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더 많이 사랑한 게 죄지.2021.12.09.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결혼을 해.”
가까이 들려오는 부드러운 속삭임에 세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단단한 팔이 작은 몸을 좀 더 품으로 끌어당겼다.
“주세희. 세희야.”
참았던 것들을 터뜨리듯 애틋하게 귓가에 속삭여오는 그 이름에 가슴이 아리다. 이 품에 더 안겨 있고 싶고, 내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이 더 듣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린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이니까.
“대표님, 사람들이 봐요. 우선 좀 놔주세요.”
세희는 최대한 침착하게 타이르듯 말했지만 강준은 답이 없다. 내 말, 듣기는 한 걸까.
“대표님.”
“…….”
“서강준 대표님.”
“…….”
“강준 씨?”
“……응.”
고집불통 어흥이 같으니라고. 세희는 한숨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저 좀 놔주실래요. 우리 이럴 사이 아니란 거 강준 씨가 더 잘 알잖아요.”
“조금만 더.”
커다란 대형견이 주인에게 앙탈을 부리는 것도 같아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화낼까요?”
그 한마디에 빠른 속도로 세희를 놓아준 강준이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돌아서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히 서 있는 강준이 보였다. 늘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건 내 몫이지.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당연히 결혼해야지.”
강준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유부남이라는 유일한 장애물이 사라진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정말 그것만이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세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강준 씬 저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지난날의 주세희에 대해선 알 만큼 알아. 앞으로의 주세희는 함께 알아갈 생각이고.”
항상 느끼지만 말문을 막히게 하는 재주를 타고난 남자였다. 태연한 눈빛, 표정, 말투. 이번에도 부끄러움은 오로지 제 몫이었다.
“그럼 내 아빠가 누군지도 알겠네요.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게 뭔지도.”
느릿한 손길로 팬츠 주머니에 손을 꽂은 강준이 담담히 대답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당한 게 있으면 되돌려주는 게 당연한 거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강준과 자신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뭐든 조심스럽고 어렵게, 서강준은 뭐든 쉽고 편하게.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온 삶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 하긴, 당신에게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겠지. 그런 걸 모르고 자랐을 테니까. 사는 게 참 편해서 좋겠다, 서강준 씨 당신은. 하지만 난 아니야. 작은 것 하나라도 신중하게 결정하고 판단하고 튼튼한 돌다리도 수십 번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해.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런데도 강준 씬 내가 좋아요?”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고.”
“…….”
“사랑하는 거지.”
“…….”
“그것도 환장할 만큼 미치게.”
한결같은 남자 앞에서 세희는 그만 전투 의지를 잃어버렸다. 강준이 오기 전까지 머리 아프게 고민했던 게 무색할 만큼. 우리가 결혼해선 안 되는 이유. 아니, 당신이 나와 결혼을 못 하는 이유. 그 모든 걸 너무도 가뿐하게 감당하겠다는 이 남잘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내내 잠잠했던 위가 갑자기 신호를 보내왔다. 손으로 입을 막은 세희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강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안 좋아요?”
“요즘 잘 체해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강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선 세희는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를 잡고 헛구역질을 몇 번 하자 울렁거렸던 빈속이 가라앉았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가자 벽에 기대어 있던 강준이 세희에게 다가왔다.
“소화제, 위장약. 증상에 맞는 걸로 먹어요.”
강준이 내미는 약을 세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에게 임신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야. 병원도 안 가봤지만 무엇보다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그가 정말 결혼을 원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약을 받아드는 세희의 얼굴을 살피는 강준의 눈빛이 집요하다.
“신경 쓰이게 갈수록 살이 빠지네.”
“…….”
“얼른 결혼해서 옆에 붙어 있든가 해야지.”
그제야 세희는 기가 막힌 눈빛으로 강준을 보았다. 살 빠진 게 왜 또 결혼으로 연결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하지만 이젠 반박할 만한 힘도 없었다. 결국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 좀 줄래요?”
“내키진 않지만 그럽시다.”
“연락은 제가 할게요.”
“그러시든지요.”
근데 뭔가 미묘하게 삐딱하다. 강준의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세희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설마 삐진 건 아니죠?”
“삐지진 않았고.”
거짓말, 삐졌으면서.
“좀 서운하달까. 늘 나만 미친놈처럼 안달하는 것 같아서.”
“…….”
“더 많이 사랑한 게 죄지.”
피식 웃은 강준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갑시다, 데려다줄 테니.”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하날 양보했으니 주세희 씨도 하날 양보해주셔야지.”
도대체 뭘 양보해줬는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바라보자 강준이 태연히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 줬잖아요.”
“그게 어떻게…….”
양보한 거냐고 따지려는 순간, 강준에게 말이 잘렸다.
“원래는 허락할 때까지 안 보내주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보여서 보내주는 거예요.”
“강준 씨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였어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또 도망치듯 빠져나갈 게 뻔한데 나라고 별수 있나.”
중얼거리듯 대답한 강준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빤히 내려다본다.
“누구 때문에 내가 지금 좀 여유가 없거든.”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은 책망을 하는 것도 같았다. 끝끝내 날 믿지 않고 떠나버린 너 때문이라고. 그래서 세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남편이었을 적, 그가 얼마나 배려심과 매너가 넘치는 남자였는지 알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강준이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자신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테니까.
“다시 묻죠. 내가 데려다주는 데 이의 있어요?”
강준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자신을 향한 강준의 진심을 기만한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고 또다시 그런 상황이라면 똑같이 그럴 것이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긴 한숨을 내쉬며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 세희가 몰고 온 차는 강준의 운전기사가 몰고 따라오기로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앉게 된 강준의 옆자리. 괜히 어색해서 세희는 입을 열었다.
