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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주세희 공략법. (76/110)

76. 주세희 공략법.2021.12.23.

16564553958323.jpg“프레야, 아빠 왔어.”

부드럽게 속삭이며 강준은 세희의 배를 바라보던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놀란 듯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눈빛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앙증맞게 올라선 긴 속눈썹은 사랑스럽고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은 유혹적이고. 오늘 왜 이렇게 예쁘냐고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우선 방해물 좀 처리한 후에. 못 알아먹었을 리가 없는데, 남자는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다른 손으로 세희의 눈을 살짝 가린 강준은 남자를 싸늘히 응시하며 입을 뻥긋거렸다. 당, 장, 꺼, 져. 마지못해 돌아서면서도 남자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몇 번이고 보았다. 눈이 가려진 채 강준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주세희를. 남자가 사라지자 그제야 강준은 세희를 놓아주었다.

16564553958327.jpg“혹시 나한테 사람 붙였어요?”

품에선 얌전히 안겨 있었지만, 핑그르르 돌아선 세희의 음성은 조금 앙칼졌다.

16564553958323.jpg“이 바닥이 의외로 좁은 거 알잖아요. 끼리끼리 놀고 싶어 하는 습성을 못 버리는 게 인간이고.”

핸드폰 속 사진을 세희에게 보여주며 강준의 시선이 2층을 향했다. 경진이 긴가민가하며 찍어 보낸 사진 속엔 여자가 둘이었다. 긴 머리와 단발머리. 사진을 본 후 강준의 시선을 따라간 세희도 2층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경진을 보았다.

16564553958323.jpg“장소가 장소인지라 안 올 수가 있어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술집 내부를 훑는 강준의 눈빛이 싸늘했다. 주세희라면 절대 찾지 않을 장소인 만큼 또 알리샤일 것이다. 하고 많은 장소 중에 하필 술집을, 그리고 이런 델.

16564553958327.jpg“알리샤는 어딨어요?”

담담한 음성과 달리 눈빛만큼은 싸늘했다.

16564553958327.jpg“언니한테 뭐라 하지 마요. 내가 알면서 나온 거고 언니도 합석 같은 거 안 한다고 미리 귀띔도 해놨…… 잠깐, 강준 씨 지금 무슨 자격으로 간섭하는 거예요?”

강준이 풍기는 살벌한 기운에 다급하게 변명하던 세희가 돌연 쏘아붙였다. 생각해보니 왜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 우린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쩌지, 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에게 프레가 있는데. 나에게 아빠 자격을 준 건 너고.

16564553958323.jpg“당연히 우리 아이 아빠 자격으로 이러는 거지.”

태연한 강준의 대답에 주세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늘 단정한 가면을 쓴 주세희가 가끔씩 이런 표정을 지으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다시 품에 안고 싶어 강준의 손끝이 간질거려왔다. 하지만 안으면 또 노려볼 게 뻔하니 참기로.

16564553958323.jpg“태교는 부모가 같이 하는 거고. 난 프레 아빠로서 안 좋은 건 듣지도 말고 보지도 못 하게 할 의무가 있고.”

16564553958327.jpg“잠깐, 설마 프레가 태명이에요? 누구 마음대로요?”

16564553958323.jpg“후보 중 하나예요. 몇 개 고른 후에 세희 씨랑 의논해서 정하려 했고. 혹시 태명 정했어요?”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아직 태명을 짓지 않은 눈치였다.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에 시선을 피한 세희가 물었다.

16564553958327.jpg“왜 프레인데요?”

16564553958323.jpg“프레젠트 줄임말이에요. 선물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

16564553958327.jpg“…….”

16564553958323.jpg“내가 준 선물이라면서요. 발음이 입에 착 감기기도 하고.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세희는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너무 취향저격이라서. 냉정한 남자가 지은 태명치곤 센스가 넘쳐서. 하지만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기엔 왠지 자존심 상했다. 늘 이 남자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서.

16564553958323.jpg“우선 나갑시다.”

강준이 비스듬히 몸을 트는 순간,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알리샤가 보였다. 마주치면 강준이 얼마나 자비 없이 알리샤를 몰아붙일지 알기에 세희는 얼른 강준의 팔을 잡았다.

16564553958327.jpg“언니랑 이 근처에서 둘이 밥 먹기로 했어요.”

16564553958323.jpg“취소했으면 하는데.”

16564553958327.jpg“내가 왜 그래야 해요?”

16564553958323.jpg“알리샤가 마음에 안 드니까. 다양한 접근법으로 생각해봐도 세희 씨와 우리 아기에게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는 존재고.”

16564553958327.jpg“그런 의미로 따지면 저도 경진 씨를 무척 싫어해야겠네요.”

세희의 반박에 강준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한 마디도 안 지는 귀여운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16564553958323.jpg“그래서, 꼭 만나야겠다?”

