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완벽한 예비 아빠가 되기 위해. (74/110)

74. 완벽한 예비 아빠가 되기 위해.2021.12.16.

16564553505943.jpg“나 임신했어요.”

그 한마디에 차 안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정면을 응시하는 강준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정교하게 빠진 옆얼굴을 보고 있던 세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기분일까. 알고 있다. 임신이 지금의 강준을 더 집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서강준이 어떤 남자인지 알아서였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 그걸 나중에 강준이 알았을 때. 이 남자가 감히 어떻게 변할지, 그게 더 감당 안 될 것 같아서. 어차피 숨기지 못할 거라면 미리 밝히고 부딪히는 게 낫다. 한참 뒤, 다시 세희를 본 강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16564553505948.jpg“방금 한 말, 다시 해 봐요.”

16564553505943.jpg“……임신했다구요.”

다시 한번 대답한 세희는 처음으로 보았다. 완벽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걸. 또다시 흐르는 묘한 침묵에 이번엔 세희도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기뻐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16564553505948.jpg“아기 아빠는.”

미묘한 정적을 가르고 들려온 나직한 음성. 고개를 튼 세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 눈이 고요히 독촉하고 있었다. 얼른 진실을 말하라고.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는 것 같아 세희도 까칠하게 대답이 나왔다.

16564553505943.jpg“내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했다면, 그래서 강준 씨와 결혼을 못 하겠다면.”

16564553505948.jpg“…….”

16564553505943.jpg“그럼 어쩔 건데요?”

참 발칙하고도 대담한 질문에 강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16564553505948.jpg“주세희는 어쩌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 남자는 내가 과연 멀쩡하게 둘까.”

하지만 살벌함이 넘실거리는 새까만 눈동자는 태연하지 못했다. 엄한 이름 팔았다간 그 남자 제사 치르게 될 거라고 세희를 협박하는 것도 같았다. 집요한 눈을 고정한 채 강준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16564553505948.jpg“물론 내 아이겠지만.”

그걸 알면서 왜 그따위로 말해. 세희는 조금 기가 막힌 마음으로 쏘아붙이듯 물었다.

16564553505943.jpg“잘 알면서 왜 그런 질문을 했어요?”

16564553505948.jpg“말도 안 되는 핑계로 결혼을 거절하려는 것 같아서, 열 받았다고 할까.”

강준은 사실 세희를 테스트한 거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 만큼 나와 결혼하는 게 싫나 싶어서. 물론 주세희가 정말 그럴까 봐 대답을 듣지 못하고 털어놓긴 했지만.

16564553505943.jpg“나 그런 거짓말 안 해요. 그건 내 아이를 욕보이는 거고 아이를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싫구요. 그리고 괜한 남자 이름 댔다가 강준 씨가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미쳤다고 그런 핑계를 대겠어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일목요연한 세희의 대답에 강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쓸데없는 오해를 한 나만 미친놈이지. 주세희는 여전히 야무지시고.

16564553505948.jpg“그럼 더더욱 나랑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아기를 위해서라도.”

16564553505943.jpg“아기 아빠는 강준 씨가 맞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예요.”

순간 강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임신했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강준은 다시 세희를 보았다.

16564553505943.jpg“그 밤, 난 분명히 말했어요. 나에게 아기를 선물해달라고. 당신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주었고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주세희는 사람 환장하게 할 만큼 예쁜 눈과 입술로, 얄미운 말을 잘도 조잘거렸다.

16564553505943.jpg“물론 아빠로서 아기가 보고 싶으면 봐요. 하지만 강준 씨랑 결혼은 절대 안 해요.”

더이상 태연하지 못한 강준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16564553505948.jpg“그러니까 지금 내 아이를 임신했고 낳을 건데 나와 결혼은 안 하겠다. 하지만 아빠로서 보는 건 허락해주겠다, 이겁니까?”

16564553505943.jpg“강준 씨가 재혼하기 전까지요. 그 후엔 강준 씨 아내분과 의논해서…….”

16564553505948.jpg“그만.”

급기야 강준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세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재혼이라니, 주세희가 아닌 다른 아내라니.

16564553505948.jpg“나가도 너무 나갔잖아.”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강준은 조금 화가 난 눈으로 세희를 보았다.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사나이의 마음도 몰라주는 야속한 여자를 말이다.

16564553505948.jpg“하나만 물읍시다. 나랑 결혼 중에 뭐가 싫은 겁니까?”

16564553505943.jpg“……결혼이요.”

