를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 강준을 바라보며 연숙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바보천치도 아니고…… 너 설마 세희가 임신한 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
푸웁-. 연숙의 질문에 강준은 그만 입안에 막 머금었던 물을 뿜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