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결혼도, 아기도, 주세희도.2021.12.26.
서강준은 참 약은 남자였다. 목덜미를 감싼 커다란 손의 온기, 칭칭 감아오는 뜨거운 눈빛. 색기가 짙은 섬세한 얼굴. 그런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감각들을 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해. 허락을 구하듯 천천히 다가와 포개오는 입술에 세희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결국 이리 될 것을, 흔들리고 밀어내지 못할 것을. 노크하듯 밀려 들어온 키스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노골적이고 탐욕스럽게, 세희를 집어삼켰다. 애 닳은 듯 파고들었다가 거침없이 덮치고, 또다시 물러났다가 잔잔히 적시듯 밀려들고. 무릎 위, 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쥐고 있는 세희의 작은 손을 커다란 손이 덮었다. 살살 간질이듯 어루만져 힘 빠지게 하더니, 손가락과 손가락을 깊게 얽어왔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덩달아 심장도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블랙홀 같은 이 남자에게. 고개를 비틀어 집요한 입술을 피한 세희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그만.”
“아니, 좀만 더.”
눈꺼풀에 반쯤 잠긴 검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 눈동자가 흘리는 농밀한 욕망과 색기에 취할 것만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가는 손끝이 각이 진 어깨를 잡았다. 툭,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세희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너무 어지러워요…… 토할 것 같아.”
커다란 손이 여린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토닥여준다. 얼마나 그렇게 안겨 있었을까. 익숙한 체취와 부드러운 손길에 울렁거렸던 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살그머니 고개를 든 세희는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강준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짐승처럼 굴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내가 자제할게.”
강준의 다정한 음성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강준 씨 잘못 아니에요. 그냥 입덧이에요. 이유 없이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주긴 하지만 강준에게 경고는 해야 했다.
“그래도 다신 나 유혹하지 마요. 난 당신 거부 못 하니까.”
가늘게 뜬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따지는 것도 같았다. 왜 하면 안 되냐고.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내 아이의 아빠긴 하지만 그게 키스할 자격을 주는 건 아니에요.”
프레야, 미안. 엄마가 네 핑계 좀 댈게.
“날 혼란스럽게 하지 마요.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강준 씨까지 이러면 나 정말 힘들어요.”
그제야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강준을 보았다. 참 고집스럽고 집요한 남자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해야 설득할지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낼 수 없었다. 답정남은 아마도 강준을 두고 한 말일지도.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강준 씬 아직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마음 변함없는 거예요?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나와 아길 위해서 포기해 주면 안 되는 거예요?”
조금 날 선 목소리 때문일까. 세희가 예민해진 걸 눈치챈 강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은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아직 생각 정리를 못 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우선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 연락할게요.”
“그냥 대답…….”
천천히 다가온 손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올리자 세희는 말을 멈추었다.
“초조하게 생각하면 스트레스받아요. 엄마에게도 안 좋지만, 프레에게도 안 좋을 테고.”
난생처음 듣는 엄마라는 말이 세희의 가슴에 콕 아프게 못 박혔다. 멍한 표정의 세희를 바라보며 강준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에게 이틀만 시간 줘요. 그 정돈 기다려줄 수 있잖아.”
따스한 온기가 어린 엄지가 여린 눈가를 어루만지자 절로 눈이 감긴다.
“약속할게요. 우리와 아기에게 모두 이로울 현명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허스키한 음성이 고막을 녹일 듯 낮고 부드럽게 속삭여오자 세희로선 불가항력이었다. 이 남자의 진심이 아플 만큼 짙게 느껴져서. 날을 세우고 경계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무뎌지고 흔들리려고 한다.
“이번엔 나 좀 믿어줘요.”
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 믿지 못한 건 서강준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이 남잔 제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일까. 아니면, 29년간 고달팠던 삶에 지친 걸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묻고 따지지 않고 이 남자를 믿고 싶어졌다. 이젠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로 인해 이 남자가 감당할 일들을 모른 척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감당할 일들을 모두 그에게 떠넘기고, 날 지켜줄 저 든든한 품 안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서강준이라서 안 되지만, 또한 서강준이기에 가능하니까. 천천히 눈을 뜬 세희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변함 없을 마음, 한 번 정도는 이 남자 뜻대로 해주고 싶어서.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강준이 물었다.
