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프레야, 아빠 왔어.2021.12.19.
H 호텔 레스토랑 룸. 부모님을 기다리며 알리샤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조 여사의 아바타로 살아왔던 삶을. 작은 반항에도 채찍을 휘둘렀지만, 말만 잘 들으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엄마였다. 그걸 증명한 건 대학 졸업 후의 삶이었다. 독일의 명문대만 졸업하면, 자유로운 삶을 주겠다고 했다. 단 이노그룹을 위해, 정확히는 조 여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략결혼을 하기 전까지만.
‘재벌가 며느리가 되고 나면 평생 몸가짐을 조심해야지. 그 전에 실컷 남자도 만나고 즐길 것도 즐기렴.’
뒤늦게 처음 맛보는 자유는 지독히도 달콤했다. 또한 삶의 쾌락만 좇는 딸에게 조 여사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넉넉한 생활비와 원하는 취미 생활에 맞게 개인 선생님까지 붙여주었으니까. 그러다 만난 남자가 허경수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뻔한 남자들과 너무 다른 경수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런 자신이 무서워서 일부러 다른 남자도 만났지만 경수는 한결같았다. 마치 알리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조 여사에게 경수는 만족스러운 사윗감이 아니었다.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알리샤는 중얼거렸다.
“허경수, 조금만 기다려.”
나 이제 너에게 갈 거야. 30년을 살아가면서 처음이었다. 부모님에게 해보는 반항, 그리고 일탈,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한 삶. 얄팍한 의지와 용기에 수십 번도 흔들렸지만 결국은 너를 생각하며 나 용기를 냈어. 그러니까 제발 살아 있어 줘.
“정말 죽었기만 해 봐. 너 엄청 미워하고 원망할 거야.”
경수가 죽었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울며 욕을 해댔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식사를 거부했고 기절도 했고 죽다 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남자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알리샤에게 경수가 늘 웃으면서 했던 말.
‘당신이 날 떠나도 늘 같은 곳에서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과 결혼하고 나면 그곳에 정착하고 싶거든.’
독일 함부르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 시골은 싫다면서 질색하는 알리샤를 보며 경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우선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부모님이 들어왔다. 항상 온기 없는 엄마의 눈이지만 오늘은 그 눈빛에 잘 벼른 칼이 들어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해 안달이 난.
“배은망덕한 년.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더러운 것이랑 편을 먹고 날 배신해?”
가차 없는 비난에 조 여사를 향한 두려움이 서서히 몸을 잠식해왔다. 그럼에도 알리샤는 독하게 참아냈다. 난 이제 어른이야. 더이상 엄마의 꼭두각시가 아니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며.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어. 서강준 같은 남잘 어떻게 속여? 사기죄로 고소 안 당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알리샤의 반박에 조 여사가 싸늘하게 조소를 머금었다.
“들키면 그게 뭐 어때서? 사랑이 아니라 기업 간의 협약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야. 사기죄로 고소? 웃기지 말라고 해. 그래 봤자 둘 다 이미지 망치고 손해 볼 멍청한 짓을 한신에서 왜 하겠니?”
“엄마가 그런 말까진 안 해줬잖아!”
알리샤는 당황했다. 정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들키지 않으려고만 했고 들키면 끝이라는 생각만 했으니까.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아니? 넌 그 여우 같은 더러운 것의 꾐에 깜빡 속아 넘어간 거라고!”
주세희. 늘 차분하던 조 여사가 유일하게 분노하는 포인트였다.
“아주 꼴좋구나. 날 배신해서 이노에게 버림받고,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이혼까지 당하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남자가 이혼하자고 살벌하게 협박하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부해? 솔직히 그 남잔 내가 감당할 남자가 아니었다구!”
벌떡 일어난 조 여사가 핸드백으로 알리샤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이 멍청한 것아, 누가 평생 살라든? 어떻게든 기횔 봐서 그놈이랑 몇 번 잠자리하고 애만 가지면 끝날 일이었어! 애만 낳으면 그 후엔 너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애 낳는 기계야? 엄마도 서강준 봤잖아! 내가 어떻게 한다고 넘어올 남자가 아니었다구!”
알리샤도 지지 않고 악에 받친 듯 소리 질렀다. 그러자 조 여사는 기어이 알리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내가 널 독일에서 더럽게 놀게 내버려 둔 이유가 뭔데! 선생까지 붙여준 이유가 뭔데! 수많은 남자 다 상대해봤으면서 그깟 남자 하나 어찌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머리가 안 되면 몸으로라도, 침대에서라도 사로잡았어야지! 너한테 그거 말고 내가 바랄 게 뭐가 있다고!”
