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당신과 프레를 위해.2022.01.13.
맞은 뺨을 손으로 감싸고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조 여사에게 세희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당방위했으니 신고는 안 할게요.”
“너, 너! 네가 감히!”
다른 손으로 세희를 손가락질하면서도 충격이 큰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조 여사를 바라보는 알리샤의 얼굴이 창백하다. 하지만 정작 세희는 감정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짜릿한 쾌감이라도 느낄 줄 알았는데.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까. 가만히 시선을 내린 세희는 난생처음 조 여사를 때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열이 난 손바닥이 홧홧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토록 허무할 것을, 난 왜 29년을 낭비하며 집착했을까. 더러운 걸 응징하려고 손대봤자, 내 손 또한 더러워질 뿐인데. 이래서 용서라는 걸 사람들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희에겐 용서할 수 있는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조 여사의 광적인 분노가 세희를 평생 놔주지 않았으니까. 둘 중 하나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려야 끝나는 게임이었다. 공허한 눈을 든 세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조 여사의 붉어진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전혀 예상 못 한 세희의 행동에 조 여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많이 아팠어요, 이모?”
세희는 오랜 시간 숨죽이고 바짝 엎드려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가혹한 세상에게 배운 끈기와 인내심으로. 지금까지 조 여사를 못 때린 게 아니라 안 때린 거였다. 내가 힘을 기를 때까지. 내가 반격을 해도 당신이 찍소리 못하도록. 지금 이 순간처럼. 그 손을 쳐내며 뒷걸음질 치는 조 여사에게 세희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도 죽을 만큼 아팠어요. 이모한테 맞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더라구요.”
여전히 고운 조 여사의 얼굴을 보며 세희는 첫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내게 그렇게 곱게 웃어주지 말았어야지. 촌구석 동네에 나타난 젊고 예쁜 이모를 처음 본 순간 세희는 눈이 부셨다. 이렇게 예쁘고 고운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엄마랑 쌍둥이라고 했는데 그럼 우리 엄마도 이렇게 예뻤을까. 이렇게 예쁜 부자 이모가 나타났으니 동네 사람들도 더는 할머니랑 날 무시하지 못하겠지. 온갖 기대감에 설레기까지 한 어린 마음은 풍선처럼 한없이 부풀었다. 하지만 어린 세희가 가슴 안에 품고 있던 그 풍선을 이모는 가차 없이 터뜨려버렸다. 너무 예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모의 치마를 잡았다. 하지만 그 작은 손이 내쳐진 것도 모자라 뺨까지 맞았다.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하는 어린 세희를 바라보는 이모의 눈엔 짜증과 경멸이 가득했다.
‘네 엄말 똑 닮은 네 얼굴이 얼마나 천한지, 넌 아니?’
고작 9살의 나이에도 세희는 알 수 있었다. 이모가 제게 보여주었던 그 어여쁜 미소의 의미를. 핏줄을 찾아서가 아니라 복수 상대를 찾아서 나오는 미소였다는 걸.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어린 소녀의 마음에 독한 씨가 뿌려졌다. 그때를 떠올리며 세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조 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모, 난 이제 시작인데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미, 미친X! 내가 너 같은 것한테 호락호락 당할 줄 알아?”
“그럼 당하지 않을 궁리 열심히 해보세요. 그리고…….”
세희는 차분하게 클러치를 열어 명함을 꺼냈다. -이노 패션 대표이사 주세희.- 검은 바탕에 화려한 금빛 글씨체로 인쇄된 명함은 오늘을 위해 강 관장이 미리 준비해준 선물이었다. 그 명함을 조 여사의 손에 다정하게 쥐여주었다.
“저에게 연락하세요. 내가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 궁금하다면요.”
죽일 듯이 노려보는 조 여사의 눈을 세희는 피하지 않았다. 그 눈과 마주할 때마다 납작 엎드려 겁먹은 척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도 핏줄인데, 우리 무식하게 폭력 말고 대화로 해결해요, 네?”
얄미울 만큼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 세희를 노려보던 조여사가 갑자기 얼굴을 풀었다. 세희의 명함을 핸드백에 넣고선 오히려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마주 선 채 서로를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 터질 것처럼 팽팽하면서도 미묘한 침묵이 둘을 에워쌌다. 그 틈에 낀 알리샤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아무리 우아한 척 굴어도 더러운 피는 못 속인단다. 본디 천한 건 여전히 천한 법이거든.”
