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엄연히 정당방위.2022.01.09.
세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거실에 있는 강준이 신경 쓰였다. 이리 뒤척거리고 저리 뒤척거리고, 잠 못 이룬 지 30분째.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 앞까지 다가섰지만, 차마 문을 열진 못했다. 강준이 어떤 마음으로 소파를 고집했는지 알기에. 그 또한 자신을 향한 인내이고 배려란 걸 알기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희는 또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모르면 몰랐지, 강준의 품이 얼마나 편안한지 알고 있다. 그 품에 안기면 오늘 밤 꿀잠을 잘 수 있는 걸 알기에 더 유혹은 짙어진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강준은 뜬눈으로 밤을 샐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흘렀지만, 마지막 결론은 늘 같아진다. 그래도 서강준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세희는 그만 웃어버렸다.
“나 참 이기적이다.”
자신에게만은 늘 괜찮다고 해주는 서강준 때문에 스스로가 점점 못되지는 것 같았다. 이기적으로 굴어도 당신만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줄 것 같아서. 강준을 향한 믿음이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다. 받은 건 기어이 갚아야 하는 계산적인 성격이었고 하다못해 진경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더 해줬으면 해줬지,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준에게만은 자꾸 해이해진다. 이 모든 게 강준이 부려놓은 요망한 마법 주문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원하지도 않고. 7개월간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가도 그 말만 떠올리면 놀라울 만큼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 건지도. 그렇게 이기적인 마음을 합리화하며 거실로 나가는 세희는 꿈에도 몰랐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 변화가 모두 강준의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 그 시각. 옅은 어둠 속에서 강준은 30분째 침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침실 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임신하면 잠이 많아진다던데 그래서 잠이 든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기다림을 포기하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강준은 눈을 감았다. 우선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잠을 깨우려고 나온 건지 그냥 나온 건지, 발걸음이 유난히 조심스럽다. 이러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주방으로 가지 말고 나에게 오라고, 주세희. 별것 아닌 일에 애가 타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하지만 강준으로선 주세희의 침대 입성이 간절했다. 절대 야한 짓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강준을 집에 들이고 침실 침대까지 들인다는 의미에 집착하는 거였다. 그건 곧 주세희가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하늘은 기꺼이 강준의 편이 되어주었다. 소파 앞에서 멈춘 발소리. 눈을 감고 있어도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주세희가 상상된다. 고요한 시선이 바늘처럼 촘촘히 얼굴에 박히는 기분에 강준은 더 꼭 눈을 감았다.
“진짜 잠들었나 봐.”
한숨 같은 작은 중얼거림에 벌떡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이 안 왔다고 해도 되지만, 그냥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무방비해지는 주세희가 이번엔 또 어떻게 놀라게 할지. 궁금하다 못해 기대감까지 든다. 오랜만에 사랑 고백을 들어도 좋을 것 같고.
“서강준 씨, 진짜 자요?”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속삭여오는 음성이 유혹적일 만큼 달콤하다. 하지만 좀 더 참아야 한다.
“……야속해라.”
이건 좀 억울한데. 야속한 게 진짜 누군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기껏 참고 배려해주고 기다려줬더니 버리고 떠나기나 하고. 속전속결로 이혼까지 하고 당당히 나타났더니 반겨주지도 않고. 임신했다고 사람 기쁘게 해놓고선 결혼은 못 하겠다 해서 절망하게 만들고. 주세희 침대 한번 누워보겠다고 이렇게 유치한 짓까지 벌이고.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따질 말은 너무 많지만 이번에도 강준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더 사랑한 게 죄니까.
“30분도 못 기다리다니, 야한 어흥이가 아니라 잠탱이 어흥이였어.”
하지만 세희의 마지막 중얼거림에 강준은 연기를 관두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오해는 받기 싫었다. 눈을 뜬 강준은 제 몸 위에 얇은 이불을 덮어주는 세희의 손목을 그러잡았다.
“누구보고 잠탱이 어흥이라는 거지.”
옅은 어둠 속에서 깜짝 놀란 얼굴이 볼만했다.
“안 자고 있었어요?”
“내가 잠이 오겠어요?”
