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인생 최고의 선물.2022.01.23.
천천히 허리를 세운 세희는 조 여사를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20년 전과 다름없이 주름 하나 없는 예쁜 얼굴을. 좀 더 내려간 시선이 화려한 네일 케어를 받은 희고 고운 손에 닿았다. 처음 만났던 9살의 어린 소녀를, 지금은 29살 성인 여자를, 여전히 가차 없이 때리던 무기를. 무심한 눈동자 안에 원망과 애증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런 세희를 경멸스럽게 바라보던 조 여사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신은 재계에서도 적통 중에 적통인 재벌가야. 그런 곳에서 너같이 더러운 걸 며느리로 받아줄 것 같니? 서 사장이 지금은 결혼하고 싶어 해도 서 회장과 대립하면 결국 포기하겠지. 그게 남자야, 이 멍청한 것아.”
강준에게 들었을 때 서 회장과 연숙이 결혼을 허락했다고 했다. 하지만 세희도 안다. 허락과 이해는 엄연히 다른 말이라는 걸. 물론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조 여사에게 말해줘야 할 이유도 없지만.
“말귀 참 못 알아먹네.”
휘둥그레진 눈으로 조 여사가 바라보자 세희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모 아니면 굳이 내 과거를 캐내서 한신가에 일러바칠 사람이 누가 있다고.”
“너, 이 건방진!”
벌떡 일어나려는 조 여사의 어깨를 손으로 누르며 세희는 차갑게 말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
“난 지금 소녀 가장에서 스스로 자수성가한 이노패션 대표 주세희예요. 그 정도 스토리면, 한신가의 고결한 이미지에 도움이 될 신데렐라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겠죠?”
파르르 떨리는 유리알 같은 눈을 보며 세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이모가 입단속을 잘해줘야 할 거구요.”
그제야 조 여사는 세희의 말을 이해한 눈치였다. 죽을 때까지 서로를 향한 경멸과 증오심을 끊을 수 없는 사이. 그렇다면 차라리 서로의 목줄을 움켜쥐고 평생 살자는 물귀신 작전 같은 지독한 그 뜻을.
“물론 내가 쥐고 있는 약점은 시간의 흐름에 지워질 수도 있고 묻힐 수도 있겠죠. 그래서 이모와 달리 난 끊임없이 이모의 약점을 캐내야 하겠지만.”
이 거래에서 손해 보는 건 나라는 듯, 꽤 속상한 얼굴로.
“물론 이모가 오늘 이후로 착하게 산다면, 명백한 저의 패배겠지만요.”
그런데 이모 어쩌죠. 당신이 나를 잘 아는 만큼, 나도 당신을 너무 잘 알거든. 조영희는 절대 깨끗하게 살지 못할 인간쓰레기에 돈과 권력을 향한 욕심을 포기 못 할 것을. 권력의 원천인 가양 병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조 여사는 이노그룹 부회장 사모 자리에 목을 맬 것이다. 실낱같은 권력이라도 쥐고 있어야 갑질도 하고 돈 장난도 칠 테고, 세희가 잡을 약점도 계속 생길 테고. 이혼하겠다는 영국을 말린 것도, 허수아비 같은 부회장직이라도 영국이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였다.
“내가 싫다면 어쩔 거냐.”
“지금 이모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세희는 싱긋 웃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복수였지만 프레와 강준으로 인해 복수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굵고 짧은 대신, 길고 가늘게. 죽을 때까지 조 여사 부부를 내 손에 움켜쥐고 감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난 결혼 안 하면 그뿐이지만 이모는…….”
일부러 말끝을 흐린 세희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둘 다 잃게 되겠죠? 가양 병원 이사장직과 이노그룹 사모 자리. 재력과 권력까지 다.”
조 여사는 분함에 이를 아드득 갈았다. 저 영악한 것과 거래하는 것 말곤 지금 당장 뾰족한 수는 없어서. 하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 한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거래는 우선 받아들이는 걸로 하마.”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난 조 여사는 이제 다시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저것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서강준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놈이었다면 재기 불가능하도록 제 숨통까지 끊어놓았을 테니. 우선은 제안을 받아들인 후, 어떻게든 그 윗집 놈을 잘 꼬드겨서 계획을 실행해야겠다. 그때까지도 네가 이리 날 무시할 수 있나 보자꾸나.
