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주세희란 이름으로.2022.01.20.
이노패션으로 출근한 지 일주일 째. 주세희라고 적힌 유리 명패를 가는 손끝으로 부드럽게 훑은 후, 세희는 김 실장을 보았다. 다시 비서팀의 수장이 된 김 비서는 27살이란 나이에 당당히 실장이란 직책을 달았다. 그 전엔 입사 연차가 얼마 되지 않아 직급을 제대로 못 줬지만, 지금은 엄연히 다시 스카우트되어 온 귀한 인재시니. 그래서일까. 다시 출근한 이후 김 실장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세희는 차분히 물었다.
“회사 분위기는 어때요?”
“대표이사가 바뀌고 임원진들까지 대거 교체되는 바람에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세희는 가장 먼저 조 여사의 사람들을 걸러냈다. 이번 주주총회 때 조 여사가 집합시킨 덕에 미처 몰랐던 사람들까지 몇몇 알게 되었다. 초록동색이란 말처럼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무능력한지. 강등조치 또는 권고사직이란 초강수를 두자 대부분 권고사직을 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조 여사의 완벽한 패배를 두 눈으로 본 이유겠지만. 그 후 이사회의 승인하에 영업 마케팅 전무 이사에 진경을 선임하고 새로운 임원들을 선출했다, 이제 다음 순서는 흐트러진 회사 분위기를, 정확히는 직원들의 기강을 잡는 것.
“신비주의로 밀고 나갔던 유태령 전 사장님의 평판이 직원들에게 좋아서 더 불안함이 고조되는 것 같습니다. 현 사장님은 도라 쇼핑몰 대표로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그 전 실적을 유태령 전 사장님이 사장님께 돌린 것도 그렇고. 모두 낙하산을 위해 이사회에서 조작한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
유태령일 때 좀 못된 사장인 척 굴 걸 그랬나. 희미한 후회감에 사로잡히는 그때, 세희의 눈치를 보던 김 실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 유진 화학에서 최연소 전무 자리를 꿰찬 여성 임원의 인성 논란 여파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분도 굉장히 예쁘셨는데 결론은 얼굴값만 하고 인성과 능력 값은 못 해서 교체되었다는 기사, 사장님도 보셨죠?”
“봤어요.”
“연예인 활동하다가 하도 안 떠서 부모님 빽으로 상무 자리 꿰찬 거라고 기사가 다시 떴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짜 맞추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세희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뻔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케이스일 거다?”
“우선 직원들 사이의 소문은 그렇습니다.”
결론을 내자면 직원들은 의심하는 거였다. 혜성처럼 나타나 최대주주에게 반기를 들고 이사회를 장악해서 새로운 대표가 된 자신의 능력을. 능력으로 입증하면 될 일이지만, 당장 흐트러진 분위기를 잡을 순 없다. 그럼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세희는 차분한 음성으로 김 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음 달 예정이던 스톡그랜트 성과급 공지 오늘 당장 올려요.”
모두 돈 벌자고 하는 일이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사기를 북돋는 데 성과급만 한 특효약은 없으니까. 주주들에게 특별 배당을 했으니 이제 자신과 같이 고생해준 직원들에게 돌려줄 차례기도 했다. 공지 조금 당긴다고 큰일 날 일도 없으니까.
“그리고 부서별로 회식 일정 짜봐요. 회식 메뉴는 부서원들이 선택하도록 하고. 오래 있으면 꼰대 소리 들으니 난 짧고 굵게 20분 정도만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도 해주고.”
“사장님이 직접 참석하시게요?”
유태령이었을 적 임원들을 제외하고 직원들과의 대면은 최대한 피했다. 그걸 알기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김 실장에게 세희는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젠 직원들 피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불안해하면 직접 얼굴 보고 대면 소통해서 증명해주지, 뭐. 늘 그렇듯 난 실전에 강하니까.
*** 강준의 24시간은 주세희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주세희로 시작해서 마무리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달려가서 출근시켜주고 약속이 없는 한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 후 다시 각자 회사로 가서 일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다시 주세희를 데리러 갔다. 여전히 바쁘긴 했지만, 뭐든 제 손을 거쳐야 했던 완벽한 업무 성향을 내려놓으니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졌다. 오늘 강준이 점심을 먹으려고 세희를 데려간 곳은 작은 골목에 있는 평양 냉면집이었다. 입맛에 맞았는지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은 세희가 신기한 표정으로 강준을 보았다.