주세희 집에서, 주세희 향기가 온통 가득한 이 공간에서, 손만 뻗으면 널 안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내가 잠이 오겠냐고. 몸을 일으킨 강준은 소파에 앉아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세희를 다리 사이에 가둔 후 부드럽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물 마시러 나왔어요?”
대놓고 물으면 민망해할까 봐, 예의상 물은 건데.
“아니요. 강준 씨 안 자면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하려고 나왔어요.”
세희는 단도직입적으로 강준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참 어중간한 게 없는 여자였다. 그러니 사람 애를 그렇게 태우지. 세희를 안고 일어난 강준은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침실로 걸어갔다.
“저 다리 멀쩡한데, 굳이 안고 가야 해요?”
“그냥 안겨 가요. 야한 어흥이가 넘쳐나는 힘을 주체 못 해서 그러니까.”
그렇게 도착한 침실, 그리고 주세희의 침대. 침대에 눕자마자 부부였을 때처럼 강준은 세희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안겨오는 몸은 기억하는 대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 안정적인 숨소리, 강렬한 심장 박동.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주세희의 감촉에 더더욱 강준은 결심을 굳혔다. 어떻게든 널 내 여자로 만들고 말겠다고. 그러려면 주세희에게 못된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기적으로 굴어도 미안함을 못 느낄 만큼 자신을 편히 생각하도록. 절대적인 갑처럼 굴 수 있도록. 그래야만 내게 스스로 와줄 여자니까. 그때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몸을 반쯤 일으킨 세희가 조심히 물어왔다.
“내가 진짜 강준 씨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이유, 궁금하지 않아요?”
강준은 결혼을 거절당한 후 세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혼의 무게가 부담된다는 건 핑계였다. 그걸 알면서도 캐묻지 않은 건 의미가 없어서였다. 주세희의 고집을 알고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성격도 아니까. 그러니 기어이 사랑까지 고백해놓고 떠났겠지. 또한 지금도 강준은 주세희가 어렵게 용기를 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진실을 알려주려는 건 무의식적으로 나온 방어본능이겠지. 너무 빠르게 경계심이 무뎌지는 걱정에서 나오는. 난 이런 이유로 완고하니 절대 허튼 생각 하지 말라, 일종의 경고 차원일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듣고 싶지 않은데, 어쩌나.
“안 궁금해요.”
어렵게 낸 용기가 거절당하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세희에게 강준이 태연히 대답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결혼을 못 하는 이유가 아니라 세희 씨 마음이거든.”
그게 진심이었다. 어떤 이유든, 주세희의 마음이 변하길 원하니까.
“내일이 주주총회니까 우선 그것만 생각해요.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을 텐데, 머리 아프게 나까지 생각하지 말고.”
물론 주세희가 자신과 결혼을 안 하려는 이유도 알아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냈다는 걸 주세희는 몰라야 한다. 치부가 드러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또 방어하게 되니까. 어떻게 무너뜨린 벽인데 그 꼴을 또 볼 수야 없지. 그래도 눕지 않고 생각에 잠긴 세희에게 강준이 다시 말했다.
“근데 세희 씨한테 바라는 건 있어요.”
“……뭔데요?”
“나한테 짜증도 내고 날 머슴처럼 부리면서 이기적으로 굴어줬으면 해요. 임산부가 남편에게 하듯이 투정도 부리고 앙탈도 부리고.”
“저 그런 건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그건 강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착한 그 버릇을 고치려고, 자신이 지금 고생하는 중이니까.
“나한테 시도해 봐요. 뭐든 받아줄 테니.”
“…….”
“7개월 후 진짜 날 거절할 생각이라면 특히 더. 그거라도 안 하면 평생 죄책감 느낄 것 같아서 그래요.”
“노력해볼게요.”
겨우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강준은 세희를 다시 품으로 끌어당겨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직도 납작하기만 한 배에 커다란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대체 이 작은 배 안에 아기가 있긴 한 건지. 압사당하듯 눌려 있는 건 아닌지. 강준에게 아기란 존재는 떠올릴수록 신기하면서도 두렵고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때 세희가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한테 못된 버릇 그만 좀 들여요. 내가 정말 나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굴면 어쩌려구.”
