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나 임신했어요.2021.12.12.
강준이 떠나고 난 후, 세희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우선 뭐든 먹자였다. 하지만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음식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해준 음식은 그래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 떠오른 게 바로 진경이었다. 홈파티를 즐기는 진경은 음식 솜씨가 뛰어난 편이었고 세희의 입에도 잘 맞았다. 세희의 전화에 진경은 양손 가득 장을 봐서 40분 만에 들이닥쳤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요리하는 동안 진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진경이 뚝딱 차린 음식이 식탁 위 한가득이었다. 밀푀유나베, 감바스 알 아히요, 유자 리코타 치즈 샐러드, 연어 스테이크까지.
“뭐 해? 얼른 안 먹고.”
“응.”
대답만 하고 눈으로만 음식을 보는 세희에게 진경이 물었다.
“왜 안 먹어?”
“속이 울렁거려서 먹어도 되나 싶어서.”
진격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묻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느껴져 세희는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진경아. 그 사람 아기야.”
행복하다는 듯 잔잔히 웃은 세희는 아직 납작하기만 한 배에 조심히 손을 올렸다.
“간절히 바랐던 일인데 바보같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기에게 너무 미안해.”
워낙 불규칙한 생리 탓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바람에, 임신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몸 관리에 소홀했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아기의 존재를 빨리 알아주지도 못하고.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버거우면서도 감동이었다. 행복함에 젖은 세희와 달리 진경은 막막한 표정이었다.
“세희야, 아직 우리나라는 싱글 맘이 혼자 아기를 키우기엔 좀 더 변화를 겪어야 하는 나라야.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많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
진경이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세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동네를 벗어나기 전까지 세희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던 말들.
‘그 엄마에 그 딸이겠지.’
‘더러운 피는 못 속인다던데 쟤도 남자 후리는 거 봐.’
‘조그만 게 쥐뿔도 없으면 살갑기라도 해야지, 자존심만 세서는.’
재밋거리로 별생각 없이 흘린 동네 사람들의 말은 세희의 가슴을 참 아프게도 할퀴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피를 철철 흘리든 말든,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엄마의 딸로 태어나고 찢어지게 가난하단 이유만으로, 걸핏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상처뿐인 과거를 떠올릴수록 독기가 다시 응집하는 걸 느끼며 세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당할 수 있어. 난 무능력한 엄마랑 다르니까. 옛날의 주세희가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거 하나 정돈 욕심낼래.”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허락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평범한 삶, 부모님의 사랑, 주변 환경, 먹고사는 것, 지인들, 하다못해 사랑조차. 그 속에서 희박한 확률로 이루어진 간절한 바람이었다.
“세희야.”
“진경아, 네가 날 걱정하는 거 알아. 하지만 내 말 먼저 들어 줘.”
세희는 억울했다. 서강준도 포기해야 하는데 그 바람까지 포기해야 하면, 너무 내게 가혹하잖아. 홀로 남겨질 날 위해, 마음 놓고 사랑하고 내 전부를 쏟아부을 수 있는 가족 한 명 정도는 가져도 되는 거잖아.
“나 사실은 무서웠어. 생각해 보니 내 인생 자체가 이모더라구. 그런 이모를 무너뜨리고 나면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모르겠더라. 나도 내가 이렇게 한심할지 몰랐어.”
정말 29년이란 인생이 온통 이모뿐이었다. 29년을 쏟아부은 인생이 사라져버리면. 그리고 할머니까지 돌아가시면. 그럼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막연하게 두려웠고 절박했고 삶의 갈피를 잃은 기분이었다. 삶을 즐길 줄 모르고 돈도 쓸 줄 모르고, 인간관계도 엉망진창이고. 그런 세희에게 아기의 존재는 새롭게 주어진 삶의 목표이고 희망이고 전부였다.
“내 이기적인 욕심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건 아기한테 미안해.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아기를 원했어.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해 줄 거고 남은 인생은 아기를 위해 살 자신 있어.”
진경이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세희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하게. 그런 세희가 걱정되면서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진경이었다. 그래, 내가 아니면 주세희 널 누가 믿고 응원해주겠어? 벌떡 일어난 진경은 세희에게 다가가 덥석 껴안았다.
