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악녀 선전포고. (83/110)

83. 악녀 선전포고.2022.01.16.

차 안에서 강준이 물었다.

16564555426912.jpg“이 좋은 날 굳이 그 사람을 만나야 하나?”

대답 대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세희의 머리는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할 생각이었는데, 영국이 먼저 연락해주니 오히려 반가웠다. 어지간히도 애가 달은 모양이지. 그건 곧 세희에게 유리하게 상황이 흘러갈 거란 의미였다.

16564555426918.jpg“그간 나한테 못 했던 아빠 노릇 좀 한꺼번에 받아내려구요.”

16564555426912.jpg“…….”

16564555426918.jpg“욕 나올 만큼 실컷 이용해줄 거야.”

그제야 강준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세희를 보았다. 세희가 그 눈을 피하지 않자 강준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64555426912.jpg“유 부회장, 큰일 났네. 주세희 화나면 엄청 무서운데.”

내가 언제 당신한테 화냈다고.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지만 그럴수록 세희는 더욱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64555426918.jpg“나 지금부터 엄청 못되고 이기적인 악녀로 변신할 거예요.”

프레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당신도 실컷 이용하고 유영국도 실컷 이용할 거야.

16564555426918.jpg“그래도 나 사랑해줄 수 있어요?”

때마침 신호가 걸렸다. 강준이 상체를 기울여오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세희는 절로 긴장했다. 초옥-. 강준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는 순간, 세희는 눈을 감았다. 짧았던 입맞춤 후 살며시 눈을 뜨자 웃음기 어린 강준의 눈과 마주쳤다.

16564555426912.jpg“몰랐어요? 내 취향이 요마녀 플러스 악녀인 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괜히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세희가 귀여웠는지 강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영국을 만나기로 한 장소는 예전에 만났던 가림 한정식이었다. 식당 주차장에 도착한 강준은 세희를 품에 꼭 안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16564555426912.jpg“데리러 올 테니 볼일 끝나면 연락해요.”

알겠다고 대답했는데도 강준은 영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세희 또한 이 품에 한없이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정신 차려야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니까. 세희는 강준의 가슴을 손으로 살며시 밀어냈다.

16564555426918.jpg“강준 씨, 이제 그만 가요.”

그제야 마지못한 듯 세희를 놔준 강준이 차에 올랐다. 강준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간 후 돌아선 세희의 시야에 영국이 보였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 강준이 사라지니 나온 눈치였다.

16564555566739.jpg“서 사장이 아직도 널 애지중지하는 모양이구나.”

알면서 연락했을 게 뻔한데, 지금 안 것처럼 말하는 영국이 세희는 가증스러웠다.

16564555426918.jpg“강준 씨가 절 많이 사랑해요.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졸라대서 피곤해 죽겠어요.”

뻔뻔할 만큼 차분한 세희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영국이 소리 내어 웃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좌식 룸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식사가 세팅되기도 전에 세희는 물었다.

16564555426918.jpg“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16564555566739.jpg“네 이모를 이기고 이노패션 대표이사가 된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밥 한 끼 사주려고 불렀다. 아빠로서 그 정도는 해줘야지.”

세희는 영국의 속이 훤히 보였다. 지금껏 잊고 있다가 조 여사를 한 방 먹인 주요주주가 강준이란 걸 알고 난 후 나름 고민했을 것이다. 어디에 붙어먹어야 더 얻을 게 많을지. 하지만 세희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16564555426918.jpg“고마워요, 아빠.”

16564555566739.jpg“방금 날 아빠라고 부른 게냐?”

16564555426918.jpg“제 아빠 맞잖아요. 솔직히 언니도 독일로 영영 떠난 마당에, 제가 아빠 딸 노릇 못할 건 뭐예요?”

세희에게서 처음 들은 아빠란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영국이 조심히 물었다.

16564555566739.jpg“너 설마…… 그 애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부모 자식 사이를 갈라놓은 건 아니지?”

16564555426918.jpg“그럼 안 돼요? 언닌 30년간 아빠 사랑 독차지했는데. 이젠 내 차례가 올 때도 되었잖아요.”

16564555566739.jpg“허, 참.”

기가 막힌 듯 영국이 내쉰 한숨에 세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사생아보단 본처에게서 낳은 자식이 아픈 손가락인가 보지.

16564555426918.jpg“아빤 제가 싫으세요?”

16564555566739.jpg“그럴 리가! 너도 엄연히 내 딸이다. 오히려 신경 못 써줘서 더 아픈 손가락이지, 넌.”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영국이 펄쩍 뛰며 말을 이었다.

16564555566739.jpg“네 이모 때문에 오랫동안 모른 척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아빠 노릇 해주마.”

16564555426918.jpg“어떻게 아빠 노릇 해주실 건데요?”

