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자고 가면 안돼요?2022.01.02.
센트럴파크 1동 505호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테라스 위로 아른거리는 예쁜 얼굴. 부지런히도 흔드는 작은 손. 피식 웃은 강준은 차에 오르는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주세희가 집에 도착해서 불을 켠 후 테라스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4분 30초. 집착이 과한 것 같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유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때 세희에게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 단지에 젊은 늑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게 거슬렸다. 나까지 홀린 여자가 다른 남자들은 너무도 쉽게 홀릴 것 같아서. 저 어여쁜 얼굴을 다른 놈들이 훔쳐볼까 봐. 잠시 망설이던 강준은 전화를 걸었다. 아직 테라스에 서 있는 세희가 전화를 받는 게 보였다.
[네, 강준 씨.]
기습 입맞춤까지 해놓고선 전화를 받는 음성은 얄미울 만큼 단정했다.
“남자는 나 빼고 무조건 다 경계해요. 죄다 늑대거든.”
[저한텐 강준 씨가 제일 위험한 늑대인 것 같은데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단정한 음성에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게 서운하다. 이러면 진짜 주세희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난 늑대가 아니라 어흥이지.”
[…….]
“그것도 아주 야하면서도 믿음직한.”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하면 민망하지 않아요?]
“남자가 너무 금욕적이어도 매력 없어요.”
지금 강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거리감이 있음에도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통화를 하는 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주세희가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강준 씨, 프레가 듣고 있어요.]
“엄마 아빠가 진지하게 대화하는데, 잠깐 귀 좀 막으라고 해요.”
[강준 씨!]
피식 웃은 강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그럴게요.]
“몸이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어도 연락하고.”
[그럴게요.]
“내 목소리가 듣고 싶거나 보고 싶어도 연락하고.”
[그럴……!]
영혼 없이 반복적으로 대답하던 세희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멈추는 순간, 강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빈틈없이 늘 야무진 여자가 가끔씩 이렇게 허술하게 굴 때면 미치도록 귀여워서. *** 회사로 돌아온 강준은 집무실에 앉아 세희가 보내준 영상을 재생했다. 배 속에 생명을 품고 느끼는 엄마와 눈으로 바라보는 아빠의 차이가 이걸까. 아니면, 내가 부성애가 부족한가. 영상을 보고도 이렇다 할 감흥은 없었다. 무덤덤했고 별생각이 없었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영상은 온통 흑백에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고 딱히 눈에 띄는 것도 없었으니까. 아, 톡 튀어나온 구슬 같은 게 하나 있긴 했다. 볼 게 그 구슬밖에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그제야 구슬 안의 한 부분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쿵, 쿵, 쿵. 힘차게도 뛰는 심장 박동 소리에 맞게. 마치 제 존재를 알아달라는 것처럼, 절박하고 강렬하게. 얼마나 반복해서 영상을 보았을까. 어느 순간부터 영상 속 심장 소리가 강준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뛰는 것 같았다. 마치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처럼.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를 연결해줄 유일한 오작교. 우리의…… 아이. 드디어 아기의 존재가 강준의 심장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문득 세희가 보고 싶어진 강준은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뭐 해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던 걸까. 답장이 바로 왔다.
[침대에 누워 있어요.]
[초음파 영상 보고 있는데, 태아 심장 소리가 원래 이렇게 힘차나.]
[의사가 그랬어요. 주수에 비해서 심장 소리가 유달리 힘차다구요. 우스갯소리로 아들 같다는 말도 했구요.]
아무래도 프레가 심장은 자신을 닮았나 보다. 피식 웃은 강준은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망설이다 전송 메시지를 눌렀다.
[고마워요, 날 아빠로 만들어줘서.]
이번엔 바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강준은 차분히 기다렸고 몇 분 후 답장이 왔다.
[나도 고마워요, 날 사랑해줘서. 당신 참 좋은 남자이고 좋은 아빠인 것 같아. 그래서 당신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약속대로 주세희는 강준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런데 이를 어쩌지, 주세희. 난 좋은 남편도 될 생각인데. 자신의 심장 소리를 닮은 프레를 위해서라도, 강준은 주세희를 놔줄 수 없었다.
