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주세희 침대 점령 작전.2022.01.06.
“오늘은 자고 가면 안 돼요?”
세희의 그 한마디에 단단한 등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흐르는 침묵에 물러나려는 세희를 돌아선 강준이 다시 품에 안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방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 한 거 알아요?”
낮게 속삭여오며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강준의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침을 꼴깍 삼킨 세희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자, 강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그 정도로 날 믿는다는 건가.”
“강준 씬 제가 싫어하는 건 안 할 거잖아요. 그 정도 믿음도 없이 말할 정도로 저 바보 아니에요.”
“이런 믿음은 별로 안 반가운데.”
중얼거리듯 말한 강준은 세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날 믿으니 알아서 허튼짓하지 마라, 이렇게 돌려서 경고한 거잖아. 아니에요?”
얼른 대답해 봐요. 강준이 눈빛으로 독촉하자 세희는 차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믿는 건 믿는 거고, 누가 허튼짓도 하지 말랬어요?”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강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한 말, 진심이에요?”
한층 더 낮고 허스키해진 음성에 농밀한 색기가 잔뜩 고여 있다. 목소리도 이 정도인데 지금 이 남자의 눈빛이 어떨지 상상이 되는 세희였다. 그래서 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고작 7개월밖에 안 남았으니까, 당신을 향한 내 감정에 솔직해지라면서요.”
“…….”
“몇 번을 말해요. 나도 약속 끝내주게 잘 지키는 여자라구.”
솔직한 세희의 심정이었다. 7개월간은, 배 속에 있는 프레가 나와 모든 걸 같이 공유하는 동안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저 웃고 싶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 행복의 순간순간에 이 남자가 있었으면 하고.
“요마녀 같으니라고.”
강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세희는 고개를 들었다.
“요마녀가 뭐예요?”
“요녀 플러스 마녀.”
“……설마 저요? 제가 왜요?”
도발적인 말을 해놓고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묻는 세희에게서 강준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말 본인을 몰라서 묻는 건가 싶어서. 강준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품에 안긴 세희가 다시 물었다.
“오늘 자고 갈 거예요? 그냥 갈 거예요?”
사람 인내심은 있는 대로 시험해 놓고선, 얄미울 만큼 새침하게 말이다. 속내를 숨길 땐 꽁꽁 잘도 숨기면서, 솔직할 땐 사람 정신 못 차리게 솔직하고. 차가울 땐 심장 시리게 쌀쌀맞게 굴면서, 뜨거울 땐 심장을 시꺼멓게 태울 만큼 뜨겁고. 이러니 내가 너에게 안 미치냐고.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죽기 전까지, 내가 이 여자 부탁을 거절할 때가 있긴 할까.
“나 저 안에 들어가면 엉큼한 짓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면 재워주든지.”
“…….”
“야한 어흥이 봉인해제 될 수 있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야한 어흥이를 집에 들이지 말라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하지만 타들어가는 강준의 속도 몰라주고 세희는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엉큼한 짓 수위는 제가 알아서 잘 조절할게요.”
핑그르르 돌아서는 주세희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강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주세희. 난 자신 없다고. *** 사실 세희도 그때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자몽 셔벗이 먹고 싶었다. 그런데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강준이 정말 셔벗을 사올 줄이야. 아껴먹으려고 셔벗은 냉동실에 넣어놓고 망고 빙수부터 먹는 중이었다.
“망고 빙수도 맛있네.”
거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추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세희의 시선이 욕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면서 새어나온 옅은 수증기가 안개처럼 걷히면서 강준이 걸어나왔다. 촉촉이 젖어서 더 짙어진 머리칼, 물기 머금은 정교한 얼굴, 조각한 것처럼 근사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상체. 골반에 아슬하게 두르고 있는 타월까지. 현실감각이 단번에 사라질 만큼 섹시한 자태에 세희는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괜히 자고 가라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희는 새빨개진 얼굴을 휙 틀었다. 그러자 천천히 걸어오며 강준이 피식 웃었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새삼스럽기는.”