“주세희, 너 절대 혼자 아니야, 알지? 나도 있고 진우 오빠도 있어.”
세희의 마른 등을 토닥여준 진경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그 사람한테는 말 안 할 거지?”
“내가 숨긴다고 모를 남자가 아니야.”
세희도 이 부분은 답답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쭈, 때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특히 그 사람 네 이복언니 남편이잖아.”
마지막 말은 왠지 조심스러워지는 진경이었다. 세희가 가진 정신적 트라우마를 알고 있기에.
“진경아, 강준 씨 언니랑 이혼했어. 나랑 결혼하고 싶대.”
놀라긴 했지만 세희의 말에 진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주세희도 행복해질 권리가……?
“근데 나 강준 씨랑 결혼 안 할 거야.”
“뭐어!? 아니,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강준 씨, 한신 그룹 후계자가 될 사람이야.”
“잠깐, 한신이면…… 한신 자동차 대표 그 서강준?”
진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노그룹이니 사위도 비슷한 수준의 중견 기업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껏 주세희가 말한 강준 씨가 한신의 서강준이었다니.
“내 일을 왜 한신가에 떠넘겨야 해? 그런 민폐 끼치기 싫어. 그리고 이모가 알고 있잖아. 그건 곧 나와 아기가 그 사람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야.”
세희는 잘 알고 있었다. 조 여사가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뭔지. 주세희란 이름으로 당당하게 한신가의 며느리가 되는 것. 시궁창에 처박혀도 눈이 뒤집혀 마지막 발악을 하겠지.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 나와 서강준을 망치려 들겠지. 둘만의 악연이 강준에게까지 번지는 게 싫지만 무엇보다 아기를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난 내 아기가 나나 그 사람과 달리 평범하게 자라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한신가의 아이로 태어나면 그게 안 돼. 더더욱 나 같은 여자가 아기 엄마라면. 그러니까 아기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 사람 포기해야 해. 나만 포기하면, 그 사람도 아기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이미 독하게 마음먹은 세희가 진경은 그저 안타까웠다. 어떻게 된 게 넌 사랑하는 남자도 평범하지가 않니. 넌 왜 도대체 사랑도 어렵게 해야 하는 거니. 아픔이 많은 만큼 독했지만, 그 마음만은 여린 친구였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죽도록 싫어했고, 자신이 마음을 연 사람에겐 한없이 너그럽게 퍼주는 바보. 자신한테도 그런데 사랑하는 남자에겐 오죽할까. 털끝만큼도 피해 입히기 싫겠지. 이래서 사람이 너무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고 자존심이 세면 안 되는 거다. 나 같으면 앞뒤 생각 안 하고 능력 좋은 그 남자에게 모든 걸 떠넘길 텐데. 아늑한 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행복해할 텐데. 안 좋은 건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인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진경에게 세희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경아, 나 자신 있어. 그러니까 너만은 내 편이 되어주면 안 돼? 괜찮다고 말해주면 안 돼?”
진경은 대답 대신 세희를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독하고 악착같이 살아오느라 지쳐버린 친구가 안쓰러웠다. 오죽 외롭고 두려웠으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싶어서. 뭐든지 혼자 척척 잘 해내던 친구는 스스로 평범해지고 행복해지는 것만은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넌 왜 못하는데. 그럼에도 진경은 간절히 바란다. 한신의 후계자가 주세희보다 더 독하고 집요한 남자이기를. 그래서 주세희를 기어이 설득해서 결혼하기를. 모든 걸 감당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기를. 주세희도, 그리고 아기도.