*** 이노패션 20기 주주총회 하루 전. 바에 앉아 우아하게 술을 마시던 조 여사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 하고 언더록잔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벽에 맞고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들.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가득 찬 건 분노였다. 14%를 보유한 주요 주주만을 믿고 느긋하게 손 놓고 있었는데, 그게 서강준일 줄이야. 그것도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오늘 오전에 알았다.
“빌어먹을 새끼.”
어쩐지 재수 없더라니, 기어이 제 뒤통수를 친 것이다. 서강준까지 가세해도 과반수를 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급하게 소액주주들 몇 명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한결같이 대답을 흐렸다. 마치 주세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하려는 것처럼. 이날을 위해 그 가증스러운 것이 돈 대신 이노패션 주식 5%를 요구한 건지도.
“재수 없는 년.”
그럼에도 세희가 머리를 잘 썼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말, 역대급 배당률이 지급된다는 말에 주주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배당률은 제게 독이었다. 멍청한 딸년이 모든 공을 주세희에게 돌리고 사의를 표명한 지금, 다음 해도 높은 배당률을 기대하며 주주들은 주세희를 지지할 테니까. 지금껏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영국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여보, 좋게좋게 생각합시다. 당신이 최대주주인데 배당금도 그만큼 많이 받을 거 아니야.”
“그 돈 때문에 나보고 지금 기뻐하라는 거예요?”
“뭐 슬플 것도 없지 않나? 솔직히 핏줄인데 그 애가 설마 해코지야 하겠어?”
“그래서, 이제야 그것한테 아빠 노릇 한번 해보겠다 이거예요? 그 영악한 것이 퍽이나 기뻐하며 당신을 부모 취급하겠네요. 나보다 더 미워했으면 미워했지.”
살쾡이처럼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조 여사의 눈이 욕하는 것 같았다. 멍청하고 한심한 양반이라고.
“알리샤가 누굴 닮아서 머리가 안 돌아가나 했는데, 이제 알겠네요.”
조 여사가 콧방귀를 뀌자, 영국은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나 아니었으면 사모님 소리도 못 들었을 입양아 주제에,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진 못할망정. 이젠 영국도 질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독한 아내에게. 우선 그 애부터 만나봐야지. 보아하니 서강준이 이혼까지 하고 그 애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애와 사이좋게 지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테고. 그 애가 원하면 기꺼이 아내와 이혼도 할 생각이고. 어찌 되었든 천륜은 끊지 못하는 법이니까. 영국으로선 아내든 딸이든, 더 큰 이득을 안겨줄 존재에게 줄을 대면 그뿐이었다.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영국이 거실로 나간 후, 혼자 남은 조여사는 혀를 찼다.
“한신 후계자가 여자 보는 눈이 그리 낮아서야.”
어찌 되었든 서강준은 더러운 태생의 여우 같은 것한테 단단히 홀려 있었다.
“보나마나 잤겠지.”
남자가 단단히 빠지는 게 그거 말고 또 있을까. 어쩜 그렇게 제 엄마랑 하는 짓이 똑같은지, 원. 하지만 서강준이 주세희를 마음에 둔 이상 자신은 그것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결론은 서강준이 스스로 주세희를 버리게 만들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조 여사가 본 서강준은 지독할 만큼 오만하고 도도하며 고결한 남자다. 그만큼 소유욕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주세희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하는 걸 목격한다면? 고결한 한신의 황태자가 그래도 주세희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주세희의 자의든 타의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겠지. 이쪽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다. 지들이 더러운 짓 하는 건 생각 안 하고 여자들은 순결하길 원하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거실에 앉아 있는 멍청한 늙은 늑대처럼. 부드럽게 얼굴을 푼 조 여사는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 밑에 놈들중에서 우리와 접점 없는 입 무거운 놈 하나 골라서 그때 그 어린놈 다시 만나 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영상이나 사진 확보는 필수니까 잘 일러두고.”
하나를 말하면 열까진 아니더라도 두세 개를 알아듣는 정 실장이었다. 입도 무겁고 체격도 듬직하고 일을 시키면 뒤처리도 말끔하고, 배신할 일도 없고. 자신을 향한 정 실장의 그 충성심이 사랑이란 걸 안다. 하지만 조 여사는 사랑따윈 모른다. 정 실장의 그 감정을 적절히 이용하면 그뿐이니. ***
[퇴근하는 길에 잠깐 들를 테니 전화하면 내려와요.]