잡힌 머리채보다 조 여사의 말이 알리샤에겐 충격적이었다. 독일에서 몇 년간 누렸던, 조 여사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자유롭고 달콤했던 삶. 결혼 후 답답한 감옥 생활을 할 딸을 걱정한 엄마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치밀하게 짜인 계획이었을 줄이야. 조 여사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알리샤는 멍한 눈으로 영국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빠도 알고 있었냐고. 아니, 날 그런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었냐고.
“…….”
하지만 모녀의 막장을 지켜보는 영국의 눈빛은 차디찼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알리샤를 외면했다. 아픔 앞에서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펑 하고 터졌다.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며 뺨을 적시는 순간, 알리샤는 깨달았다. 결국 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보잘것없는 딸이었다는 걸. 이 자리도 혼자만 희망을 품고 나왔다. 그래도 자식인데, 할아버진 그렇다 쳐도 부모님은 결국 날 용서하겠지. 희미한 그 바람마저 산산조각난 순간, 알리샤는 온 힘을 다해 조 여사를 밀쳐냈다.
“두 분, 날 자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긴 해요?”
알리샤의 말에 조 여사는 콧방귀를 날렸다.
“사람 노릇을 해야 자식 취급을 해주지. 너처럼 멍청한 걸 배 아파 낳은 게 후회되는구나. 차라리 말 잘 듣는 짐승 새끼를 낳고 말지.”
불끈 쥔 주먹을 내려다보는 시야가 눈물 때문에 흐리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마디까지 새하얘진 제 손을 내려다보며 알리샤는 말했다.
“나도 후회해. 유영국과 조영희 딸로 태어난 거.”
“이것이 아직도 지 잘못을 모르고!”
다시 때릴 듯 손을 드는 조 여사에게 얄리샤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또 때리기만 해. 나도 이제 얌전히 맞아 줄 생각 없으니까.”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조 여사를 지나쳐서 문을 열기 전, 얄리사는 다시 돌아섰다.
“호적에서 파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고 식사는 맛있게 하고 가세요. 그래도 자식으로서 식사 한 끼는 대접해야 예의 아니겠어요?”
태연하게 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흐윽…….”
스스로가 한심했다. 완벽하게 혼자가 된 지금,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한 이 순간, 연락할 사람 한 명 없다는 게. 생각나는 건 그 애뿐이었다. 주세희, 그 독종.
*** 밤 9시, 알리샤에게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술 한잔할래.’
알리샤가 말한 장소는 강남에 위치한 간판조차 없는 술집이었다. 하지만 1, 2층으로 된 술집 내부는 고급스러움으로 점철된 공간이었고 은밀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도대체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블랙 슈트를 차려입은 직원이 안내해준 테이블에 알리샤가 앉아 있었다.
“오늘 술은 나보다 돈 많은 네가 사.”
앉자마자 알리샤는 대뜸 말했다.
“그러든지.”
차분히 대답한 세희는 테이블 위를 훑었다. 반이 비어 있는 양주병을 빤히 바라보자 알리샤가 키득거렸다.
“나 술 세.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술 다 마시고 내 발로 걸어 나가서 택시 타고 호텔로 갈 거니까.”
“누가 책임져 준대? 계산만 하고 갈 거야, 나.”
“독한 년. 이럴 때 보면 나보다 니가 더 엄말 닮은 것 같아.”
“말 함부로 하지 마.”
세희는 낮고 싸늘하게 일갈했다. 자신에겐 그 엄마에 그 딸이란 소리보다 더 끔찍한 소리였으니까.
“예민하기는. 술이나 받아, 독종.”
“나 이제 술 안 마셔.”
“뭐야, 재미없게. 그럼 왜 나왔어?”
“오죽하면 날 불렀을까 싶어서.”
알리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모 성격 알면서 뭐 하러 만나. 그냥 독일 가지.”
귀신같이 눈치챈 세희의 말에 알리샤의 눈가가 붉어진다. 하지만 거칠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선 툭 쏘아붙이듯 말했다.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 괜히 불렀어.”
“그럼 지금이라도 갈까?”
“야!”
피식 웃은 세희는 차분히 주변을 훑었다. 은밀한 공간치고는 젊은 손님들 대부분이 커플로 보였고 분위기가 점잖다고 해야 할까.
“이런 덴 어떻게 알았어?”