강준은 옅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르지. 제발 간절히 바라는데, 주세희가 못된 버릇이 잔뜩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도 많고 뭐든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주세희는, 잔뜩 이기적이고 못되어져야만 내게 와줄 여자니까. *** 서울 컨벤션 홀에서 열린 이노패션 정기 주주총회. 주주총회 의장인 조 여사는 가만히 당하긴 싫었는지 황당무계한 일을 계획했다. 자기 편인 이노패션 임원들과 담당 변호사와 짠 후 일부 소액 주주들의 입장을 막음과 동시에 그들의 참석주주까지 빼버린 것이다. 오늘 통과시킬 몇 개의 안건이 과반수를 넘기지 못할 아슬한 커트라인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주주들의 항의가 거세자, 조 여사는 일방적으로 주주총회를 연기하고 나가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덩치 큰 남자들이 직원이라며 우르르 나타나 주주들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세희와 강 관장은 강준의 조언대로 법원이 선임한 검사인과 변호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변호사가 말했다.
“이건 엄연히 ‘의장권한의 포기행위’입니다. 임시 의장을 선출해서 정기 주주총회를 진행하셔도 무방합니다.”
임시 의장으로 강 관장이 선출되었고, 빠르게 진행된 주주총회에서 모든 안건들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기존 이사회 구성원이던 조 여사의 사람은 죄다 해임되었고 강 관장과 세희의 사람들로 새로운 신규 이사진들이 채워졌다. 주주총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사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세희는 이노패션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축하를 받은 후, 세희는 컨벤션 홀에 홀로 남았다. 그냥 잠시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오늘 압승했는데도 왜 이렇게 마음은 여전히 휑한 건지. 조 여사에게 몸을 낮추고 죽은 듯이 산 세월만 29년이었다. 이 자리가 뭐라고, 그렇게 비겁하게 수그려야 했던 건지. 원하는 걸 이루었으니 앞으론 뭘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저 막막하던 순간, 세희의 손이 본능적으로 배로 향했다.
“이젠 프레가 있으니까.”
더 소중하고 중요한 인생의 목표가 생겼으니 이제 더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거다. 미련 없이 컨벤션 홀을 나온 세희는 복도에서 알리샤와 마주쳤다.
“설마설마했는데 엄말 상대로 기어이 이기다니, 독종인 거 인정.”
……칭찬인지, 욕인지. 하지만 세희는 차분히 대답했다.
“다 언니가 도와준 덕분이야.”
“받은 게 있는데 내 몫은 해야지. 나도 그 정도 개념은 있거든?”
한땐 적이 될 뻔했다가 아군이 되어준 이복 언니와 세희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알리샤였다.
“나 오늘 독일 가. 가족한테도 버림받았겠다, 한국은 영영 올 일 없으니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나도 안 서운해.”
세희의 대답에 알리샤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넌 어쩜 그렇게 애가 살가운 구석이 없어?”
그러는 언닌 뭐 얼마나 살갑냐고 세희는 따지려다 말았다.
“야 독종, 나 가끔씩 연락해도 돼?”
“하지 마.”
“왜!”
“언닌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성격이니까.”
기가 막힌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피식 웃던 알리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악! 누구야!”
갑자기 날아온 핸드백에 머리를 맞은 알리샤는 형형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조 여사를 발견하곤 기겁했다.
“어, 엄마?”
“이 멍청한 것, 낳아준 은혜도 모르고 기어이 일을 내?”
주춤하며 물러나는 알리샤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는 듯 뻗은 손을 세희가 매정하게 쳐냈다.
“무식하게 무슨 짓이에요? 말로 하세요.”
그러자 조 여사의 손이 세희의 뺨을 앙칼지게 후려쳤다.
“어딜 감히 더러운 손을 나한테 대!”
맞은 건 세희인데 달달 떨고 있는 건 알리샤였다. 오랜 시간 학습된 두려움이 알리샤를 겁에 질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알리샤와 달리 세희는 조 여사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먼저 때린 건 이모고, 지금 내가 하는 건 엄연히 정당방위예요.”
뭔 소리냐는 듯 노려보는 조 여사 쪽으로 잔뜩 힘을 실은 세희의 작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짜악-.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갈 만큼, 시원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