벗은 건 당신인데 왜 또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구. 이럴 땐 모른 척 좀 해주면 덧나냐구. 괜히 얄미운 강준을 노려보며 세희는 톡, 쏘아붙였다.
“볼 거 다 봤다고 부끄럽지 말란 법 없거든요? 그렇게 막 벗고 나오면 어떡해요?”
당신은 당신 몸이라서 모르잖아. 하지만 당신을 보는 사람은 아니라구요. 이 몸을…… 어떻게 맨정신으로 봐.
“음,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까?”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강준이 피식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여벌 옷 올 때까지 기다렸다 씻으랬잖아요.”
“외부에 오래 있었던 몸으로 세희 씨 공간을 오염시키면 안 되죠. 옷 도착할 때까지 10분만 참아봐요.”
젖은 머리칼을 나른한 손길로 쓸어올리며 강준은 망고 빙수를 보았다.
“망고 빙수는, 먹을 만해요?”
“셔벗만큼은 아니지만 빙수도 맛있어요. 시원하고 달콤하고.”
강준에게 대답하면서 세희는 망고 빙수를 다시 입안에 넣었다.
“나도 맛이 궁금하긴 하네요.”
“그럼 강준 씨도 한 입 먹……!”
망고 빙수를 스푼으로 떠서 내밀던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리룰 숙인 강준이 길다란 손끝으로 세희의 턱을 잡아올리는 바람에.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던 입안으로 말캉한 무언가가 들어와 휘젓고 빠지는 건. 얼어붙은 세희의 시야에 느릿하게 허리를 세우는 강준이 보였다.
“너무 차가운 건 안 좋아해서.”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말을 하는 강준이 입안에서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방금전까지 제 입안에 있던 망고가 분명했다.
“더럽게 그걸 먹으면 어떡해요?”
“난 하나도 안 더러운데.”
부드러운 열감을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세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는다. 방금 한 행동보다 더한 짓을 한 남자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세희마저도 머릿속이 엉큼해져버렸다. 시선을 홱 틀며 세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재벌들은 이렇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걸까. 이번에도 부끄러움은 오롯이 세희의 몫이었다. 프레가 이런 건 안 닮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사람 이목을 신경 쓸 줄 알아야 사회생활도 잘할 테니까.
“설마 그 빙수가 나라고 생각하고 찌르는 건 아니죠?”
강준의 느긋한 음성에 세희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스푼으로 빙수를 살벌하게 푹푹 찌르고 있다는 걸. 옆에 자연스럽게 앉은 강준이 세희의 손에서 스푼을 가져갔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감기 걸리니, 조금씩 먹어요.”
강준은 세희가 빙수를 뜨는 양의 삼분의 일 정도를 스푼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왔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세희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향했다. 찍찍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타월이 혹시라도 풀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흘러내리지 않게 잘 여몄는지 확인만 해 봐? 아찔한 골반에 두르고 있는 타월을 눈으로 꼼꼼히 더듬는 순간.
“더 야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 봐요.”
느릿하게 고막을 울리는 강준의 음성에 세희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강준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아 얼른 대답했다.
“나쁜 의도로 본 건 아니에요. 잘 여몄는지 확인하려고. 흘러내리면 안 되잖아요.”
“흘러내리면 또 뭐 어때서. 난 떳떳하고 당당해요.”
도대체 뭐가 떳떳하고 당당하단 건지. 그럼 난 뭐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세희가 노려보자 강준이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 포인트를 모르겠어서 멀뚱히 바라보던 세희도 결국은 웃어버렸다. 세희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강준이 웃음기를 거둔 얼굴로 물었다.
“이제 말해 봐요, 뭐가 나의 주세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그게 보였어요?”
“사랑의 힘이라고 칩시다.”
세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불안하다기보다는 오늘은 그냥 강준이랑 같이 있고 싶었다. 강준과 있을 때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강준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매력 중 하나였다. 한눈팔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는 것.
“혹시 내일 주주총회 때문에 그래요?”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일부러 조 여사의 지분을 5% 증여받았다. 그럼에도 최대주주인 조 여사의 지분율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역대급 특별 배당금까지 지급해주는 능력 있는 인재를 마다할 주주는 없어요. 특히 소액주주들은 더더욱 환영하겠지. 이사회야 강 관장님 파워가 압도적이고.”