강준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전엔 진짜 유태령이 아니라서 안 되고. 지금은 결혼이 싫어서 안 되고. 왜 넌 항상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지. 움켜쥐려 할 때마다 사람 환장하게 빠져나가려고 하지. 여전히 날 사랑하는 예쁜 눈으로, 나를 차갑게 밀어내려 하지. 진짜 사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16564553505948.jpg“그러니까 왜 결혼이 싫은데.”

그 질문에 세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조그맣게 대답했다.

16564553505943.jpg“저 원래 비혼주의예요. 그리고 결혼엔 많은 의무와 책임감이 따르고 난 그걸 감당할 자신도 없지만, 너무 부담스러워요.”

16564553505948.jpg“그 결혼 나랑 이미 해봤잖아요.”

16564553505943.jpg“해봐서 싫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진짜 내 이름이 아니니까 결혼한 게 아니구요.”

그 대답에 강준은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그것도 아니면, 나 모르게 가족들이 주세희를 괴롭혔나, 등등.

16564553505948.jpg“진짜 주세희였다면, 나랑 결혼을 안 했을 것이다?”

16564553505943.jpg“강준 씨를 사랑하지만, 내 신념을 깰 만큼은 아니에요.”

그럼 신념을 깬 난 뭔데. 동생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너에게 흔들려서 번뇌한 난 뭐냐고. 하도 기가 막혀서 강준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16564553505948.jpg“그래서, 아기를 아빠 없는 애로 키울 계획이다?”

치사한 걸 알지만, 이제 강준은 아기를 볼모로 잡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이 여자를 잡고 싶었다.

16564553505943.jpg“물론 아기한텐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중에 제 마음을 알면, 아기도 절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아기만 이해하면 뭐 하냐고, 내가 이해를 못 하는데. 강준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한숨처럼 말했다.

16564553505948.jpg“도대체 뭘 그렇게 감당 못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요. 그럼 되잖아.”

그러니까 결혼만 해달라고, 내 옆에만 있어 달라고.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 건데. 그러자 세희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분히 물었다.

16564553505943.jpg“왜 강준 씨가 그래야 하는데요?”

그야 사랑하니까, 그것도 미치고 환장하게.

16564553505943.jpg“강준 씨가 그렇게 무조건 다 감당하고 다 해주면, 그럼 내가 행복할 것 같아요? 그게 강준 씨 사랑 방식이에요?”

16564553505948.jpg“주세희.”

16564553505943.jpg“내 말 안 끝났어요. 미안하지만 난 강준 씨와 달라요. 주고받는 사랑을 하고 싶고 동등한 사랑을 하고 싶고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근데 당신이랑은 그게 안 돼.”

왜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거라고 단정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한 말투와 다르게 울 것 같은 주세희의 눈동자가 그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16564553505943.jpg“당신은…… 서강준이잖아.”

자그맣게 속삭이며 세희는 푸욱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칼로 얼굴은 용케 가렸지만, 가늘게 떨리는 몸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그 떨림이 강준의 마음을 울렸다. 이번엔 또 뭐가 너를 그렇게 괴롭히는 걸까.

16564553505943.jpg“내 결심은 변함없어요. 그러니까 정말 날 사랑한다면 강준 씨가 날 포기해줘요.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아기에게 좋지 않구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세희가 차 문을 여는 순간,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4553505948.jpg“주세희 씨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줄게요.”

또다시 주세희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생겼다. 그게 뭐든 이번에도 말해주지 않겠지. 혼자 감당하고 해결하려 하겠지. 주세희가 공유하는 것에 서툴다는 건 이미 파악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 방식대로 너에게 다가갈 수밖에.

16564553505948.jpg“하지만 포기는 안 돼. 내가 주세희는 계속 봐야겠거든.”

지금 결혼이 싫다면 기꺼이 기다려줄 수 있다. 결혼이 급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너는 포기 못 해. 그러니까 그거 하난 주세희 네가 양보해.

16564553505948.jpg“내가 하나에 꽂히면 올인하는 성격이라.”

기가 막힌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세희에게 강준은 얄미울 만큼 태연하게 말했다.

16564553505948.jpg“오늘은 서로가 많이 놀라고 격앙된 거 같으니 이만 가죠.”

포기를 모르는 강준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빠른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신중했고 상황 판단력도 빨랐다. 그 신중함과 판단력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은 작전상 후퇴할 때라고. 별짓을 해도 지금 주세희의 결심을 바꾸지 못할 테니까. 임신이라는 변수가 생긴 이상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걸 어떻게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지. 배 속의 아기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강준에게 급한 건 아기가 아닌 주세희였으니까.