“한국 들어오자마자 천 내고 1년 이용권 샀어. 안전하게 사람 만나기 좋은 곳이거든. 원나잇보단 대화 위주랄까.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제야 세희는 깨달았다. 테이블의 남녀가 함께 온 게 아니라 여기서 합석한 거란 걸.
“걱정하지 마. 난 오늘 합석 안 한다고 미리 말해놨으니까.”
“실내 금연은 맞지?”
“그럴걸? 근데 너도 참 고지식하다, 이런 데서 그런 걸 따지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알리샤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따져야지. 나 임신했거든.”
푸웁. 알리샤가 막 머금었던 술을 뿜어내며 콜록거렸다.
“너 방금 뭐랬어?”
“나 임신했다구. 3개월, 정확히는 11주.”
“설마 애 아빠가 서강준?”
“응.”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알리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한참 뒤, 술 대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선 알리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서강준이 이혼을 서둘렀구나. 아이 때문에, 너랑 결혼하려고.”
“강준 씨는 나 임신한 거 어제 알았어. 그리고 난 그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 없어. 혼자서 잘 키울 거야. 아빠 몫까지 잔뜩 사랑해주면서.”
부드러운 눈길로 아직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세희는 손으로 조심히 어루만졌다.
“왜 결혼을 안 해? 보니까 너한테 단단히 푹 빠져 있던데.”
진경처럼 알리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만남 자체가 잘못되었어. 그걸 바로잡는 게 쉽다고 생각해? 감당해야 할 것도 많지만 이모한테 또 약점 잡히고 싶지 않아. 강준 씨한테 피해주기도 싫지만 내 아기만큼은 평범하게 자라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언니도 알 거 아니야. 국민들이 아는 재벌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무겁고 빡빡한지.”
그야 알긴 알지만. 그럼에도 알리샤는 혀를 찼다.
“이래서 너무 똑똑하고 생각 많아도 문제라니까? 너도 참 인생 복잡하고 힘들게 산다.”
“단순하고 쉽게 인생 살았던 언니는 뭐 얼마나 잘 살았는데. 술친구도 한 명 없어서 날 불렀으면서.”
“야! 넌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안 져?”
“언니가 뭐라고 내가 져줘야 하는데.”
한 마디도 안 지는 세희에게 질렸다는 듯 알리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너 잘났다. 임산부 때문에 술맛 떨어져서 못 먹겠으니 그만 일어나자.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계산해놔, 알았어? 밥은 내가 살 테니까.”
화장실로 향하는 알리샤를 보며 피식 웃은 세희도 일어났다.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못 보던 얼굴이네요. 두 분이 왔던데, 마침 저도 친구랑 둘이 왔거든요. 합석할래요?”
씨익 웃는 남자의 눈꼬리에 유혹이 가득하다. 이 술집을 방문하는 주목적을 염두에 둔 게 분명했다.
“여기 분위기가 별로라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러니 목적이 같은 다른 일행 찾아보세요.”
무심히 대답한 후 지나치려던 세희의 앞을 남자가 다시 가로막았다.
“그럼 같이 나가요. 우리도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아, 참고로 난 이런 사람.”
남자가 내민 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있는 명함을 보며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남자들은 한결같이 여자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말해야 한 방에 떨쳐낼까 생각하는 그때였다. 뒤에서 뻗어 나온 긴 팔이 세희 대신 남자의 명함을 받았다.
“동성 건설 박한이 전무라.”
머리 위로 내려앉은 익숙한 저음과 강렬한 체취에 세희는 반쯤 고개를 틀었다. 제 뒤에 바짝 밀착해서 명함을 보고 있는 강준이 보였다.
“……강준 씨?”
세희에게 부드럽게 눈을 맞춘 강준이 다시 천천히 눈을 들었다. 확연한 온도 차가 나는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며 명함을 다시 내밀었다.
“내 아이 엄마에게 수작은 그만 부리고 갈 길 가시죠, 박한이 전무.”
“이 숙녀분이…… 아이 엄마라고요?”
남자도 놀란 눈치지만, 더 놀란 건 지금 세희였다. 그러든 말든, 강준은 태연자약하게 세희의 허리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제 배 위에 올린 강준의 커다란 손에서 번진 온기가 배를 따스하게 감쌌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미처 방어할 틈도 없었다. 세희의 어깨 위로 얼굴을 스윽 내민 강준이 녹아내릴 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프레야, 아빠 왔어.”
세희를 배를 내려다보는 지그시 내리깐 눈빛은 봄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세희는 강준에게 여길 어떻게 왔냐는 말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도대체 프레가 누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