그 말에 자극받긴커녕 세희는 오히려 생긋,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 천하고 더러운 피가 이모 몸에 더 진하게 흐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입술을 질끈 깨문 조 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롭나 보자꾸나. 너의 그 여유는 서강준 그놈 빽 믿고 그러는 거겠지. 몸 굴려서 얻은 그 마음이 얼마나 갈까 싶다만은. 네 엄마처럼, 말이다.”
쿡, 엄마라는 그 단어가 심장 깊숙한 곳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럼에도 세희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버텼다.
“조만간 연락하마.”
알리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조 여사는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는 알리샤와 달리 세희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귀신 같은 직감이 곤두섰다. 뭘 또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뭘까. 그때 세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진다.
“…….”
영국이었다.
*** 강준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희와 알리샤가 만날 때까지만 해도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정 실장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난 조 여사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주세희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경고, 잊었습니까?’
‘그래서, 고소라도 할 텐가.’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럼 고소하든지. 나야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다지만 이제야 승승장구하는 애한테 추문은 치명적일 테니. 그리고 자네도 잘 알겠지만, 원래 없는 것들이 쥐꼬리 같은 자존심에 이목을 더 신경 쓰지 않겠나?’
그래도 강준이 고용한 가드들이 막아선 길을 내주지 않자 조 여사가 이를 앙다물며 말했다.
‘오늘 난 패배했고 저 애는 이겼지. 그럼 나보다 저 애가 날 더 만나고 싶어 할 걸세. 할 말이 참 많을 테니 말이야. 아닌가?’
지금 주세희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조 여사라는 걸 강준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정 실장은 가드들에게 붙잡아 두도록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눈으로 묻는 정 실장에게 조 여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강준에게 단 한마디를 남겼다.
‘자네가 언제까지 저 더러운 것을 감싸는지 두고 보겠네.’
우아하게 걸어가는 조 여사의 뒷모습을 보며 강준은 처음으로 강렬하면서도 잔인한 충동을 느꼈다. 뻔뻔한 저 여자를 시궁창에 머리부터 쳐박아 넣고 싶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응징은 제 몫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모욕과 설움을 참아온 주세희의 노력을 물거품 만들 순 없으니까. 그런데 조 여사가 세희의 뺨을 때리는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며 뛰어갈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세희가 똑같이 반격해서 겨우 참았지만.
“이만 놔줘요.”
강준의 지시에 단단한 체격의 가드들이 잡고 있던 정 실장을 놓아주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면서도 정 실장은 성큼성큼 걸어서 조 여사에게 향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세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강준은 가드에게 지시했다.
“VIP 휴게실로 얼음찜질팩 가져다줘요.”
***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희는 강준과 맞닥뜨렸다. 강준의 싸늘한 눈빛 한 번에 알리샤는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사라졌다.
“혹시 언니한테 겁줬어요?”
세희의 물음에 강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겁은 안 줬어요.”
“그럼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말자고는 했지.”
태연히 대답한 강준은 무심히 시선을 내렸다.
“세게도 때렸네.”
그제야 세희는 붉어진 얼굴로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보면 강준에겐 못 볼 꼴을 보인 셈이었다. 남자들의 주먹 싸움도 추하지만 여자들의 싸움도 만만치 않으니까.
“다 봤어요?”
“어쩌다 보니.”
“……보기 안 좋았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제야 강준은 뺨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럼, 보기 좋았을까.”
무심한 중얼거림과 달리 검은 눈동자는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찾아온 그 순간조차, 감정 한 자락 드러내지 않던 남자가 말이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세희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더 세게 때렸고 이번엔 입술도 안 터졌어요.”
“뺨은 부었고?”
아, 작게 소리 내며 뺨에 가져가려던 세희의 손을 강준이 잡아끌었다.
“따라와요.”
강준이 데려간 곳은 1층에 마련된 VIP 휴게실이었다. 몇 분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정장을 입은 남자가 강준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서 꺼낸 찜질팩을 세희의 뺨에 대며 강준이 말했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내가 아는 주세희는 반격하는 대신 그걸 약점 삼아 다르게 쓸 줄 알았거든.”