막연하게 괜찮다는 말 대신, 강준은 조목조목 그 이유를 짚어주었다. 오늘 강준을 붙잡은 건 어쩌면 이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공통된 주제를 편하게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다고 할까. 더 정확히는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가. 특히 강준이 하는 말은 왠지 더 믿음이 가고 안심이 되었다. 서강준은 늘 옳으니까.
“또 모르죠. 이모가 구슬려서 설득시켜놓은 소액주주들이 꽤 있을지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강준이 피식, 웃었다. 왜 웃는지 모르겠어서 바라보자 강준이 느긋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그 짓 못 하게 하려고 세희 씨 이모에게 접근해서 안심시켜놨어요. 14% 보유한 주요주주가 나인 줄 오늘 알았을 테니 지금쯤 분통 터져 하고 있을 테고. 일종의 연막작전이랄까.”
세희로선 미래를 내다보는 강준의 혜안이 놀라웠다. 눈물 날 만큼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난 나 하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왜 당신은 늘 나를 잊지 않는 건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격차를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강준 씬 도대체 이런 계획을 언제 세워놓은 거예요?”
“비밀이에요.”
“……궁금한데.”
“그래도 안 돼요. 세희 씨가 알면 집착 쩌는 스토커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멋지고 완벽한 스토커는 두 손 벌려 격하게 환영할걸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준이 스윽 세희에게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럼 격하게 환영 좀 해주든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깊숙이 엉켜오는 시선이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웠다. 강준의 시선이 침투하듯 파고든 심장이 아려왔다. 짙게 전해져오는 데일 것 같은 열감에, 해일처럼 밀려드는 이 남자의 애틋한 진심에. 잠시 머뭇거리던 세희는 팔을 뻗어 강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꼭 끌어안고 속삭이듯 진심을 털어놓았다.
“고마워요, 강준 씨.”
고마워요. 지금 이 순간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강준에게 더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날 다시 찾아와줘서, 여전히 날 사랑해줘서, 지금 내 곁에 있어줘서.
“사실 오늘 밤샐 각오하고 있었는데. 강준 씨 때문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정말 편안해 보이는 세희를 강준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주세희는 자신의 예상대로 따라와주고 있었다. 감정에 솔직해지고, 집 안까지 자신을 들이고. 이 집을 허락받기 전까지 최소 한 달은 생각했는데. 시작이 좋지만 이걸론 한참 부족하지. 지금보다 더 주세희는 느슨해지고 무방비해져야 한다. 그래야 말랑해진 심장에 내가 더 깊숙하게 파고들지. 정신 차렸을 땐 너무 깊이 박혀서 빼내지 못할 만큼. 그때까진 자신의 진짜 목적을 들켜선 안 된다. 눈치챈 순간, 주세희는 또 도망칠 궁리를 할 테니까. 널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윤 실장이 보낸 사람일 거예요.”
현관문을 열고 옷과 쇼핑백을 받은 강준은 태연하게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제 2차전을 시작해볼까. 프로젝트명은 주세희 침대 점령 작전.
“내일을 위해 오늘 일찍 잡시다.”
“벌써요?”
세희는 놀란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밤 9시니 그럴 만도 했다.
“세희 씨는 침실에서 자요. 난 소파에서 잘 테니. 베개나 이불은 필요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유치한 걸 알지만, 벼락치기로 세운 나름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강하게 대응하지만, 부드럽게 물러나면 그만큼 다가와 줄 주세희를 알기에.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하면 분명 안 된다고 할 게 뻔하니까.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고민하는 표정으로 세희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갈등하는 게 역력한 세희를 모른 척하며 강준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세희 씨.”
잠이 안 올 시간에 침대에 누워야 거실에 있는 내가 신경 쓰이겠지. 다시 나를 찾겠지.
“……강준 씨도요.”
마지못해서 일어나는 게 역력한 세희의 모습에 강준은 웃음을 참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 집에 먼저 초대해준 것처럼, 네 침대에도 날 초대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