*** 다음 날 아침. 세희는 산부인과에 들러 임신을 확인했다. 3개월, 정확히는 11주. 아기의 벅찬 심장 소리를 들었고 흑백으로 가득한 초음파 사진을 받았다. 그 후 바로 강준에게 연락을 했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정확히는 집 앞까지 데리러 오겠다는 강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서강준에 대한 기사를 포털에서 검색했다. 대통령과 방미 일정을 함께 한 기업들 중, 한신 자동차가 언론의 최대 관심사였다. 서 회장의 유일한 손자가 한신의 후계자가 될 거라는 건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다 안다. 다만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기에 굳이 얼굴을 공개하진 않았다. 하지만 언론 기사를 보니 조만간 한신에서 강준을 후계자로 공표할 분위기였다. 그럼 얼굴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고 언론의 관심은 죄다 강준에게 쏠릴 것이다. 화려한 배경에 완벽한 비주얼까지 갖추었으니 연예인보다 더 유명인사가 될 건 뻔했다. 이젠 시간의 흐름마저 서강준을 포기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서강준은 네가 감히 감당할 남자가 아니라고, 아기가 감당할 수 있는 삶도 아니라고. 또한 이모에게도 무시당할 생각도 없었다. 너도 결국은 네 엄마와 다를 게 없는 더러운 존재라는 말 따위 절대 못 하도록. 그래서 세희는 오늘 강준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다. 그게 뭐든지, 오늘 다. 흐지부지하게 구는 것도 싫고 흔들리는 것도 싫으니까. *** 저녁 7시가 되자 강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을 나오자 빌라 입구에 잘 빠진 SUV가 서 있었다. 강준이 직접 운전할 때 몰고 다니는 차였다.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은 세희는 앞을 보면서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길게 시간을 끌기도 싫고, 빙빙 돌려 말하기도 싫고. 그러니까 본론부터 먼저 말하자.
“강준 씨.”
“거기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더 생각하고 대답해요.”
무슨 대답을 할지 안다는 듯, 강준은 태연히 말을 잘랐다. 하지만 세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지 마요. 전 강준 씨랑 절대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요.”
그제야 강준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히 물었다.
“왜 당연한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강준 씨랑 결혼하는 게 왜 당연한 거예요? 너무 오만한 생각 아닌가요?”
세희가 지지 않고 받아치자 강준이 조수석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이봐요, 주세희 씨.”
뭐요, 뭐. 세희가 새침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강준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이것 봐라, 하는 것처럼.
“나와 결혼식도 올렸고 한집에서 살았고 한 침대에서 잤어요. 그뿐인가? 우리 굉장히 격렬했던 잠…….”
“그만! 더 말하기만 해 봐요. 당장 차에서 내릴 테니까.”
이 야한 어흥이 같으니라고! 세희가 눈을 부릅뜨며 속삭이듯 작게 위협하자 강준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씩씩거리는 세희에게 강준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린 이제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라고 난 분명 말했고, 주세희는 거부하지 않았지.”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저음이 보이지 않는 올가미처럼 세희를 조여온다.
“그러니까 주세희 씨. 책임이란 걸 지셔야지.”
난 절대 널 놔줄 생각 없으니, 네가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세희도 물러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닌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
“미안하지만 난 당신 책임 못 져요. 그 부부 사이, 내가 먼저 끊을래요.”
고집스러운 세희의 대답에 잘생긴 미간을 구기며 몸을 뒤로 물린 강준이 말했다.
“떳떳하게 다가가려고 당신 언니랑 이혼했고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설득했어요. 그런데도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요?”
“두 분에게도 다 말했다구요?”
“꼭 필요한 부분만 말했어요. 그래야 설득이 가능하니.”
세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강준이 원망스러웠다. 왜 늘 이 남자는 뭐든 쉽게 생각하지? 당신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나에겐 숨기고 싶은 치부인데. 두 분에게만큼은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었는데. 도대체 왜. 파르르 눈동자를 떠는 세희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강준이 다시 물었다.
“이제 대답해 봐, 주세희.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내게 있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뭐든 쉽듯, 난 뭐든 어려워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나와 당신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야. 사랑이 면죄부가 아니듯,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걸 똑똑한 당신이 왜 몰라. 날 내버려 두는 게 날 편하게 해주는 최선이라는 걸. 그 최선을 위해 세희는 다시 한번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강준 씨.”
긴 속눈썹 너머로 강준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요.”
미안해요, 강준 씨. 난 이제 당신보다 내 아기가 더 소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