“그럼 태명은 어떻게 할까요?”
“프레로 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이번에도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강준이 지어준 아기의 태명이.
*** 주주총회가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강 관장이 운영하는 준 아트센터에 들른 세희는 임신 사실을 털어놓은 후 차분히 물었다.
“대표가 된 지 1년도 안 되서 출산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주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솔직히 업무 공백이 생기면 썩 좋아하진 않겠지. 대책은 생각해봤어?”
“출산 예정일이 3분기 특별 배당금 지급일이랑 맞물려요.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역대급 배당금이 지급될 거라 물 흐르듯 넘어갈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요.”
작년에 중국 진출에 성공한 이노패션은 괄목할 만한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두었다.
“세희 씨가 얼마나 쉬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한 달 생각하고 있어요.”
“에계, 겨우 한 달?”
“충분해요, 저에게는.”
“세희 씨, 임신은 행복이고 축복받을 일이지만 여자 몸에 썩 좋은 일은 아니야. 출산 후에 푹 쉬고 관리해줘야 해. 무리했다가 탈 난다?”
강 관장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세희는 싱긋 웃었다.
“저 예전처럼 무리해서 일 안 해요. 이번 일만 끝나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고 여유롭게 아기랑 살 거예요. 꼬박꼬박 칼퇴근하고 몸 관리도 더 잘하고. 좋은 엄마는 못되어도 노력하는 엄마는 되고 싶어서요.”
어느 정도 세희의 성격을 아는 강 관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히 물었다.
“서 사장한텐 숨길 생각이야?”
“이미 말했어요.”
“빠르기도 해라. 좋아서 입 찢어졌겠는데? 당장 담 달에 결혼식 올리는 거 아니야? 서 사장, 생긴 거랑 다르게 행동력이 끝내주던데.”
강준을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희에겐 행동력이 너무 끝내줘서 탈이었으니까.
“관장님, 저 강준 씨와 결혼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아니, 왜? 이제야 말하는데 예전에 서 사장이 세희 씨 선물 사는 거 도와달라고 불러내더니 넌지시 묻더라고.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알아채고 자기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고. 정 돕고 싶으면 이노패션 주식이나 있는 대로 사들이라고 조언해줬지. ”
“…….”
“재벌가 남자 중에서 그렇게 믿음직하고 지고지순한 남자 찾기 힘들어. 몇분 만에 말 바꾸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수두룩한 세상에. 서 사장 한번 믿어주면 안 돼?”
진경처럼 강 관장도 이해 못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세희도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그 남자 믿어보라고, 받아주라고,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지만 이건 타인이 아닌 제 이야기였고 강준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만은 촘촘히 깔린 지뢰밭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준이 아무리 손꼽히는 재벌이라도 한계는 있으니까.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가는 곳마다 동물원 짐승처럼 구경거리가 되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두고두고 재미로 물어뜯을 먹잇감이 되는 걸 막는 데 말이다. 동네 사람들이 제게 그랬듯이. 그랬기에 세희는 더더욱 독하게 마음먹어야 했다.
“조언 감사해요, 관장님.”
“하긴, 자기도 다 생각이 있을 텐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세희가 정중하게 거절한 걸 알기에 강 관장도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서 사장이 세희 씨 편에 선 이상, 이번 주주총회는 걱정할 게 없을 것 같고. 마지막 계획이나 들어보자구.”
“이모가 실명 확인이 어려운 숫자 계좌로 스위스에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하지 않았을 게 뻔하니 그걸로 협박해서 최대주주에서 물러나도록 할 거예요.”
“다음은?”
“이모 주식은 제가 다 매수할 거예요. 만약 강 관장님도 힘을 실어주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감사하구요.”
은연중에 주식을 팔 것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세희 씨가 이노패션 최대주주가 되겠다는 거야?”
“그게 제 경영권을 단단히 다지는 최고의 방법이니까요.”