16564555566739.jpg“널 위해 내가 당장 네 이모랑 이혼하마. 그럼 널 내 호적에 올리는것도 쉽지. 그럼 한신에 인사하러 가기도 더 떳떳할 테고. 아빠가 같이 가주마, 응?”

너무 쉽게 조강지처를 버리겠다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타고난 바람기는 어쩌지 못해도 이노그룹 부회장직에 올려놓고 지금도 탄탄하게 남편을 받쳐주고 있는 건 조 여사였다. 그런 본처의 소중함을 알긴커녕 지금 영국은 배신하고 버리려 하고 있었다. 오로지 한신 그룹에 요직 하나 얻을 생각에. 참 안일하면서도 한심한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빠라는 작자의 저 아둔함을 물려받지 않은 게 세희로선 천만다행이었다.

16564555426918.jpg“아빠, 절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모랑 이혼하시면 안 돼요. 절 호적에 올리셔도 안 되구요.”

16564555566739.jpg“하지만 널 내 호적에 올리지 않으면, 난 서 사장이랑 사돈이 될 수 없는데?”

영국의 단순한 흑심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6564555426918.jpg“절 호적에 올리면 한신 가에 제 출생에 대해 먼저 드러내는 꼴이에요. 재벌가 적통에 가까운 한신에서 그런 절 과연 곱게 며느리로 받아줄까요?”

16564555566739.jpg“한신에서…… 아직 모르고 있는 거냐?”

치가 떨릴 만큼 뻔뻔한 영국에게 세희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한 상황에 숟가락만 스윽 올리려고 했다는 게.

16564555426918.jpg“강준 씨만 알아요. 그래서 이모한테 날을 세웠던 거구요.”

16564555566739.jpg“설마 그럼 서 사장이 나한테도…….”

차마 말을 못 잇는 영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제 아내에게 괴롭힘당한 딸을 모른 척한 죄책감이 들긴 했나 보다.

16564555426918.jpg“걱정하지 마세요. 이모 때문에 아빠가 저한테 아무것도 못 해준 거, 저도 알고 강준 씨도 알아요. 그 비밀까지 덮고 결혼하자고 할 만큼 강준 씬 저한테 푹 빠져 있구요. 제가 한마디만 하면 강준 씨는 아빨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밀어줄 거예요.”

그제야 영국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16564555566739.jpg“아빠가 뭘 해주면 될까.”

16564555426918.jpg“이모가 가양병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할 만한 약점을 증거로 만들어서 넘겨주세요.”

16564555566739.jpg“내, 내가?”

16564555426918.jpg“아빤 이사장 남편이니 저보단 가양 병원 기밀에 접근하기 쉬울 거예요. 부당한 거래 내역이든, 갑질하는 영상이든, 가능한 건 다 확보해주세요.”

지금 세희는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영국에게 떠넘기는 거였다. 경영 머리는 안 되어도 제 아내 뒤 캐는 짓은 잘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원래 아둔한 남자일수록 그런 쪽으로는 뛰어난 법이니까.

16564555426918.jpg“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이모가 힘을 잃으면 아빠가 그때 이모를 꽉 잡아주시면 돼요. 이제 주도권 잡을 때 되셨잖아요.”

16564555566739.jpg“그렇긴 하다만.”

세희는 알리샤에 이어 영국까지 조 여사를 공격하는 패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모도 똑같이 당해봐야죠. 자식이란 핏줄과 믿었던 남편에게 뒤통수 맞는 기분이 어떤지. 그래서 세희는 가장 강력하고 달콤한 미끼를 영국에게 흔들기로 했다.

16564555426918.jpg“증거 확보했다고 연락주시면 강준 씨와 식사 자리 바로 마련할게요. 그 자리에서 한신에서 원하는 요직 있으면 살짝 귀띔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요. 그래야 강준 씨도 미리미리 알아보지 않겠어요?”

그제야 영국은 언제 고민했냐는 듯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런 영국을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세희는 강준을 떠올렸다. 마음껏 이용해도 되냐고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그러라고 대답해준 남자를. 다른 부탁을 해도 그는 기꺼이 또 들어줄 것이다. 뭐든 해주고 들어주고 괜찮다고 해주고, 그게 서강준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강준의 사랑을 이용하는 자신의 파렴치한 행동이 심장을 아프게 쿡쿡 찌른다. 하지만 이젠 멈출 수 없었다. 어차피 강준에게 맡긴다고 해도 그 또한 똑같은 방법을 쓸 것이다. 강준은 차라리 자신의 손을 더럽히겠다고 하지만 그건 세희가 싫었다. 할 거면 차라리 내가 해. 더러운 짓은 내가 다 하고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당신에게 갈래. *** 저녁 6시. 퇴근하자마자 강준은 세희를 데리러 갔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주세희는 또 식사를 걸렀을 것이다. 책에선 임신 4개월 차에 접어들면 입덧이 가라앉는다는데.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세희는 여전히 입덧 중이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셔벗만 먹일 순 없는 노릇이고. 고심 끝에 강준이 세희를 데리고 간 곳은 1층은 제과점, 2층은 루프탑 형식으로 되어 있는 분위기 좋은 개인 카페였다. 한식을 선호하던 세희가 임신 후 한식에 거부반응을 보이니 아예 방향을 튼 거였다. 예약 전화를 해놓은 덕에 두 사람이 자리 잡은 테이블 위엔 디저트가 가득했다. 다양한 종류의 마들렌과 스콘, 그리고 까눌레까지. 맛은 보지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비주얼에 세희는 시선이 홀린 것 같았다. 괜히 긴장이 된 강준은 슬그머니 세희를 보았다. 셔벗처럼 주세희가 잘 먹어주면 오늘의 피로가 날아갈 만큼 행복할 것 같은데.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강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작고 가냘픈 여자가 잘 먹는 게 내 행복이 되었나 싶어서. 주세희 말대로 자신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 것처럼 새까만 바닐라 까눌레를 세희 앞으로 밀어주며 강준은 태연히 말했다.

