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그야말로 앙큼하고 도발적인.2021.12.30.
서강준이,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세희는 의심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강준을 보았다. 그 말을 덜컥 믿기엔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다정한 눈동자는 뭐랄까. 꿀이 뚝뚝 떨어지는 양봉업자 같았다. 그런 눈으로 포기하겠다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믿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이 있어요?”
물론 없다. 서강준은 제 입으로 한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강준은 여유롭다 못해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그 자신감이 뭘 향한 건지 모르겠으니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대체 무슨 꿍꿍일까. 그 꿍꿍이의 끝은 정말 이별인 걸까, 혹은 결혼인 걸까. 세희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며 탐색하듯 집요하게 강준을 바라보았다.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런 세희가 귀엽다는 듯 강준이 피식 웃으며 검지로 매끄러운 뺨을 가볍게 튕겼다.
“또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려고 시동을 거실까.”
“누가 뭐래요?”
말과 달리 세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늘 이 남자에게만 속내를 들키는지 모르겠어서. 느긋하게 다리를 꼰 강준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예비 아빠로서 준비 좀 하려고 베스트셀러 육아 서적을 네 권 완독했어요.”
매번 느끼지만 참 철두철미한 남자였다. 강 관장 말대로 행동력은 더 끝내주고. 세희도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육아 관련 책을 몇 권 사두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겨본 게 전부였다.
“수많은 문구들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뭐였을 것 같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말 대신 눈빛으로 톡 쏘아붙이자 피식 웃은 강준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고 아빠도 행복하고. 결론은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더라고. 난 정말 주세희가 행복했으면 하거든.”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로서도 힘든 결정이었고, 순수한 내 의도를 의심하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파고들 듯 깊숙이 응시해오는 시선에 세희는 끝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번만큼은 이 남자의 진심이, 자신을 향한 그 마음이 아플 만큼 심장 깊이 와닿아서. 무릎 위 말아쥔 작은 손에 힘을 잔뜩 주며 세희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그럼에도 세희가 강준에게 해줄 말은 이것뿐이었다. 당신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해.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약속 하나만 해주든지.”
홀린 듯 눈을 들자, 오롯이 세희밖에 모르는 다정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함께하는 동안은 날 향한 마음에 솔직해지겠다고. 마음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
“그래 봤자 고작 7개월이면 우리 끝일지 모르는데. 물론 마음을 바꿔주면 더 좋겠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세희를 보곤 강준이 씁쓸하게 피식 웃었다.
“좀 서운하네요. 난 주세희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각오까지 했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나 싶어서.”
그 정도도 못 해줘서 대답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고작 7개월, 우리의 끝. 자꾸만 그 말들이 귓가에서 맴돌아서, 그냥…… 그래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세희는 최대한 차분히 강준에게 물었다.
“정말 아기 낳은 후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예요?”
“못 믿겠으면 계약서라도 써줘요?”
“아니요.”
“그럼 약속하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세희를 보며 강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프레가 외모는 엄말 많이 닮았으면 해요.”
느닷없는 강준의 말에 세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난 당신을 닮았으면 했는데.
“근데 엄마 성격은 안 닮았으면 좋겠네. 난 우리 아이가 세상을 쉽게 살았으면 하거든.”
내 성격이 어때서 그러냐고 따지려던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다란 손이 세희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껴와서.
“……손은 왜 잡아요?”
“키스도 못 하는데 손이라도 실컷 잡아야지.”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려던 세희보다 강준이 더 빨랐다.
“만약 세희 씨 마음이 변함없다면, 내겐 고작 7개월이란 시간밖에 안 남은 건데. 적선하는 셈 치고 손이라도 맘껏 잡게 해주면 안 되나?”
고작 7개월이란 말을 몇 분 사이에 참 많이도 우려먹는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강준의 표정이 너무 서글퍼보여서 말문이 막히는 세희였다. 상처받은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며 강준이 조심히 물었다.
“아니면, 내가 손잡는 것도 이젠 싫어요?”