대표직에서 더 욕심내서 세희는 이노패션을 온전하게 제 것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대주주가 되면 이노패션 우선주를 더 발행하고 배당률을 높일 생각이에요. 어차피 강 관장님도 경영권엔 관심 없고 배당금에 더 관심 있으시잖아요.”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우선주 배당에 인색해서 저평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희는 그걸 역으로 이용할 셈이었다.
“그러니까, 배당금 톡톡히 챙겨줄 테니 지분 다 세희 씨한테 넘기고 난 우선주로 갈아타라 이거야?”
조금은 기가 막힌 듯 강 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주시면 저도 좋고 관장님도 좋고. 일석이조 아닐까요?”
새침한 표정의 세희를 바라보던 강 관장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세희 씬 참 똑똑해. 폭풍전야가 따로 없다니까? 임신 축하해주는 뜻으로 그러지, 뭐.”
“감사합니다, 관장님.”
“내가 고맙지. 세희 씨 손 빌려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영희 엿 먹이는 건데.”
세희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오늘 강 관장을 만난 목적이 달성된 순간이었다. *** 강준을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집 앞까지 데리러 온 강준이 세희를 태우고 향한 곳은 M호텔 타워 39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룸. 39층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끝내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테이블 위, 예쁘게 플레이팅 된 디저트를 세희는 바라만 보았다. 입안에 침은 고이는데, 차마 손이 가지 않아서.
“여기 디저트는 입덧하는 임산부들도 잘 먹는다고 해서 예약했어요.”
강준의 설명에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 3개월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면 입덧이 점점 가라앉는다던데, 세희는 여전했다. 오늘도 레몬만 쪽쪽 빨아먹고 나왔으니까. 그런 세희를 지켜보던 강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작은 스푼으로 예쁜 오렌지빛 액체를 떠서 세희의 입 앞으로 대령했다.
“자몽 셔벗인데 맛이라도 봐요. 입맛에 안 맞으면 더는 권하지 않을 테니.”
마지못해 한 입 받아먹은 세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원하면서도 달콤쌉싸름한 맛이 신기할 만큼 입에 맞았다.
“이건…… 맛있는 것 같아요.”
강준에게서 스푼을 가져온 세희는 먹는 데 집중했다. 순식간에 하나를 해치운 세희에게 강준이 물었다.
“더 시켜줄까요?”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준은 웨이터를 호출해서 주문을 더 했다. 다른 디저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몽 셔벗만 먹는 세희를 강준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잘 먹는 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셔벗만 3접시를 비운 후 수저를 내려놓은 세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다 먹었으니까 이제 말해줘요. 강준 씨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고집스러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출산 전까지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게요. 대신, 세희 씨도 날 밀어내지 말아요. 프레 아빠 노릇은 제대로 하게 해주란 뜻이에요.”
잔뜩 예민하게 곤두선 주세희를 지금 몰아붙여봤자 득이 될 건 없었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서로의 곁에 머무르면서 억누르고 있는 감정을 되살릴 수 있는. 유태령이었을 적,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예쁜 눈빛과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때처럼.
“아기 낳기 전까지 우리 셋만 생각했으면 해요. 복잡하게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더 받고 서로 감정만 상할 게 뻔하니.”
고운 미간을 살며시 구기는 걸 보니, 강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워낙 야무진 성격이라, 아니다 싶은 건 당장 결론을 내야 하는 성격이니.
“무턱대고 내 뜻대로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강준은 기어이 찾아냈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운 주세희를 온순하고 무방비하게 만들 방법을. 주세희 너 하나 때문에, 수많은 생각을 참 많이도 했지. 결론은 네가 무방비해져야 빈틈이 생기고 내가 파고들 수 있다는 것. 지금의 넌 예리한 첨단이 파고들 빈틈도 없을 만큼 철벽을 세우고 있으니까.
“프레를 낳은 후에도 세희 씨 마음이 변함이 없다면…….”
지금은 주세희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다. 당연히 마음의 변화가 없을 거라고 장담하는 넌 내 제안을 얌전하게 받아들이겠지. 편한 마음으로, 무방비해져서.
“내가 깨끗하게 포기할게요. 결혼도, 아기도, 주세희도.”
그럼 남은 7개월 동안 난 전력을 다해, 주세희 널 공략할 계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