16564553505948.jpg“대신 이번엔 내가 전화하는 걸로.”

불필요했던 대화, 신경전, 그리고 다시 원점. 화가 났는지 차에서 내리며 주세희는 차 문을 쾅, 세게도 닫았다. 그 앙칼진 행동마저도 난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강준이 차에서 내렸을 때 주세희는 이미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16564553505948.jpg“주세희 씨.”

독할 만큼 냉정한 주세희가 돌아볼 리가 없지만, 강준은 안다. 그녀가 기어이 돌아보게 할 방법을. 9개월 동안 부부로 살아왔던 만큼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니까. 난 주위의 이목을 신경 안 쓰지만, 넌 끔찍할 만큼 신경 쓴다는 것.

16564553505948.jpg“세희야!”

좀 더 크게 부르자 예상대로 걸음을 멈춘 세희는 홱 돌아섰다. 돌아볼 때까지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를 강준의 성격을 그녀도 알기에.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격렬히 따지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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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미쳤냐고.

16564553505948.jpg“집 들어가면 불 켠 후에 얼굴 보여주는 거 잊지 말아요.”

그 눈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손을 흔들어주며 강준은 담담히 말했다. 다시 휙 돌아서서 여전히 곧은 자태로 단정히 걸어가는 세희를 보며 강준은 생각했다. 그래, 내가 미치긴 했지. 주세희 너에게 말이야. *** 주세희가 예고 없이 던진 핵폭탄은 한 시간 후에 펑, 하고 터졌다. 하필이면 한신 자동차 집무실, 그것도 윤 실장이 보는 앞에서. 머릿속은 산만하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 기복 때문에 가슴은 울렁거리고. 업무에 집중하면 좀 진정될 것 같아 강준은 바로 회사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16564553505943.jpg‘나 임신했어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세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알 수 없는 흥분감이 치솟았다. 임신이라. 너와 나의 아이라. 나보다는 주세희를 더 닮았으면 하는 우리 아이, 라. 사인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또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손에 쥐고 있던 M사의 만년필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16564553617032.jpg“사장님, 혹시 어디 안 좋으십니까?”

강준이 이런 적은 없는지라 놀란 눈으로 윤 실장이 물었다. 하지만 강준은 대답 대신 피식, 웃어버렸다. 맙소사. 결혼은 싫다면서도 주세희가 임신을 밝힌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아서. 나를 아는 거겠지. 괜히 숨겼다가 알게 되면 그 여파가 클 거라는 걸. 그러느니 차라리 매도 일찍 맞는 게 나을 테고. 참 조용하게 영리한 여자였다.

16564553505948.jpg“윤 실장님, 아내분 임신했을 때 기억납니까?”

강준의 질문에 윤 실장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16564553617032.jpg“기억 못 할 리가 없죠.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못 먹고 살이 쭉쭉 빠지는 걸 지켜보는 제가 더 애가 탔습니다. 근데 사실 입덧보다 감정 기복이 어찌나 심한지, 눈치 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윤 실장의 말에 그제야 강준은 독일에서 돌아온 후 주세희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살이 내려앉아 야윈 모습, 거뭇한 눈가, 주세희답지 않은 감정 기복. 그게 모두 임신해서였다니. 하지만 임신한 여자를 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 특히 오늘의 주세희는 더더욱 감정 기복이 심하긴 했다. 차분하다가도 흥분하고 얄밉게 새침을 떨다가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어찌 되었든 작전상 후퇴를 했으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기존의 계획이 주세희가 정신 못 차릴 만큼 직진해서 공략하는 거였다면, 지금은 유리 다루듯 조심히 다가가 어르고 달래야 할 것 같다. 주세희가 기꺼이 먼저 폭탄을 던져놓고 민첩하게 대비할 생각이라면. 강준은 그 폭탄을 기회로 만들어 더 다가갈 생각이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예민한 임산부를 어르고 달랠 방법.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강준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16564553505948.jpg“윤 실장님, 내일까지 가장 많이 팔린 임신, 태교, 특히 예비 부모에 대한 관련 서적 좀 준비해줘요.”

16564553617032.jpg“……예에?”

느닷없는 지시에 윤 실장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하지만 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16564553505948.jpg“유능한 산부인과 전문의와 심리학 박사도 같이 초빙해주는 것도 잊지 말고.”

뭐든 제대로 알아야 백전백승. 임신과 임산부에 대해 모르면 제대로 알 때까지 공부할 수밖에. 완벽한 예비 아빠가 되기 위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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