“내 사위였던 서 사장이랑 꼭 결혼하길 빌어주지. 그럼 지옥에 떨어졌을 네 엄마 무덤에 찾아가서 나도 할 말이 있지 않겠니?”
“…….”
“네 딸X은 너보다 더 더럽고 천한 X이었다고 말이야.”
세희의 약점이자 트라우마를 정확히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처받을 줄 알았던 세희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조 여사에게 다가갔다.
“엄마에게라도 가서 고자질하세요. 너도 모자라 네 딸에게도 내가 졌다고.”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음성과 달리 조 여사를 바라보는 세희의 눈은 또 다른 경고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감시하에 내가 숨죽이고 엎드려 살았다면, 이제부턴 당신이 평생 내 감시하에 숨죽이고 엎드려 살아.
“엄마 아니면 이모가 그 저속한 입을 어디서도 못 놀리도록, 숨 쉬는 것까지 내 눈치 보며 살게 해줄 생각이거든요.”
악녀는 더한 악녀가 상대하는 법이었다. *** 금요일 오후. 처음 프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혼자 왔던 여성 병원에 강준과 같이 왔다. 강준이 들어서는 순간 병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부티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연예인 같은 남자가 아내를 여왕님 모시듯 하니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세희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시선을 집중시킨 당사자는 세희밖에 안 보인다는 듯 행동했다. 아직 배는 납작한데, 만삭 임산부를 대하듯이 굴었다. 뭐든 너무 과하면 보기 안 좋은 법인데. 물까지 먹여주려는 강준의 손에서 세희는 종이컵을 뺏었다.
“강준 씨, 물은 제가 마실게요.”
“왜, 나도 먹여주고 싶은데.”
강준의 시선을 따라가자 건너편에 앉은 남편이 아내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부부를 보는 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강준과 세희만을 보고 있을 뿐.
“강준 씨, 저런 건 안 따라 해도 돼요.”
“내가 누굴 따라 할 클래스 같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오만해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세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 안 사람들이 다 우리만 보고 있단 말이에요.”
“보라고 해요. 내 여자한테 내가 물 먹여주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누가 뭐라 한다는 게 아니라 민망해서 그러잖아요. 타고난 재벌들은 정말 이목을 신경 안 쓰는 게 맞나 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민망함은 오로지 세희의 몫이었으니까. 강준에게 이 마음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막막하기까지 했다.
“세희 씨 불편하면, 내가 보지 말라고 말할까요?”
“아니요!”
한다면 하는 남자란 걸 알기에 칼같이 대답하자, 강준이 피식 웃었다.
“근데 좀 서운하네. 나랑 같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나 신경 쓰다니.”
강준은 세희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며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난 온통 주세희 밖에 안 보이는데.”
다정한 스킨십과 달콤한 속삭임도 모자라 강준은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까지 했다.
그 순간, 세희는 듣고 보고야 말았다. 뒤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를. 어떡해, 라면서 입을 막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간호사들을. 애꿎은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아내들을. 하트 뿅뿅인 눈으로 강준을 바라보는 여자들을, 또는 세희를 부럽게 바라보는 여자들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강준에게 따끔하게 경고하려는 그때였다.
“주세희 님,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세희의 차례를 알려왔다. 세희는 강준에게 눈을 흘기며 일어났다. 하여간 타이밍의 귀재라니까. 다시 한번 느끼지만 하늘마저도 얄미울 만큼 서강준의 편이었다. *** 초음파를 하는 동안 침대 옆에 앉은 강준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세희는 그런 강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냥 궁금했다. 이 남잔 지금 어떤 눈과 어떤 표정일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하지만 늘 그렇듯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강준은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미묘하게 서운한 세희였다. 4개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빠진 몸무게가 그대로자 의사가 강준에게 한마디 했다.
“주 수치고 태아가 작은 편이니 남편분께서 단백질 위주로 산모분이 잘 챙겨 먹게 해줘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강준을 세희는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강준이 얼마나 먹는 것에 신경 썼는지 알기에.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맘껏 먹고 싶지만 안 들어가는 걸 어떡해. 초음파 검사가 끝나자 강준은 의사에게 물어볼 게 있으니, 세희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10분 정도 후, 진료실에서 나온 강준이 세희의 옆에 앉았다.