16564553958327.jpg“어차피 볼 날도 며칠 안 남았어요. 언니한테 도움받은 것도 있고, 아기를 생각하면 적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차분히 말을 잇는 세희는 지금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자신이 누군가를 만나는데 이 남잘 설득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서강준에게 아빠 자격을 준 건 자신이었다. 매끈한 손가락으로 턱을 가볍게 매만진 강준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16564553958323.jpg“대신 식사 끝나면 다시 나 만나요.”

봤는데 왜 또 보자는 건데. 격렬하게 눈으로 항의하는 세희에게 강준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16564553958323.jpg“집에 데려다줄게요.”

나도 차 몰고 왔다구요. 애도 아니고 혼자 갈 수 있다구요.

16564553958323.jpg“주세희, 대답.”

강준이 또다시 제이름을 부르는 순간, 세희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럴 때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그것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정한 눈빛으로. 결국 이번에도 세희는 지고 말았다.

16564553958327.jpg“그럴게요.”

이 남자와 늘 부딪치면 홀린 듯이 져버리는 건 자신이라는 걸 깨달으며. 여전히 이 남자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원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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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4553958323.jpg‘내 아내를 보거나 비슷하게 닮은 여자라도 보면 바로 연락해. 주세희란 이름을 들었을 때도.’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강준이 자신과 재우에게 한 말이었다. 그 정도 집착을 보이면서 이혼은 왜 하려는 건데, 주세희란 여잔 또 누구고. 설명이란 걸 안 해주니 의문만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늘 그렇듯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늘 경진은 강준에게 또다시 질색하고 말았다. 차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강준이 가져온 건 두툼한 책이었다. 한참 달아오른 술자리를 비집고 들어와서 독서라니. 얼마나 집중력 있게 책을 보는지 지금 이곳이 독서실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16564554013252.jpg“저 또라이 새끼 진짜.”

감탄을 너머 경악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놈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태연하고 당당히 독서하는 강준 때문에 뻘쭘해진 건 경진과 지인들이었다. 마음껏 대화도 못 나누겠고, 게임도 못 하겠고, 부어라 마셔라도 못하고. 덩달아 같이 정숙해지고 마시는 게 술인지 음료인지 헷갈릴 만큼. 그리고 하고 많은 책 중에서 ‘초보 아빠가 필독할 임신과 출산’이 뭐냐고. 아니, 잠깐, 뭐?! 갑자기 들이닥친 혼란스러움에 먼저 경진은 같이 술 마시던 지인들을 달래서 보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여전히 독서 중인 강준의 옆에 경진은 털썩 앉았다.

16564554013252.jpg“서강준, 너 애 아빠 되냐.”

베프로서 이건 꼭 물어야 했다. 그렇게 좋아죽던 아내랑 급하게 이혼한 이유가 설마 이거였냐고.

16564554013252.jpg“그래서 태령 씨랑 급하게 이혼하려 한 거야?”

이노패션 사장이 갑자기 사임을 표명했고 에슬레저 룩 쇼핑몰 대표를 추천했다. 메인 기사감은 아니지만, 술자리에서 대충 그런 말들이 오가는 걸 들었다. 그런데 쇼핑몰 대표 이름이 주세희였던 것…… 맙소사, 이 자식!

16564554013252.jpg“혹시 주세희가 임신해서?”

그렇게 묻는 경진은 친구로서 처음으로 강준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게 여자를 만나긴 했지만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결혼하면 이런 유희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아내만 바라볼 계획이니까. 그랬기에 경진은 친구의 외도가 더 화가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강준이 이럴 줄이야.

16564554013252.jpg“조강지처 버리고 갈아타는 거냐고, 너.”

강준은 그제야 천천히 책에 고정하고 있던 눈을 들었다. 이제 몇 장만 더 읽으면 두 권 완독인데. 바로 옆에서 경진이 유태령과 주세희를 입에 담으니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16564554013252.jpg“서강준 너, 알고 보니 진짜 몹쓸 새끼구나! 태령 씨를 어떻게 협박했길래 내연녀를 대표로 추천하냐고!”

무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강준을 바라보는 경진의 눈이 불탄다.

16564554013252.jpg“이 새끼야, 딴 여자 만나서 사고 칠 거면 태령 씨랑 이혼부터 했어야지! 사랑이 뭔지 아냐고 우리한테 뻐길 땐 언제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가만히 경진의 말을 듣고 있던 강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경진이 발휘한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재밌어서. 그걸 또 어떻게 그렇게 짜 맞추나 싶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오해한 경진이 갑자기 주먹을 날렸다.

16564554013252.jpg“이 새끼야,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면, 내가 우습냐?”

피한다고 피했지만 너무 근거리였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빗나갔는데도 강준의 입술이 터졌다. 비릿하게 번지는 피 맛에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는 강준에게 경진이 또 달려들었다.