“강준 씬 이런 맛집을……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나도 지금은 내 입맛을 잘 모르겠는데. 덧붙인 세희의 작은 중얼거림에 강준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도 사랑의 마법이라고 하면 또 질색할 것 같아서. 그런데 정말 사랑의 마법 맞는데. 비서팀에서 올린 맛집 리스트를 보고 있으면 이건 주세희가 잘 먹을 것 같다는 촉이 올 때가 있다. 그리고 정말 그곳에 데려가면 세희는 다는 아니더라도 한 가지 메뉴는 잘 먹어주었다.
“프레가 아빠한테 텔레파시를 보냈어요. 이건 엄마가 잘 먹을 것 같으니 데려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강준의 능청스러운 대답이 재밌는 건지, 아니면 기가 막힌 건지. 긴 속눈썹을 몇 번 깜박거리던 세희는 결국 웃어버렸다. 부드럽게 휜 눈매로 눈웃음을 흘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강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시야를 좁혀 눈앞의 주세희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출구 없이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 이런 건가. 저 웃음 하나 보겠다고, 별짓을 다 하는 스스로가 황당하긴커녕 오히려 뿌듯했다. 영혼과 심장까지 다 바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주세희의 웃음이 곧 자신의 행복이란 걸 깨달은 이상, 강준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평생토록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주세희가 잘 먹어주니 고맙고 또 행복하고.”
세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지만 강준은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는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니까. 지금 자신을 향해 주세희가 풍기는 감정처럼.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는 강준을 빤히 바라보던 세희가 조심히 물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잊지 않았죠?”
내일은 같이 병원 가는 날이었다. 혹시라도 잊었나 싶어 슬그머니 떠보는 이 귀여운 여잘 어찌해야 하나.
“감히 잊었을 리가. 스케줄 조절해놨고 윤 실장에게 귀띔해주라 했고 알람까지 맞춰놨는데, 보여줄까요?”
“바쁜데 괜찮아요? 나 혼자 가도 괜찮은데.”
윤 실장이 강준에게 해준 강력한 조언 하나. 임신한 아내의 괜찮다는 말을 절대 믿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강준은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세희 씨 혼자 병원 가게 했지만, 이젠 안 돼요. 프레가 보고 싶기도 하고.”
강준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그제야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세희가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강준에게 물었다.
“주말에 제 친한 친구가 생일파티 하는데 같이 갈래요? 그러니까 혹시…… 강준 씨 시간 되면요.”
그 초대가 어떤 의민지 알기에 강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야 가면 좋지만, 정말 내가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세희에게 강준은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이제 다시 날 믿어주는 건가?”
잠시 망설이던 세희는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둥근 원형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곤 상체를 기울여왔다. 마치 비밀이라도 속삭일 것처럼.
“단 한 번도 강준 씨를 믿지 않은 적 없어요. 변함없는 강준 씨처럼, 내 상황도 변함이 없으니까. 그 상황에선 답이 안 나와서. 그래서 떠난 거예요.”
그건 강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못 믿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황 때문에 떠났다는 걸. 또한 주세희의 비밀을 알고 난 후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과정은 틀릴지라도 해야 할 일은 같으니까. 주세희란 이름을 찾아야 하고 강준은 이혼을 해야 하고. 다만, 비밀을 털어놓고 같이 짊어지고 해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난 지금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니까. 그래서 내가 상황을 바꿔보려구요.”
강준이 대답하지 않자 세희는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결과는 장담 못 하니까 기대하진 말아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프레가 태어나기 전까진 강준 씨도 마음 편히 가졌으면 해요. 강준 씨가 우리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주세희란 이름으로.”
강준이 주세희로 인해 변한 것처럼, 주세희도 자신으로 인해 변화의 폭풍을 겪고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건 서운하지만, 이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없다. 주세희 모르게 뒤에서 손을 쓰면 모를까. 강준은 일부러 웃으며 장난스럽게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혹시 그 최선이 못되고 이기적인 악녀로 변신하는 건가?”
“네.”