화끈거리는 뺨에 시원함이 번지자 절로 눈이 감겼다.
“이모가 폭행하는 영상은 이미 확보했고 사실 나도 한번 때려보고 싶었거든요. 도대체 때리는 기분이 어떻기에 어린 날 그렇게 때리고 커서도 때리고. 때리지 못해서 안달이 났을까, 궁금해서.”
뺨에서 사라진 차가움에 눈을 뜬 세희는 자신을 깊게 응시하는 강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들어주는 강준의 눈동자에 동정 따윈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남자의 차분한 눈빛이 자꾸만 세희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마음속의 말들을 자꾸만 끄집어내게 유혹한다.
“이모를 때리면 엄청 짜릿하고 통쾌할 줄 알았는데, 내 손만 더럽힌 기분이에요. 이게 뭐 좋다고 날 그렇게 때렸을까요?”
“앞으론 세희 씨 손 더럽히지 말고 나한테 일러요. 내가 대신 손 더럽힐 테니까.”
웃음기가 빠진 진지한 강준의 음성에 세희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강준 씨가 나 대신 때려주려구요?”
“때려줘야지. 주먹 말고 내가 가진 힘으로. 그런 부류는 어디에도 얼굴 못 내밀게 완전히 매장시켜야 하거든.”
강준은 무심한 음성으로 잔인한 말을 잘도 했다. 하지만 뺨에 다시 찜질을 해주는 손길만은 다정했다.
“강준 씨, 참 많이 변한 거 알아요?”
그 말에 강준이 눈을 들었다. 세희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겠어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변해야지.”
변함없는 이 남자의 눈빛이, 다정한 음성이, 짙은 사랑이, 여전히 버거운데. 그런데도 미치도록 욕심이 난다. 부족한 자신을 유일하게 감당하고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남자는 서강준 뿐이란 걸 알기에. 이 남자로 인해 느끼는 기쁨과 행복을 내가 과연 손에서 놓을 수 있을까. 어차피 놓을 거라면, 한 번 정도는 용기를 내도 되지 않을까. 이토록 완벽한 남자가 평생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이토록 훌륭한 남자를 프레가 당당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러게요, 뭐 하러 나 같은 여잘 사랑해서 어렵고 복잡하게 살아요. 난 그만큼 당신을 사랑해주지도 못하는데.”
희미한 원망이 어린 말과 달리 강준의 날렵한 뺨을 감싸는 세희의 손은 부드러웠다. 강준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세희는 이기적인 바람을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당신이 계속 날 사랑해주면 좋겠어.”
날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에게.
“그래 줄 수 있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반짝거리는 세희의 눈을 본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걸. 지독히도 이기적인 세희의 부탁은 강준으로선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강준은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작은 손에 깍지를 껴서 입술로 가져갔다. 감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혀 부드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 여자를 향한 버거운 사랑에 심장이 아플 만큼 뛰어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주세희만 사랑할 계획이긴 한데.”
손등에 입술을 댄 채 속삭이자 간지러웠는지, 세희의 눈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진다.
“그럼 나 서강준 씨 정말 마음대로 이용해도 돼요?”
“얼마든지.”
망설임 없는 강준의 대답에 가슴 안에서 조심히 싹 튼 용기가 더 깊게 뿌리를 내렸다. 날 사랑해주고 날 찾아와주고 변함없이 사랑해주고. 프레를 선물해주고, 날 웃고 행복하게 해주고, 예쁜 사랑도 하게 해주고. 고마운 게 너무 많아 차마 말로는 할 수 없는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그게 뭐가 있을까. 용기를 내서, 내가 스스로 지켜낸 사랑으로, 당신에게 가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나 좀 안아줄래요.”
또다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 강준은 세희에게 기꺼이 품을 내주었다. 아늑한 품 안에서 마음이 편안해진 세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 강준에겐 어떤 희망도 줄 수 없지만, 그래도 해볼 생각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못된 짓, 이기적인 판단. 당신과 프레를 위해, 나도 한번 변해보려고. 그러니까 당신이 곁에서 지켜봐 줘요, 내가 얼마나 못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