“차 바꿨어요?”
“바꾼 건 아니고 하나 더 샀어요.”
여전히 우아한 운전실력을 뽐내는 강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특히 그의 손. 평소에는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그의 눈이 가장 좋지만 운전할 땐 그의 손이었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해야 할까. 홀린 듯 손을 바라보는 그때 하필 신호가 바뀌고 차가 멈추었다. 강준이 고개를 틀었고 시선이 얽혔다.
“…….”
“…….”
적색 신호, 멈추어 선 차, 뜨거운 눈동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지며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일 초가 한 시간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차는 다시 부드럽게 출발했다. 달아오른 얼굴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스스로도 모르겠다. 키스 안 한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인지, 키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의 한숨인지.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잔 너무 운전을 점잖게 잘해. 지금은 완벽한 타인인데도 강준과 둘이 있는 이 순간이 참 좋다. 때때로 느껴지는 뜨거운 눈빛, 차 안을 가득 채우는 강력한 체취, 나직하고 고른 숨소리. 잠이 들어버린 건 그래서일지도. *** 세희가 눈을 떴을 땐 의자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몸을 덮고 있던 강준의 재킷을 품에 안다시피 잠들었다. 이래서 푹 잤나 봐. 재킷에서 풍겨오는 서강준의 체취 때문에. 조수석의 등받이를 세우며 세희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미쳤어, 주세희. 어떻게 잠들 수가 있어.”
창밖을 내다보자 익숙한 풍경 속에 통화 중인 강준이 보였다. 세희가 차문을 열고 내리자 돌아본 강준이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하도 곤히 자서 깨우질 못했어요. 잘 잤어요?”
안색을 살피며 강준이 싱긋 웃자 괜히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시선을 피하며 세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즘 잠을 못 자서…….”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밤에는 잠을 설치고, 낮에는 말도 못 하게 졸린데 눈을 감으면 잠이 안 오고. 임신인 걸 알아서인지, 이젠 정말 잠이 대놓고 쏟아졌다.
“나도 요즘 계속 못 잤는데.”
나직하게 스며드는 음성에 고개를 든 세희는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냥, 같은 이유인가 해서요. 늘 같이 자던 사람이 없어져서 그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와 세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 아니면 말고.”
무심히 말을 맺은 강준은 몇 개 안 되는 빌라 건물들을 눈으로 훑었다.
“몇 동 몇 호예요?”
너무도 당연하게 물어와 세희는 하마터면 곧이곧대로 대답할 뻔했다.
“집 주소까지 말해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건 당연히 허락 안 해 줄 거고, 잘 들어갔는지 여기서라도 지켜볼게요.”
이쯤 되니 세희는 궁금해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집 주소까진 뒷조사 안 했나 봐요.”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냈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느긋한 눈빛으로 강준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굳이 뭐 하러. 본인에게 직접 들으면 될 것을.”
“내가 왜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말 안 해줄 이유도 없으니까.”
“…….”
“내가 주세희한테 해될 짓을 안 할 건 본인이 더 잘 알 테니.”
맙소사, 두 달 사이 어흥이는 더 뻔뻔하고 당당해져 있었다. 피식 웃은 강준은 다시 빌라 건물을 바라보았다.
“세희 씨 자는 동안 빌라 드나드는 입주민들 봤는데 젊은 남자들이 꽤 많더라고. 그건 알고 있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주변 인프라가 좋고 회사와 가깝고 외부인 통제를 철저히 하는 게 마음에 들어서 사는 건데.
“특히 2동으로 많이 들어가던데. 설마 2동은…….”
“전 1동이에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사악할 만큼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준은 천천히 물었다.
“1동 몇 호?”
하, 나도 이젠 모르겠다. 한다면 하는 남자니 그냥 말해주고 집에 빨리 들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505호요.”
“505호라.”
작게 중얼거린 강준은 눈으로 1동 505호의 위치를 눈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집에 불 켜고 테라스로 나와서 얼굴 보여줘요. 그럼 갈 테니까.”
버텨보았자 시간 낭비일 것 같아 세희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섰다.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달라붙는 강준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하다. 강준이 던진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자신을 점점 조여오는 기분. 강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 그렇다고 막 싫은 것도 아닌. 집에 들어온 세희는 잠시 고민했다. 대낮이라 밝아서 거실의 불을 켤 필욘 없지만, 테라스로 나가서 얼굴을 보여줘야 할지 말지.
“흥, 기다리든지 말든지.”
세희는 테라스로 나가는 대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막연히 버티고 앉아 시간을 죽였다. 그냥 늘 제멋대로 구는 강준처럼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못되게 굴고 이기적으로 굴고, 서강준에겐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동시에 간절히 바랐다. 서강준이 자신의 예상에서 어긋나주기를. 내가 더는 당신에게 흔들리지 않게. 20여 분 정도를 악착같이 버티던 세희는 결국 못 참고 일어났다.
“그렇게 바쁜 남자가 설마 진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
테라스로 나가 밖을 내다본 순간, 세희는 자신이 깨끗하게 졌음을 인정했다. 강준은 차체에 몸을 기댄 채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시선을 뗀 적 없다는 듯. 세희를 보았다는 신호로 강준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인사에 세희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정한 연인이 헤어지기 아쉬워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강준을 태운 차가 사라지자 세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또 내가 졌네.”
서강준은 이번에도 예상했을 것이다. 결국은 자신이 나와볼 거라는 걸. 제 속을 늘 꿰뚫어 보고 뒤흔드는 그 남자가 얄밉고 원망스럽다.