어둑한 땅거미가 깔릴 때쯤, 강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세희는 소파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잘되겠지.”
내일 드디어 주주총회가 열린다. 여러 개의 안건 중, 신규이사 선임 건이 있었다. 세희는 기존 임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었기에 주주총회에서 먼저 사내 이사로 선임이 되어야 한다. 그 후 다시 이사회를 통해 대표이사 선임 결의를 하면 이노패션의 진짜 대표가 되는 거다. 이사회는 강 관장이 이미 제 사람들로 채워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잠재되어 있던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세희는 초조했다. 사람 마음처럼 얄팍한 게 없으니까. 강준까지 가세해도 과반수를 넘지 못하고 결론은 소액주주들에게 세희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그때 강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으니까 내려와요.]
이상하게 불안한 이 밤, 왠지 모르게 외롭고 겁이 나는 이 밤. 세희는 혼자 있는 게 싫었다. 하지만 강준과 함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불안함도, 외로움도, 알 수 없는 추위도, 모두 사라질 것 같았다. 함께하는 7개월 동안은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강준이 아닌 자신에게.
“……강준 씨가 올라와줄래요?”
*** 빌라 주차장에 차를 파킹한 강준은 쇼핑백을 들고 1동으로 향했다. 상승하던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추었다가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리는 젊은 남자를 본 강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놈이다. 주세희가 자신의 차에서 잠시 잠들었을 때, 업무 통화를 하느라 밖으로 나왔을 때,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 강준을 스쳐 지나가며 이 남자가 했던 통화 내용을 선명히 기억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쳤는데 진짜 죽여준다니까? 딱 보니까 얼굴에 칼도 전혀 안 댔어. 경계심이 심하긴 한데 여자가 쉽게 넘어오면 또 재미없지. 그래, 임마. 우선 이웃사촌이란 핑계로 친해지려고.’
남자가 들어간 빌라는 1동이고 주세희도 하필 1동이었다. 그런데 같은 동인 것도 모자라 주세희 집 바로 위층이라니. 살벌한 눈빛을 느꼈는지 힐끗 강준을 본 남자는 이내 시선을 피하며 밖으로 나갔다. 강준이 제 상대가 아님을 바로 간파한 것이다. 남자가 바로 꼬리를 내렸음에도 강준의 시선은 집요할 만큼 남자에게 꽂혔다. 완전히 시야에서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거슬린단 말이지.”
5층에서 내린 강준은 초인종 소리에 세희가 놀랄까 봐 노크를 했다. 그런데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주세희가 벌컥 문을 열었다.
“확인도 안 하고 열어주면 어떡합니까?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아까 그놈이 노크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니, 낮은 음성이 미묘하게 날이 섰다. 그러자 세희는 조금 황망한 표정으로 질문을 되돌렸다.
“어떤 멍청한 도둑이 노크하고 현관문으로 들어와요?”
나는 그렇게 경계하면서. 나한텐 이렇게 야무지면서.
“안전에 관해선 고정관념을 깨요.”
말도 안 되는 걸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강준이 재밌는지, 세희는 생긋 웃었다.
“강준 씨 말고 올 사람도 없거든요?”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지만, 강준은 여전히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바라보는 세희에게 강준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자몽 셔벗이에요. 한정으로 파는 망고 빙수 메뉴가 새로 나와서 같이 포장해달라고 했고. 이거 주려고 왔으니 그럼 난 이만 갈게요.”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강준에게 세희가 다급하게 물었다.
“안 들어오고 정말 그냥 갈 거예요?”
천천히 돌아선 강준은 눈앞의 세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틀어올린 머리칼이 몇 가닥 흘러내려 여린 목선을 간질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 하얀 티셔츠 안으로 비치는 가녀린 실루엣, 짧은 반바지 밑으로 쭉 뻗은 희고 가는 다리. 주세희의 향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단 둘이 있다면, 내가 과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글쎄, 자신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할 자신이, 야해지지 않을 자신이.
“초대는. 다음에 응하는걸로.”
아찔한 유혹을 이겨내고 다시 돌아선 강준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작은 손이 허리 사이를 파고들어 강준을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등 뒤로 조심히 밀착해오고, 수줍은 듯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자고 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