슬로우 모션처럼 깍지낀 손이 스르륵 풀리는 순간, 세희는 얼른 그의 손에 다시 깍지를 꼈다. 괜히 부끄러워서 눈을 내리깔며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싫을 리가 없잖아요.”
물론 시선을 내리고 있는 세희는 몰랐다. 그런 세희를 바라보는 강준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다행이고.”
강준으로선 참 다행이었다. 주세희가 꽁꽁 감춰놓은 진짜 모습이 한없이 여리고 착해서. 그런 마음을 이용하면 못된 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세희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곁에 있지 못하면 공략할 기회조차 없으니까. 여유 있는 한 손으로 강준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서류봉투를 세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보험사마다 설계 받은 태아 보험, 프레가 태어난 후 들게 될 신탁기금 계좌 관련 안내서가 들어 있어요. 출산 준비물 및 아기용품 리스트도 들어 있으니, 아직 장만하지 않은 건 체크해주고. 아, 아직 프레 보험 안 든 거 맞죠?”
강준의 철두철미함에 세희는 그만 넋이 나가버렸다. 그에게 임신을 알린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육아 서적을 완독한 것도 모자라 아기를 위해 이 모든 준비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대충 들여다 본 두툼한 봉투 안의 내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세희로선 감히 감당 못 할 강준의 결단력과 추진력이었다. 아니면, 재벌가들은 원래 이러나. 그렇다고 해도 세희는 재벌이 아니었다. 부족함 없이 프레를 키울 거지만, 재벌들의 세계는 몰랐으면 했다. 지금껏 세희가 지켜본 재벌들은 모두 행복이 아닌 즐거움과 쾌락, 탐욕만을 쫓았으니까. 다행스럽게도 강준은 반듯하게 자란 것 같지만, 그 대신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레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힘들겠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걸 얻고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면서.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세희는 서류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다 거절할게요.”
가늘어지는 강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세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강준 씨만큼은 아니지만 아기를 키울 경제적 능력은 나도 충분해요. 태아 보험이랑 아기 용품은 내가 알아서…….”
“주세희 씨, 난 프레에게 적선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강준이 말을 가로챘다. 부드러움이 사라진 낮고 단호한 음성으로.
“아빠로서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겠다는 거지.”
하지만 세희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해요.”
“나한텐 이것도 부족해요. 그나마 세희 씨 때문에 추리고 추려서 극히 일부분만 넣은 거고.”
오만한 그의 말에 세희는 강준이 한신 그룹 후계자라는 걸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어쩌면 서 회장보다 더 재산을 축적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연숙의 말도 같이.
“아빠가 재벌인데 우리 아이라고 재벌 되지 말라는 법 있나.”
“하지만 강준 씨.”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주세희.”
강준은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때 존칭을 쓰지 않는다. 그만큼 아우라가 짙어지고 설득력이 높아졌다.
“7개월 후,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난 우리 아이를 못 볼지도 모르지.”
그걸 증명하듯 다정함이 사라진 강준의 눈동자는 차디찼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빠 노릇은 계속 해야겠어. 재수 없는 돈지랄이라고 해도.”
“……!”
“그게 내가 프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빠 노릇이니까.”
강준이 말을 끝맺자 무거운 정적이 잠시 흘렀다. 조용히 숨만 쉬고 있는 세희는 사실 반성 중이었다. 강준에게 너무 이기적으로 군 것 같아서. 자기 자식을 나 몰라라하고 양육비도 안 주는 배드파더스가 넘쳐나는 세상에. 따지고 보면 강준은 분에 넘칠 만큼 훌륭한 아빠였다. 어쩌면 세희 자신보다도 더. 깔끔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봉투 안의 내용은 집에 가서 확인해볼게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강준이 부드럽게 물었다.
“우리 프레. 3개월, 정확히 12주죠?”
“……네.”
“출산 막달 전까진 한 달에 한 번 병원 가는 거고?”
“……네.”
“그럼 앞으로 병원 갈 때 나랑 같이 가요.”
“강준 씨 바쁘잖아요.”
“스케줄은 내가 알아서 조정할 거고.”
“……네.”