웃자고 한 말에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세희가 대답하니 결국 강준은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미치겠다, 정말. 지금까지도 유일했지만, 앞으로도 자신을 웃게 해줄 유일한 존재인 주세희 때문에. *** 이노패션 대표 집무실에 앉은 조 여사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주세희에게 전화해서 당장 보자고 했더니 일정 빼기가 힘들다고 회사로 오라고 했다. 부르르 떨며 어떻게 이노패션까지 오긴 왔더니, 이번엔 비서가 사장님이 외부에서 점심 식사 중이니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건방진 년, 감히 날 오라 가라 한 것도 모자라서 기다리게 만들어?”
30여 분 기다렸을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주세희가 들어왔다. 늘 묶고 있던 머리를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세련된 정장을 입은 모습은 예전 유태령과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달라 보인다. 사이가 사이인 만큼 겉치레적인 인사도 오가지 않았다. 삭막하고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맞은 편에 세희가 앉자마자 조 여사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어디 들어나 보자꾸나. 네가 가진 패가 뭔지.”
주주총회 때 제대로 한 방 먹은 후 조 여사는 일주일 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 영악한 것이 또 무슨 짓을 꾸미는지.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으니 직접 들으러 오는 수밖에. 먼저 알려주겠다는 걸 사양하는 것도 바보짓이니까. 그리고 주세희는 조 여사의 질문에 말장난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스위스에 계좌를 보유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당연히 해외 금융계좌 신고는 안 하셨겠죠? 아, 가상화폐로 자금 세탁도 좀 하신 것 같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조 여사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구나.”
“가양 병원도 요즘 말이 많던데.”
가양 병원까지 세희의 입에서 나오자 조 여사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잇단 의료사고도 돈으로 무마하고. 이모 말 안 들으면 인사 보복에 갑질 논란까지. 캐내도 끝이 없더라구요. 병원 직원들과 가사도우미, 그리고 매장 직원들에게 이모가 한 갑질 영상은 제가 증거 차원으로 몇 개 확보했어요.”
구역질이 나올 만큼 제 엄마를 꼭 닮은 순진무구한 눈빛과 표정으로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잘도 했다.
“아, 대외적으론 이노 그룹 부회장의 현모양처인 이모가 정 실장님과 뒤에서 몰래 즐기신 것도 증거 사진 확보했구요. 이 정도면 이모 매장시키기엔 충분하지 않을까요?”
조 여사는 잠시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저 영악한 것의 진짜 목적이 이노패션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을 향한 복수라는 걸, 왜 진즉 간파하지 못했는지.
“제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가지예요. 첫째, 가양 병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날 것. 둘째, 이노패션 지분을 전량 매도할 것.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저도 이모처럼 앞으로도 쭉 모르는 사람처럼 살게요.”
핸드백을 쥔 조 여사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팔면 넌 그걸 다시 사들여서 나 대신 이노패션 최대주주가 되고?”
다시 봐도 참으로 영악했다. 사장 자리에 오른 것도 모자라 최대주주가 되어 이노패션을 정말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내가 살려놓은 회사고 그걸 사들일 돈도 넘쳐나고.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순진무구하게 싱긋 웃는 세희의 미소를 조 여사는 끔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권력만 잃고 그간의 부를 유지해도 저 것에게 넙죽 엎드려 눈치 보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거절하면 모든 걸 잃는 것도 모자라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매장당한다. 결론은 저 영악한 것만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제안이라는 것.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마냥 넙죽 엎드려서 꼼짝없이 당하길래 정말 몰랐다. 저 안에 성공을 향한 질긴 욕망과 자신을 향한 깊은 복수심을 키우고 있을 줄은.
“물론 증거를 다 준다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절 믿기 힘들겠죠. 이해해요. 그래서 저도 치명적인 제 약점을 이모한테 알려드리려구요.”
약점은 무슨. 당연히 조 여사는 세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 또 무슨 속셈이야.”
“속셈은 아니고 그냥 결혼이나 할까 해서요.”
왠지 모를 불안함에 사로잡힌 조 여사는 설마 했다. 미치지 않은 이상, 감히 서강준이랑 할 생각은 아니겠지.
“제 능력으로 이노패션을 가졌으니, 이제 한신 가의 작은 사모님이 될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천천히 일어나 다가온 세희는 허리를 기울여 조 여사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왔다.
“주세희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