16564554013252.jpg“내가 오늘 친구로서 널……?”

16564553958327.jpg“당장 그 손 못 떼요!”

뒤에서 앙칼지게 들려온 소리에 두 남자의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세희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경진이 얼른 물러났다. 터진 강준의 입술을 본 세희의 눈빛이 앙칼지게 변했다.

16564553958327.jpg“경진 씨 사고방식 훌륭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말로 하지 주먹은 왜 휘둘러요? 경진 씨는 주먹에 입이 달렸어요?”

16564554013252.jpg“아니, 나는 태령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16564553958327.jpg“주세희예요.”

16564554013252.jpg“예?”

16564553958327.jpg“내 이름, 유태령이 아니고 주세희라구요.”

16564554013252.jpg“아니, 그게 무슨…….”

그제야 천천히 일어난 강준이 경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16564553958323.jpg“박경진, 나 이혼한 지 며칠 됐다.”

16564554013252.jpg“어?”

16564553958323.jpg“나머진 나중에.”

16564554013252.jpg“어? 어, 그래.”

강준이 세희를 데리고 나간 후, 홀로 남은 경진은 멍한 표정이었다. 분명 유태령이 맞는데 주세희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 차를 두 대로 이동할 수 없으니 강준이 세희의 차를 몰기로 했다. 빌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강준이 차를 파킹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차에서 내렸겠지만, 세희는 머뭇거리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16564553958327.jpg“입술, 안 아파요?”

강준은 별것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잘생긴 입술에 난 생채기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괜히 저 때문에 오해받고 맞은 것 같아서. 시동을 끈 강준이 고개를 틀었다. 타는 듯 뜨거운 눈빛에 절로 긴장이 되어 세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16564553958323.jpg“별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손가락으로 입술의 생채기를 어루만지며 강준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16564553958323.jpg“좀 쓰라리긴 하네요.”

사실 강준은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걱정하는 말간 눈빛에 순간 욕심이 났다. 모처럼 주세희가 보여주는 관심이, 걱정이 좋아서.

16564553958327.jpg“그 근육은 관상용이에요? 온몸이 돌 같으면서, 왜 비리비리한 경진 씨 주먹도 못 피하고 맞고만 있어요?”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도, 바라보는 눈빛에도, 속상함이 잔뜩 일렁인다. 프레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 되는데.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고 아기 아빠인 나도 행복한데. 속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마음과 오늘만 욕심내자는 마음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하지만 승자는 결국 욕심이었다.

16564553958323.jpg“그러게. 비리비리한 놈 주먹이 꽤 세네요.”

별것 아닌 이 상처가 뭐라고, 주세희가 눈을 못 떼고 있으니. 울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해보니 주세희와 함께하는 동안 아픈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체력이 넘쳐나서 문제였지. 그래서 몰랐는데,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늘 단정하고 차가운 가면 안에 꽁꽁 숨겨놓은, 마음 여리고 정 많은 주세희가.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약한, 바보같이 착한 주세희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겨우 내리며 강준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16564553958323.jpg“온몸이 돌 같은 근육은 맞는데 입술은 근육이 아니라서.”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내가. 주세희 공략법을.

16564553958323.jpg“세희 씨도 알잖아요. 나도 입술은 부드러운 남자라는 거.”

의미심장한 짙은 눈빛에 세희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몰린 도톰한 입술이 강준의 시선을 아찔하게 홀린다. 안전벨트를 푼 강준은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16564553958323.jpg“쓰라려서 그런데, 주세희 씨가 호 하고 불어주면 안 되나.”

말도 안 되는 엄살이란 걸 안다. 아마 주세희도 알겠지. 그럼에도 해보고 싶었다. 주세희의 관심을 받을 수만 있다면. 숨결이 닿을 거리감에서 멈춘 강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희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손이 조심히 뺨을 감싸고 한숨이 뒤섞인 부드러운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16564553958327.jpg“호오.”

비스듬히 내리뜬 시선에 주세희가 보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집중하는 눈동자, 오므리고 있는 부드러운 입술, 달콤한 숨결. 주세희에게 입을 맞춘 건 강준에게 불가항력이었다. 초옥. 두 개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순간, 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준을 보았다.

16564553958327.jpg“당신…….”

제게 동요하는 말랑한 눈을 보자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가느다란 뒷목을 감싸 천천히 끌어오며 강준은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16564553958323.jpg“싫으면 피해, 주세희.”

그리고 보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 체념한 듯 풍성한 긴 속눈썹을 내리감는 어여쁜 주세희를.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는 강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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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이 순간을 바랐던 건지 모른다. 아슬한 간극, 타이밍. 많이 참고 그리워하며 기다렸던. 너의 다디단 숨결과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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