이제 세희는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7개월 후에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굳이 강준을 밀어내고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강준의 말대로 맘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편해야 아기도 편할 테니까. 하지만 강준의 다음 말엔 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예전처럼 세희 씨 일정도 공유해줘요, 나도 그럴 테니.”
“……!”
“목소리 듣고 싶으면 수시로 연락할 거고, 보고 싶으면 보러 갈 거예요.”
반박하려는 세희를 보더니, 강준이 능청스럽게 얼른 말을 이었다.
“세희 씨 말고 프레 말이에요.”
이제 3개월 된 뱃속의 프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다고, 어떻게 얼굴을 볼 수 있다고. 기가 막혀서 노려보자 강준은 얄미울 만큼, 씨익 웃었다. 커다란 것 하나를 내어준 강준은 그 외의 수많은 것들을 당당히 요구하고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건 거절할 핑계가 없다는 것. 무언가에 홀린 듯 기분이 이상해지는 세희였다. 자꾸 서강준의 페이스에 말리는 것 같아서. *** 집으로 향하는 강준의 차 안에서 예비부부가 나눌 법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모든 게 너무 과한 강준과 모든 걸 적당히 하려는 세희였기에 사소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다 결국 주말에 아기용품을 같이 보러 가자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렀다.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강준은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든 파일과 초음파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아빠인 강준에게 진작 들려주고 보여줬어야 했던 것들. 그래서 세희는 스스럼없이 핸드폰 메시지로 파일과 사진을 전송해주었다. 이미 식사자리에서 결론을 낸 덕분에,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세희는 불편하지 않았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세희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강준의 결단으로 인해 정말 세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늘 냉철하고 옳았다. 강준은 정말 우리 셋에게 이로울 가장 현명한 선택을 내려주었으니까. 당신을 아프게 한 건 미안하지만 당신은 강한 남자니까. 하지만 난 강하지 못하고 그래서 프레가 있어야 해. 이렇게 이기적인 방법으로밖에 지킬 줄 몰라, 난. 한편으론 안도가 되었다. 훗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프레가 크면 아빠에 대해 들려줄 말이 있다는 게. 넌 아빠에게 버림받지 않았어, 아빤 널 많이 사랑했단다. 다 엄마의 옳지 못한 선택 때문이지만, 널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의심하지 말아주렴.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보이면서 세희가 살고 있는 빌라 단지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빌라 입구에서 부드럽게 차가 멈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섬세한 운전 실력에 조심스러움이 더해지자 승차감이 좋았다. 바로 내리기 싫을 만큼. 늘 그렇듯 먼저 차에서 내린 강준이 보닛을 돌아와 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잡는 게 뭐라고. 잠시 망설이던 세희는 커다란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집 들어가서 불 켠 후에 테라스로 나와서 얼굴 보여주는 거 잊지 말고.”
“강준 씨, 혹시 안전 강박증 있어요?”
“뭐 그런 것도 같고.”
그답지 않은 모호한 대답에 세희가 바라보자 강준이 피식 웃었다.
“나도 이제 알았거든.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요.”
이제 돌아서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준의 눈빛과 미소가 가슴에 박히는 세희였다.
‘함께하는 동안은 날 향한 마음에 솔직해지겠다고. 마음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강준과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주춤주춤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머뭇거리다 살며시 손을 뻗어 반듯하게 매어진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영문 모를 세희의 행동을 강준은 가늘게 뜬 눈으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넥타이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살포시 들자 새까만 눈동자와 부딪혔다. 시선이 엉키는 것만으로도 야릇한 열기가 몸안에서 번진다. 긴 속눈썹을 수줍게 내리깐 세희는 살며시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넥타이를 잡힌 채 얼떨결에 허리를 기울여주던 강준의 눈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초옥-. 입술을 꾹 누르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 확장된 시야로 부드러우면서도 요염하게 웃고 있는 주세희가 가득 차올랐다.
“나도 약속은 잘 지키는 여자거든요.”
그야말로 앙큼하고 도발적인, 심장을 뒤흔드는, 기습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