“뭐 물어봤어요?”
“그냥 이것저것. 책에서 배우는 정보와 의사에게 듣는 정보는 다를지도 모르니.”
그때 다시 간호사가 세희의 이름을 불렀다. 초음파 사진과 산모 수첩을 받고 설명을 듣는 그 잠깐 사이, 강준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해요?”
세희가 다가가자 강준은 시선을 잠시 들었다가 아직 납작한 세희의 배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의사 말이 태아에게 아빠 목소리를 많이 들려주라고 하더군요.”
중얼거리듯 대답한 강준은 세희의 가느다란 허리를 양손으로 감싼 후 진지한 표정으로 엄하게 말했다.
“프레야, 엄마 좀 힘들게 하지 마. 자꾸 이러면, 나중에 아빠한테 혼난다.”
이제 4개월하고도 이 주가 되어가는 프레가 그런 아빠의 표정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이어지는 강준의 말에 세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한텐 네가 인생 최고의 선물이겠지만. 아빠에겐 네 엄마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거든.”
강준이 천천히 얼굴을 들고 눈을 맞춰왔다.
“고마워요, 주세희 씨.”
“……뭐가요?”
고마운 건 정작 난데, 당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아빠로 만들어줘서?”
얇은 눈꺼풀 아래 반쯤 잠긴 눈동자가 심장에 각인을 새기는 것처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세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뜨겁게 타들어 갔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지금까지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고 저주였고 죄였으니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며 긴 속눈썹 아래 물기 젖은 눈동자를 얼른 숨겼다. 들키기 싫은 그 눈물을 눈치챈 걸까. 천천히 일어난 강준이 세희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세희는 깨달았다. 이 품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타인의 이목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아늑하고 편안한 그 품에서, 이 남자로 인해서, 세희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악착같이 독하게 살아가길 잘했다고. *** 세희는 저녁에 로얄 백화점에서 진경과 만나기로 했다. 이노패션 전무가 된 걸 축하도 할 겸, 생일 선물도 챙겨 줄 겸, 마음에 드는 선물을 직접 고르게 할 생각이었다. 백화점에 세희를 내려준 강준은 자신의 신용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드는 앞으로 세희 씨가 가지고 다녀요. 오늘 살 친구 선물도 이 카드로 결제하고, 세희 씨도 앞으로 뭐 살 때 이 카드로 결제하고.”
M 카드사의 블랙 프리미엄 카드를 세희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가입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워 유명 연예인들조차 발급받는 데 실패했다는. 강준이 어떤 마음으로 주는 건지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이 카드는 좀 부담되는데. 차라리 다른 신용카드를 주라고 할까. 그런데 세희의 고민을 꿰뚫은 것처럼 강준이 말했다.
“나도 알아요, 내가 좀 굉장한 카드를 줬다는 거.”
“알면 다른 카드로 주세요.”
“안 돼요, 이 카드여야만 해.”
세희에겐 늘 괜찮다는 남자가 이번엔 단칼에 거절했다.
“날 아빠로 만들어줬는데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해준 게 없더라고. 원하는 게 없으니 뭘 사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싱긋 웃은 강준이 세희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내 아이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좀 받아주면 안 돼요?”
서강준을 선택한다는 건, 서강준의 클래스에도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이 카드처럼. 안 된다고 하면 또 다른 방식으로 날 설득할 남자기도 하고.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갖자. 재벌이라서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한 남자가 재벌 3세일 뿐이니까. 세희는 카드를 받으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협박했다.
“결제 문자 계속 간다고 구박하기만 해봐요.”
“제발 좀 그래 줄래요? 문자 울릴 때마다 내 행복 지수가 팍팍 올라갈 테니.”
강준의 차가 사라진 걸 보고 나서야 세희는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진경이 가장 좋아하는 C 브랜드 매장은 6층 명품관에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세희의 발걸음이 아기 용품 매장 앞에 홀린 듯 멈추어 섰다. 강준과 아기용품을 같이 보러 가기로 했지만 아직 가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희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앙증맞은 사이즈의 신발이었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는데.”
신발을 들고 바라보는 세희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노패션 주세희 사장 맞죠?”
무심코 돌아선 세희는 매장에 들어서는 연숙을 발견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짝거리는 연숙의 눈이 세희의 손에 들린 아기 신발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