16564555426912.jpg“먹어봐요, 눈으로 구경만 하지 말고.”

세희는 킁킁 냄새부터 맡았다. 냄새가 나쁘지 않았는지 포크로 까눌레를 작게 떠서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16564555426918.jpg“맛있어요.”

동그랗게 눈을 뜬 세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자, 덩달아 강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16564555426912.jpg“그럼 많이 먹어요.”

16564555426918.jpg“강준 씨도 같이 먹어요.”

세희가 까눌레를 뜬 포크를 내밀자 강준은 질색하며 피했다.

16564555426912.jpg“탄수화물은 별로.”

16564555426918.jpg“아, 내 어흥이님은 육식주의자시죠?”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하며 웃은 세희는 포크를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갔다. 입맛에 맞는지 부지런히 포크질 하는 세희를 강준은 턱을 괸 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무슨 의민지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16564555651922.jpg

  *** 카페를 나올 때 강준은 세희가 잘 먹었던 까눌레와 스콘 몇 종류를 포장했다. 빌라 단지에 도착하자 강준은 차에서 내려 주세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빌라 안으로 가녀릿 실루엣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1동 505호에 불이 켜진다. 그리고 테라스에서 손을 흔드는 세희가 보였다. 거리감 때문에 세희는 보이지 않겠지만 강준은 웃고 있었다. 엄청 못되고 이기적인 악녀로 변신할 거라고 선전포고했던 주세희가 자꾸만 떠올라서. 어떤 악녀가 제 입으로 그렇게 대놓고 선전포고하냐고. 무섭긴커녕 진지하게 선전포고를 하는 주세희가 귀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건 죽을 때까지 강준만 알고 있을 비밀이지만. 얼른 프레가 세상에 태어나면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네 엄마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라고. 차에 오른 강준은 시동을 건 후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4555426912.jpg“이노그룹 유영국 부회장 부부 뒷조사 좀 합시다.”

미리 준비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후에 쓰든 버리든, 우선 준비해놓고 보는 건 철두철미한 강준만의 방식이었다.

16564555426912.jpg“특히 가양 병원 조 이사장 쪽 자금 흐름은 십원 단위까지 샅샅이 조사해주고 사람도 붙여놓고.”

전화를 끊은 강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조 여사에게 뺨을 맞은 세희의 모습이 또 떠오른 것이다. 아무리 응징은 내 몫이 아니라지만, 그건 곱게 넘어갈 수 없었다. 굳이 고소가 아니더라도 조 여사를 응징할 방법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이번에 강준은 어머니인 연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4555566739.jpg[아들! 우리 며느리는 잘 지내지? 도대체 언제 데려올 거야, 엄마 속 타 죽겠어.]

저 말고 주세희에게 푹 빠진 또 다른 한 분이 어머니인 연숙이었다. 자신의 안부보다 주세희의 안부를 묻는 연숙의 목소리에 강준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임신 소식까지 전하면 분명 기뻐할 테지만 이건 아직 때가 아니고.

16564555426912.jpg“가양 병원 조 이사장이 세희 뺨을 때렸어요.”

고자질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강준이 원하는 대답이 바로 연숙에게서 나왔다.

16564555566739.jpg[세상에,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 여린 애를. 내 이 여잘 가만히 두나 봐!]

정·재계에선 남자들 못지않게 여자들의 사교생활도 중요했다.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벌이는 심리전이 더 치열하고 살벌했다. 다행스럽게도 막강한 정치인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한신 그룹 큰 사모까지 된 연숙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강준이 아는 한 여자들의 사교계에서 영부인이 아닌 이상 연숙을 대적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16564555426912.jpg“제발 좀 그래주세요, 어머니.”

그제야 강준은 통화를 끊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괴롭힐 테니, 어머니는 어머니 방식대로 괴롭혀주세요. 그 메시지가 연숙에게 잘 전달되었길 바라며.

165645556813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